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승문보 Nov 01. 2021

이해와 흔적의 로드 무비, <6번 칸>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플래시 포워드 섹션 상영작


핀란드 출생의 영화감독 유호 쿠오스마넨은 첫 장편 영화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2016)에서 기존 스포츠 영화의 관습에서 벗어난 미학적인 연출, 그리고 성공과 행복 간의 반비례적인 특성에 관한 돋보인 고찰로 제69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5년 후, 유호 쿠오스마넨은 작가 로사 릭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두 번째 장편 <6번 칸>(2021)으로 제74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고, 아스가르 파르하디의 <히어로>(2021)와 함께 심사위원대상을 공동 수상하며 칸영화제를 비롯해 전 세계 영화계가 주목하는 차세대 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6번 칸>은 모스크바에서 학업을 마친 핀란드 유학생 라우라(세이디 할라)가 소원해진 애인을 뒤로하고 고대 암각화 유적지를 방문하기 위해 무르만스크행 대륙 열차의 6번 칸에 탑승하며 펼쳐지는 로드 무비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라우라는 애인 이리나(디나라 드루카로바)와 그녀의 지인들과 함께 인용구를 제시하면 그것의 출처를 맞히는 게임을 한다. 이리나는 ‘우리의 일부분만이 타인의 일부분만을 만지게 한다(Only parts of us will ever touch only parts of others)’라는 마릴린 먼로의 인용구를 출제하고, 라우라는 답을 맞히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그런데 이리나는 라우라의 어설픈 러시아어 발음을 지적하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웃음거리로 만든다. 마릴린 먼로의 인용구처럼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의 영역에 있는 인간의 과제이긴 하나, 낯선 모스크바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이리나한테 이와 같은 일을 겪은 라우라는 배신감, 분노, 부끄러움 등 온갖 감정들을 느낀다. 게다가, 이리나의 변심으로 라우라는 무르만스크행 대륙 열차의 6번 칸에 혼자 탑승한다. 원래 이리나가 앉고 누워야 할 자리에 러시아 청년 광부 료하(유리 보리소프)가 찾아왔고, 라우라는 더럽게 공간을 사용하고 무례한 발언을 일삼는 료하와 불편한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다. 특히 6번 칸 안 두 인물을 담아낸 타이트한 투 숏은 라우라의 심경을 반영한 것처럼 답답하기 그지없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역에 잠깐 정차하자마자 라우라는 열차에서 내려 이리나에게 연락한다. 그렇지만 이리나는 다른 여자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면서 라우라의 안부 인사에 건성건성 대답할 뿐이다. 소원해진 관계를 어떻게든 회복하려는 노력이 무의미해지자 라우라는 본인의 초라한 모습에 울분이 치민다. 마음을 겨우 추스른 라우라는 기차에 탑승해 식당칸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료하를 마주친 라우라는 같은 테이블에 앉기를 거부하고, 두 사람은 좁은 통로 양옆에 있는 테이블에 각각 앉는다. 라우라는 료하와 말을 섞고 싶지 않지만 그의 집요함에 어쩔 수 없이 입을 뗀다. 근데 라우라의 예상 및 편견과 달리 료하는 전형적인 러시아 남성과 거리가 멀다. 료하는 라우라가 불편하지 않도록 거리를 일절 좁히지 않고 아주 기본적인 질문들만 던질 뿐이다. 아울러 료하는 아이 콘택트를 계속 유지하며 라우라를 진정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이와 같은 료하의 모습에 라우라는 조금씩 경계심을 낮춘다. 그리고 ‘정차-하차-승차’가 반복되면서 6번 칸에 마법이 일어난다. 여태껏 숨 막혔던 투 숏에서 개방적인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문(門)이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통로이자 삶의 태도라는 점을 고려하면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하는 6번 칸의 문, 그리고 이전까지 두 인물의 단절 및 거리 두기를 드러냈으나 부싯돌을 부딪쳐 불을 일으키듯이 심적 일부분이 조금씩 맞닿게 하는 숏과 리버스 숏은 두 인물 간에 진지한 관계가 자리 잡을 것임을 암시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핀란드에서 온 남성의 등장을 계기로 발전한다. 복도에서 러시아어가 서툴러 고생하는 동향 남성을 목격한 라우라는 본인도 모를 반가움에 그가 잠깐 6번 칸에 머물 수 있게 허한다. 그 순간 료하는 투덜거리며 불쾌한 감정을 스스럼없이 표현한다. 분명 이건 로맨스의 좌절과 무관하다. 왜냐하면 라우라와 료하는 한동안 미묘한 줄다리기 싸움을 하고 있었기에 로맨스를 위한 여지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료하는 근원적이고 존재론적인 욕망이 좌절된 것에 대해 못마땅한 게 아닐까 싶다. 초반부 료하가 라우라에게 본인을 소개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면, 료하는 비록 러시아인이지만 하층민으로서 사회 제도의 변두리에 머무르는 실질적인 이방인과 다름없다. 그래서 료하는 자기 고독과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이해해줄 라우라를 만난 게 기뻤을 테다. 그렇지만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은 라우라와의 진지한 대화를 나눌 기회를 차단했으므로 료하가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라우라는 아직 료하가 토라진 이유를 모르겠으나 그의 기분을 풀어주고자 보드카를 챙겨온다. 그러나 료하는 여전히 기분을 풀지 않는다.



