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오브 도그> (The Power of the Dog, 2021)
여태껏 서부극은 전통성에 묶이며 남성들의 전유물 혹은 남성성을 상징하는 장르로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근 2년간 세계 3대 영화제를 통해 흥미로운 영화 2편이 공개됐다. 하나는 제70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퍼스트 카우>(2019), 또 다른 하나는 제78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제인 캠피온 감독의 <파워 오브 도그>(2021)다. 두 작품 모두 공교롭게도 소설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1820년대 서부 개척 시대의 오리건주를 배경으로 한 <퍼스트 카우>는 조나단 레이몬드의 소설 「The Half Life」를, 1925년 미국 몬태나주를 배경으로 한 <파워 오브 도그>는 토마스 새비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했다. 그렇지만 서부극의 전형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 거장이 택한 방식은 상이하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은 비주류 사회로 밀려난 유대인 요리사 쿠키(존 마가로)와 중국인 이민자 킹 루(오리온 리)의 실패담에서 피어나는 우정을 통해 대안적인 서부극을 완성했다. 이와 달리, 제인 캠피온은 외형적으로는 거대한 목장을 운영하며 카우보이들의 리더로 칭송을 받는 필(베네딕트 컴버배치)이 동생 조지(제시 플레먼스)와 결혼한 과부 로즈(커스틴 던스트)를 조금씩 옭아매는 심리극을 그려냈지만, 서사의 무게 중심을 필에서 피터(코디 스밋 맥피)로 은밀하게 이동시키고 섹슈얼리티를 매개로 남성성을 해체함으로써 서부극의 관습적인 틀을 벗겨냈다.
<파워 오브 도그>의 주인공 중 한 명인 필은 동생과 함께 거대한 목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몬태나주 카우보이들 사이에서 마초니즘의 대명사로 추앙을 받는다. 그러나 필의 사소하지만 마초적인 남성과 거리가 먼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다면 그의 진짜 정체성이 점차 드러난다. 특히 필의 스승이자 정신적인 지주 브롱코 헨리와 유관한 동시에, 필이 혐오의 시대에서 본인을 보호하기 위해 모순적인 혐오적인 언행을 일삼는 이유와 맞물려 있다. 먼저 필과 브롱코 헨리와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개업 25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필이 “우리 로물루스, 레무스 형제와 우릴 길러준 늑대를 위하여”라는 기념사를 할 정도로 브롱코 헨리는 필과 조지 형제에게 낯선 목장일을 도와주고 성공까지 거두는 데 굉장한 가르침을 준 스승이다. 또한, 브롱코 헨리는 필에게 말을 타는 법, 가죽으로 밧줄을 땋는 법 등을 전수했다. 레드 밀 식당에서 동료들에게 브롱코 헨리가 폐마에 올라타 테이블을 뛰어넘었던 에피소드마저 들려주는 필의 장면은 브롱코 헨리가 그에게 얼마나 대단한 우상이었는지 공공연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추운 겨울날 엘크를 사냥하러 갔다가 한 침낭에서 맨몸으로 체온을 나눈 일화, 필의 아지트에서 발견된 매거진들 등을 상기하면, 필과 브롱코 헨리와의 관계는 일반적인 사제 간으로만 한정할 수 없다. 무엇보다 강가에서 스카프로 브롱코 헨리를 떠올리며 성행위를 하는 장면에서 필의 정체성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필은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자마자 마초적인 남성 사회에서의 생존을 걱정해야만 했다. 이에 삶은 불행을 견디는 것이라고 믿는 필은 동성애를 혐오하는 시대에서 살아남고자 여러 사회적인 약자를 무차별로 혐오하는 아이러니를 저지른다. 필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당시 여성, 인디언, 유대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 관한 차별적인 언행을 스스럼없이 일삼음으로써 의도적으로 마초적인 우월성을 보이고자 했다. 동생 조지와 결혼하는 과부 로즈를 정신적으로 학대하는 장면, 그리고 절대로 인디언에게 여분의 가죽을 팔지 않는 장면과 맥락관통한다. 여기에, 필은 카우보이 동료들 앞에서 자기 육체를 공개하지 않되 주기적인 진흙 목욕을 통해 본인에게서 짐승의 체취가 풍기게 만들 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든 정체성이 들통나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기 위해 단 한 번도 취할 만큼 술을 마시지 않는다. 이처럼 혐오의 세상에서 혐오자가 되어야 하는 아이러니를 겪는 필이 현재 유일하게 의존하는 사람이 바로 동생 조지다.
