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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문보 Oct 31. 2021

죽음을 목전에 둔 한 남자, <썬다운>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아이콘 섹션 상영작


세부적인 요소에서 차이가 있겠지만 미셸 프랑코 감독의 전작들(<애프터 루시아>(2012), <크로닉>(2015), <에이프릴의 딸>(2017), 그리고 <뉴 오더>(2020))은 항상 ‘욕망’이라는 테마를 경유한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전쟁의 정중앙을 저격하는 디스토피아 스릴러 <뉴 오더>로 제77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은사자상(심사위원대상)을 차지했던 미셸 프랑코는 <썬다운>(2021)으로 1년 만에 다시 한번 제78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크로닉>처럼 죽음을 냉정한 시선으로 살펴보는 <썬다운>은 제삼자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주인공 닐(팀 로스)의 일탈을 매개로 인간의 욕망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영화는 영국에서 양돈업 및 도축업으로 성공한 가문의 장남 닐이 동생 앨리스(샤를로뜨 갱스부르)와 조카들과 함께 멕시코 해안 리조트에서 바캉스를 보내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외관상으로 평화가 존재하긴 하나 어디선가 감지되는 섬뜩한 기운이 관객들에게 평화로운 분위기를 기대하지 말라고 일찍이 단언한다. 바다 한가운데서 평화롭게 노는 조카들과 달리 닐은 겨우 숨을 내뱉는 생선들을 무심히 쳐다볼 뿐이다. 아울러 닐의 읽어낼 수 없는 표정에 연동되며 파열음으로 변질된 고요한 파도 소리를 좇다 보면, 수영장에서 시체처럼 힘없이 늘어진 채로 둥둥 떠 있는 그가 다시 나타난다. 이처럼 장면이 바뀔 때마다 제시되는 암울한 이미지들은 닐을 마치 실재하지 않는 존재처럼 그려낸다. 그런 닐이 유일하게 계속 응시하는 것은 푸른 하늘에 뜬 태양이다. 이때 카메라는 닐의 시점 숏으로 태양을 포착한 다음에, 미세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정말 극단적인 클로즈업 숏을 통해 태양의 표면을 닮은 닐의 피부를 비춘다. 무언가를 태워버릴 듯한 태양과 무언가에 의해 불타오를 듯한 피부 간의 시각적인 유사성은 닐의 어떤 집착 혹은 폭주가 시작될 것임을 암시한다.



다음날 오전 갑작스럽게 어머니의 임종 소식이 전해진다. 앨리스는 거의 기절 직전에 빠지고 조카들은 슬픔에 잠긴 반면, 닐은 어떤 감정적 반응을 일절 드러내지 않는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급히 수속 절차를 밟으려 하자 닐은 호텔에 여권을 두고 온 것 같다고 거짓말하며 앨리스와 조카들을 먼저 영국으로 보낸다. 정황상 닐은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는 가족을 바라보고 있으나 그의 시점 숏에는 어느 누구도 보이지 않고, 반응 숏에는 아무 감정도 감지할 수 없다. 여기에, 두 숏을 연결시키는 편집은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는 닐의 태도를 명백히 나타냄으로써 그와 가족 간의 물리적 거리를 넘어 심리적 거리를 배가시킨다. 더 나아가, 공항에서 나와 택시 기사에게 이전 호텔이 아니라 다른 호텔로 안내해달라는 닐의 모습은 현재 그에게 가장 중요한 안건은 ‘그저 가족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질 수 있는가?’다. 해변 근처에 있는 낡은 호텔에 도착한 닐은 캐리어를 여는데 여권이 바로 시야에 들어온다. 즉, 닐의 거짓말은 애초에 계획된 것이다. 무심한 얼굴로 해변에서 오후를 보낸 닐은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앨리스의 연락을 받는다. 앨리스는 장례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함께 의논할 게 있으니 어머니의 사망 증명서를 받는 대로 영사관에 방문해 긴급 여권을 발급받으라고 당부하지만, 닐은 성의 없이 대답만 할 뿐이다. 무엇보다 외벽에 반사된 빨간 네온사인은 닐을 장악함으로써 육친의 비극을 무감각하게 대처하는 그의 기묘하고 무서운 모습을 두드러지게 그려낼뿐더러,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는 지독함을 수면 위로 조금 더 끌어올린다.