이에 핀란드 남성은 료하를 비아냥거리는데, 그 순간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 라우라의 모습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라우라는 아직까지도 료하가 급격히 우울해진 원인을 모르지만, 핀란드 남성의 발언 대한 리액션이 없는 평면적인 숏은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동향 남성과 곧바로 거리를 두는 라우라의 진중하고 배려심 있는 면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다시 둘만 남은 6번 칸, 라우라는 핀란드 남성이 자신의 캠코더를 훔쳐 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당황한다. 캠코더는 타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현재를 이해하고자 과거의 흔적을 기록하려는 라우라의 근원적인 욕망을 상징한다. 이와 동시에, 그 캠코더를 잃지 않으려는 강견한 태도도 마찬가지로 라우라에게는 당연한 욕망이다. 하지만 이를 당연히 알 리가 없는 미성숙한 핀란드 남성은 그 캠코더를 훔쳐 6번 칸을 떠났던 것이다. 라우라의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료하는 마치 본인이 당한 일인 마냥 분노하며 그녀를 진심으로 위로한다. 이때 설원 풍경이 6번 칸의 창문을 통해 눈에 들어온다. 희미한 불빛들이 슬픔을 달래주는 료하와 위로를 받는 라우라를 감싸는 동시에, 타임랩스처럼 지나가는 풍경은 고독과 슬픔을 체온으로 달래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이 실현되는 순간을 파노라마처럼 기록하는 듯한 시네마틱한 인상을 남긴다. 감정을 추스른 후, 복도에서 함께 흡연하던 라우라는 료하에게 본인이 레즈비언임을 밝힐 뿐만 아니라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이방인이 아닌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신이 지내던 공동체의 진정한 일부가 되고 싶었다고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 그리고 진솔한 대화로 더 끈끈해지는 두 사람의 순간은 굳건한 투 숏으로 완성된다.



무르만스크역에 도착하기 전날, 두 사람은 도착을 기념하고자 옷을 갈아입고 식당칸에 간다. 첫 만남과 다르게 두 사람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추운 날씨를 이길 따뜻할 음식이 없어도 그 장면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라우라와 료하가 서로의 공허함을 채우고자 발산하는 체온 덕분일 테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라우라는 료하에게 몰래 스케치한 인물화를 선물하고, 료하는 자기도 몰랐던 본인의 모습을 그려주고 알려준 라우라에게 감동을 받는다. 여태까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안아준 적이 없었던 료하는 예기치 못한 선물에 눈물을 글썽이다가 식당칸을 먼저 나선다. 그런 료하의 낯선 모습에 당황한 라우라는 그를 뒤따라가고, 두 사람은 6번 칸에서 키스한다. 두 사람이 친구가 되기 전까지 감정적인 줄다리기 싸움을 했다는 점과 <6번 칸>이 멜로 드라마의 문법을 배제하고 로드 및 버디 무비의 형식을 빌렸다는 점을 상기하면, 해당 키스 장면은 멜로적인 감성에서 접근하면 안 된다. 기실 대륙 열차에 탑승하기 전 라우라와 료하는 상대방에게 본인의 마음을 전달하는 방법을 몰랐던 사람이라는 걸 떠올리면, 두 사람의 키스는 이방인의 삶에서 꿈꿀 수 없었던 온전히 ‘나’를 드러낼 기회를 준 서로에게 건네는 감사의 표현에 가깝다. 다만 두 사람 모두 표현 방식이 서툰 나머지 뜬금없는 키스를 택했고, 갑작스레 어색한 나머지 두 사람은 무르만스크역에서 인사도 없이 헤어진다. 



다시 이방인이 된 라우라는 호텔 직원들의 비웃음과 지역 주민들의 냉대를 겪으며 지루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다가 문득 료하가 보고 싶었던 라우라는 그가 일하는 곳으로 추정되는 광산으로 간다. 그곳에서 라우라는 료하를 도무지 찾을 수 없자 6번 칸에서 그를 스케치했던 메모지를 어느 광부에게 맡기고 돌아와 잠을 청한다. 그리고 기적처럼 료하가 새벽 호텔 로비에 나타난다. 료하는 라우라가 기상 악화 때문에 암각화 유적지를 방문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를 다짜고짜 택시에 태운다. <투 러버스 앤 베어>(2016) 속 로만(데인 드한)과 루시(타티아나 마슬라니)가 서로의 체온에 의존해 거친 눈보라를 뚫었듯이, 라우라와 료한도 이처럼 좋지 않은 날씨에 굴복하지 않고 암각화 유적지를 향해 길을 개척한다. 비록 폭설로 인해 라우라는 보고 싶었던 암각화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절대로 슬퍼하지 않는다. 되레 라우라는 료하와 함께 설원 위에서 어린아이처럼 장난을 치며 발자국을 비롯한 온갖 흔적을 남기고, 그런 두 사람을 프레임 밖에 있는 암각화의 시점 숏에 담아낸다. <퍼스트 카우>(2019)에서 만물의 눈동자들이 거룩한 우주를 형성해 쿠키(존 마가로)와 킹 루(오리온 리)를 보듬고 기억해준 것처럼, <6번 칸>은 만물을 대표할 수 있는 암각화의 시점 숏을 택함으로써 라우라와 료하의 순수한 모습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순수한 의지를 드러낸다. 종반부, 료하는 라우라의 얼굴을 스케치한 쪽지를 자기 주소와 함께 전달하며 작별한다. 행여나 료하와 라우라가 다시 만나지 못할지언정, 공유된 흔적은 각자의 위치에서 동일한 삶의 목적으로 묵묵히 인생을 개척할 거라는 두 사람의 미래를 기대케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죽음을 목전에 둔 한 남자, <썬다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