겉으로 보기에는 필이 조지를 다소 거칠게 대하지만, 같은 방에서 취침하거나 침대 하나를 함께 쓸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괜찮다. 그런데 필이 로즈와 그녀의 아들 피터에게 상처를 입힌 것에 대한 책임을 지기로 결심한 조지가 점점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아무 언질도 없이 결혼까지 하게 되자, 브롱코 헨리가 세상을 떠난 후 전적으로 동생에게 의지했던 필은 심적인 균열을 재경험한다. 더군다나 로즈와 한 지붕 아래 같이 살게 되면서 공간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조지와 단절된 필은 그녀를 쫓아내기 위해 정신적인 학대를 가하기 시작한다. 예시로 필은 로즈가 피아노 연주를 연습할 때 바로 위층에서 스토킹하듯이 기타로 연주를 따라 하거나, 종종 로즈의 시야 밖에 숨어 휘파람을 불며 그녀에게 막대한 스트레스를 가한다. 그 결과 로즈는 술에 탐닉하는 알코올 중독자가 된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피터는 어머니 로즈의 부탁으로 잠깐 새집에서 지낸다. 그렇지만 며칠 만에 어머니의 악화된 상태를 눈치챈 피터는 오프닝에서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아빠가 돌아가신 후 난 엄마가 행복하기만 바랐다. 엄마를 돕지 않으면 난 사내도 아니지. 엄마를 구할 수밖에’라고 독백했듯이 어머니를 필에게서 지켜내기로 결심한다. 겉으로 피터는 ‘낸시 양’이라고 캣콜링을 당하는 연약한 청년처럼 보이지만, 기실 필과 정반대로 장애물을 없애 가는 게 삶이라고 정의할 만큼 강인하다. 누구보다 닭을 능숙하게 도축할뿐더러 어머니의 부탁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토끼를 해부하는 장면, 아버지로부터 자기가 아주 쌀쌀맞다는 말을 들었다고 필에게 고백하는 장면, 그리고 필이 지켜보는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토끼의 목을 꺾어 살생하는 장면에서 피터가 공기를 사늘하게 바꿀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결정적으로 카우보이들의 계속되는 성적 희롱에도 흔들리지 않고 되레 결의에 찬 표정으로 왕복 운동을 하는 피터를 포착한 수평 트래킹 숏에서 그가 어떤 인물인지 명확하게 알 수밖에 없다. 발톱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피터는 장작 사이의 틈에 숨어 탈출할 타이밍을 기다리는 토끼처럼 어머니 로즈의 삶의 장애물인 필을 제거할 최적의 기회를 맞이하려고 대기 중이다.
한편 피터의 의외의 면모에 놀란 필은 그에게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며 승마하는 방법과 밧줄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제안한다. 물론 로즈에게서 피터를 떼어냄으로써 그녀가 지금보다 술에 더 집착하게 만들고, 동생과의 이혼을 유도해 그녀를 집에서 쫓아내려는 필의 속셈이 없진 않다. 피터가 필의 화해와 제안에 반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필을 제거하기 위한 복수의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릴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들떴을 뿐이다. 이와 함께, 피터의 시점에서 필의 오른손을 클로즈업으로 포착한 숏은 피터가 필의 상처투성이인 오른손과 밧줄에서 복수의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점을 공공연히 이야기한다.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필과 피터의 관계는 진전된다. 무엇보다 피터가 브롱코 헨리처럼 먼 산에서 입을 벌리는 개의 형상을 봤다는 걸 알게 된 필은 본인이 ‘과거의 브롱코 헨리’ 위치로 이동하고 피터가 ‘과거의 필’ 위치에 선다면, 본인이 그토록 그리워하고 있는 소중하고 행복했던 관계를 복원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다. 하지만 피터는 이와 같은 동상이몽을 역이용해 필을 벌하는 유리한 고지를 침착하게 엿본다. 그런데 피터가 필에게 점점 동화되는 것처럼 보였던 로즈는 심적으로 더욱더 불안해지자 필이 발광하면 조지와의 관계가 틀어질 수 있다는 위험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필이 피터에게 줄 밧줄을 완성하지 못하도록 소가죽을 인디언들에게 넘겨버린다. 로즈가 소가죽을 인디언에게 넘겼다는 사실을 늦게 안 필은 당연히 분개하지만, 어머니의 충동적인 행동 덕분에 복수를 실행할 완벽한 기회가 우연히 열리자 피터는 필에게 본인이 갖고 있는 생가죽을 주겠다고 말하며 그의 마음을 완전히 연다. 기실 피터가 필에게 주겠다는 생가죽은 며칠 전 의료용 장갑을 끼고 매스로 해부한 소 사체에서 얻은 것으로, 오른손이 상처투성이임에도 항상 장갑을 끼지 않는 필에게 치명적인 탄저균이 득실거린다. 피터의 복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도 모르는 필은 오늘 밧줄을 완성하겠으니 함께 밤샘 작업을 하자는 반면, 피터는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시편 22:20)라는 구절을 실천하고자 필의 말에 순순히 따른다.
분명 밧줄은 브롱코 헨리 그 자체이자 그와의 애틋한 관계를 상징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필은 피터에게 밧줄을 선물하며 자기 성 정체성을 고백하고 인생에서 가장 잊지 못할 관계를 재현하려고 접근했을 테다. 그날 밤 밧줄을 엮으면서 중간중간 피터를 쳐다보는 필의 시점 숏은 그를 향한 마음이 고조되고 있음을, 그리고 브롱코 헨리와의 관계를 복구할 수 있다는 희망이 절정에 다다랐음을 명시한다. 그렇지만 탄저균이 득실거리는 가죽과 상처투성이인 오른손으로 만지는 밧줄을 응시하는 피터의 클로즈업 된 시점 숏은 이전 숏과 충돌 몽타주를 형성하며 피터가 필에게 마음이 전혀 없음을 확언한다. 결국 필은 탄저균에 감염되었고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라는 구절처럼 오히려 자기가 집에서 쫓겨난다. 끝으로 필이 병원에 가기 전에 밧줄을 전달하고자 피터를 애타게 찾지만, 필의 시야에 포착되지 않으려고 방구석을 절묘하게 돌아다니는 피터를 담아낸 트래킹 숏은 밧줄을 둘러싼 두 사람의 동상이몽을 다시 한번 선명하게 그려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