<썬다운>은 초반부 닐의 시점 숏에 포착되었던 강렬한 태양을 그가 겪는 이명과 함께 인서트 숏으로 중간중간 삽입하며 닐을 점점 조이는 흉조를 상기한다. 분명 인서트 숏이 닐의 관점에서 펼쳐지므로 그가 자신에게 들이닥칠 일을 모르지 않을 거라고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닐은 앨리스의 연락을 더는 받지 않으려고 핸드폰을 아예 끈 다음, 매일 젊은 멕시코 여성 베리디세(아주아 라리오스)와 맥주를 마시고, 춤을 추고, 육체적인 관계까지 가지는 등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이어간다. 심지어 해변에서 난데없이 총살이 발생했음에도 닐은 당황하지 않고 자기 휴식과 하루 루틴에 집착한다. 이와 함께, 어머니의 장례식을 혼자 마친 앨리스가 예고 없이 본인 앞에 나타났을 때, 당황하지 않고 자기 거짓말을 전부 인정하는 닐의 장면은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도덕과 윤리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잔혹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관객들에게 굉장한 충격을 안긴다. 무엇보다 앨리스가 자신의 재산을 노린 괴한의 습격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지만 닐이 크게 동요하지 않는 시퀀스는 분노를 유발하기까지 한다. 앨리스의 죽음을 사주한 용의자로 몰린 상황에서 닐은 울먹이지만, 사실 이 눈물은 동생이 죽은 것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본인의 안식이 단절될지도 모른다는 이기적인 위기의식에 의한 반응이다. 교도소에서 시종일관 무감각한 표정을 유지하며 자기 쾌락의 대상인 베리디세의 안위만 걱정하는 모습이 이를 방증한다. 그런데 영국 축사에서 키우는 돼지 한 마리가 보이는 환시를 갑자기 겪은 닐은 미세하지만 흠칫한 표정을 지으며 처음으로 심리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 축사 안 돼지들의 운명이 ‘죽음’ 하나로 정해져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 아마도 교도소 안에 있는 닐은 죽음의 그림자가 점점 선명해져 이와 같은 반응을 보인 게 아닐까 싶다. 법률 대리인 리처드(헨리 굿맨)의 도움으로 신속히 혐의를 벗은 닐은 환시를 떨쳐내고자 베리디세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쾌락적인 생활을 재개한다.



하지만 베리디세와 함께 장을 보고 그녀의 집에 방문한 닐은 유혈이 낭자한 돼지 사체가 환시로 나타나자 기겁하고 계단에 굴러 기억을 잃는다. 베리디세 덕분에 닐은 재빠르게 근처 병원에 도착했으나 어떤 연유로 멕시코시티에 있는 대형 병원으로 이송된다. 피부에 생긴 악성 종양이 이미 온몸으로 전이되어 닐이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는 스토리 타임이 비로소 채워지며 관객들은 태양의 표면과 유사한 닐의 피부를 포착한 초반부의 익스트림 클로즈업 숏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태양을 응시하는 시점 숏은 삶의 일몰을 최대한 밀어내려는 닐과 죽음 간의 눈싸움이었을 테다. 게다가, 돼지 사체를 환시로 목격하고 보인 닐의 격앙된 반응은 지금까지 타인의 죽음을 외면하고 본인만을 생각하며 지냈으나 죽음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주한 닐의 내적인 절규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간호 중이었던 베리디세가 잠깐 잠든 사이에 닐은 짐을 챙겨 병원에서 나온다. 종반부 카메라는 아름다운 바다 풍경이 보이는 테라스의 의자를 비춘다. 의자에는 닐의 셔츠만 펄럭일 뿐이다. 끝으로 <썬다운>은 고요한 파도 소리가 들리고 태양 빛이 가득하지만 어떤 생명적인 움직임도 발견할 수 없는 장면을 통해 양립할 수 없는 두 기운이 공존하는 초반부를 환기하는 동시에,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죽음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무기력을 명징하므로 아주 서늘한 작품으로 기억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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