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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문보 Feb 28. 2022

무난하고 안정적이어서 아쉬운 연출 데뷔작

제시 아이젠버그 감독의 <웬 유 피니시 세이빙 더 월드>(2022)


국내외 가리지 않고 젊은 배우들의 영화감독 데뷔는 더는 특별하고 놀라운 소식이 아니다. 허나 지난 1월 30일 막을 내린 제39회 선댄스영화제 프리미어 섹션에 ‘미워할 수 없는 너드의 아이콘’ 제시 아이젠버그의 첫 장편 연출작 <웬 유 피니시 세이빙 더 월드>(2022)가 초청된 소식은 화제를 모았다. 물론 A24와 <라라랜드>(2016),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8)를 비롯해 화려한 필모그래피를 자랑하는 엠마 스톤의 제작 참여, 그리고 줄리안 무어와 핀 울프하드의 캐스팅이라는 외적 이슈가 한몫했을 테다. 그렇지만 제시 아이젠버그는 <소셜 네트워크>(2010), <라우더 댄 밤즈>(2015), <비바리움>(2019) 등 다채로운 작품에 출연해 연기에 한계가 없음을 증명해 왔을뿐더러, <아메리칸 울트라>(2015), <호신술의 모든 것>(2019) 등을 통해 특유의 재치와 입담을 선보였던 터라 이와 같은 강점을 <웬 유 피니시 세이빙 더 월드>에서 연출적으로 승화할 거라는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웬 유 피니시 세이빙 더 월드>는 2020년 제시 아이젠버그 본인이 발표한 동명의 오디오 드라마에서 기본적인 틀만 빌려 제작한 영화로, 서로의 세계와 가치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혹은 이해하지 않으려는 엄마 에블린(줄리안 무어)과 고등학생 아들 지기(핀 울프하드) 사이의 관계를 그려낸 드라마다. 가족 내 발생한 균열을 다룬다는 측면에서 <웬 유 피니시 세이빙 더 월드>는 ‘첫 장편 연출’과 ‘선댄스영화제 공식 초청’이라는 키워드를 공유하는 폴 다노의 <와일드라이프>(2018)를 소환하는데, 이는 공교롭게도 <웬 유 피니시 세이빙 더 월드>가 무난한 연출 데뷔작이지만 생각보다 차별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게 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와일드라이프>에서 폴 다노는 시대적 맥락을 인물의 관계성과 상황에 침투시켰으며, 지독하게 익스트림 롱 숏과 트래킹 숏을 활용하고 최대한 시점 숏을 지양하는 연출을 통해 가족과 삶의 의미를 가볍게 그려내는 작업을 피하고자 했다. 반면 감정적 표현에 도달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한 제시 아이젠버그는 대구법을 반영한 연출 및 편집의 비중을 높이며 연출적 설득보다 안정성을 추구했고, 그 결과 감동적이지만 상대적으로 특색이 부족한 드라마를 완성하는 데 그쳤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제시 아이젠버그는 에블린의 현실과 지기의 현실이 얼마나 불화한지, 그리고 두 사람의 현실 사이에 멸시가 뿌리 깊게 박혔음을 이야기하는 데 집중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방에서 공연 중인 지기가 등장한다. 지기는 작업한 포크 록 음악을 방에서 라이브 스트리밍하며 나름 팬덤을 갖고 있는 고등학생으로, 지기의 세계는 그의 시야에 보이는 팔로워들의 화면 및 채팅 창의 콜라주와 중간중간 교차 편집되는 본인의 공연 모습으로 그려진다. 지기의 세계는 또래 집단 혹은 또래 집단이 활발히 활동하는 SNS 공간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만 지기의 라이브 스트리밍은 채널 멤버십 가입자가 아니면 구경할 수 없다는 점을 환기하며 보다 더 깊게 밀고 들어가면, 그의 세계는 타인의 관심을 바라지만 간섭을 원치 않는 이중적인 폐쇄성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파악 가능하다. 이어서, 가정 폭력 피해자와 자녀를 위한 기관을 운영 중인 엄마 에블린의 세계가 펼쳐진다. 에블린은 본인이 머무르고 있거나 관여하고 있는 공간이 항상 조용하길 바라며, 아들과 달리 오로지 클래식 음악만 감상한다는 점에서 자기 공간에 교양이 깃들기를 희망한다. 특히 직원들이 살짝 시끄럽게 생일 파티를 하자 조용히 하라고 무안을 주는 장면에서 딥 포커스 기법을 활용하진 않았으나, 통로 끝에서 걸어오는 에블린을 고정된 카메라로 촬영한 방식은 종(縱)적인 입체감을 형성하며 그녀의 세계가 타인이 접근하기 힘들 만큼 아주 독립적이라는 점을 전한다. 하지만 업무 중임에도 종종 문이 열려있는 에블린의 사무실은 그녀의 세계가 아들의 것과 역방향의 이중적 폐쇄성을 띠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처럼 에블린과 지기는 오묘하게 닮아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현실을 절대로 존중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웬 유 세이빙 더 월드>에는 가족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식사 장면이 없다는 특징은 에블린과 지기는 얼굴을 마주하고 소통할 생각이 일절 없음을 명백히 드러낸다. 작중 단 한 번만 나오는 에블린, 지기,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존재감 없이 생활 중인 가장 로저(제이 O. 샌더스)가 한자리에 모여 식사하는 장면을 파헤치면, 부엌 주변에는 있지만 막상 테이블 위에 없는 빛은 상대방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생각이 없는 에블린과 지기의 심경을 의미한다. 결정적으로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눠도 에블린과 지기 간에 숏-리버스 숏이 이뤄지지 않는다.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두 사람 중 누가 먼저 발화해도 이에 리액션을 하는 사람은 로저일 뿐이다.



다음날 남편에게서 폭행을 당한 여성 엔지(엘레오노르 헨드릭스)와 엄마를 지키고자 가정폭력을 신고한 아들 카일(빌리 브릭)이 에블린의 시설에 입소한다. 무뚝뚝히 상담하던 에블린의 시점 숏에는 서로를 위하는 엔지와 카일의 유대가 포착되고, 그것에 대한 반응 숏에는 그토록 신경 쓰지 않았던 관계적 결핍이 맴돈다. 이에 에블린이 택할 수 있는 방안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지기와 화목했던 과거를 복원하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지기의 자리를 카일로 대체해 그리운 과거를 재현하는 것이다. 지기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생각하는 에블린은 후자를 선택하고, 카일에게 일부러 말을 걸어 본인의 세계에 유인하려고 애쓴다. 한편 같은 날 지기는 짝사랑하는 동급생 릴라(엘리사 보)에게 호감을 얻어 자기 세계에 초대하기로 결심한다. 엄마와 다소 다른 방식이긴 하나, 지기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릴라가 활동 중인 정치 단체를 직접 방문할뿐더러 그녀의 말에 공감하는 척한다. 그런데 서사 진행, 연출, 편집을 비롯한 여러 면에서 대구법에 의존하던 제시 아이젠버그는 해당 지점부터 짙은 아쉬움을 남긴다. 물론 카일에게 다가가는 에블린에겐 종적인 동선을, 릴라에게 접근하는 지기에겐 횡적인 동선을 부여하며 다른 성질의 운동성을 만들려고 했지만, 이마저도 어떤 의미도 만들지 못한 채 쉽게 증발해버린다. 이후 일방적인 의지와 욕심 때문에 카일과 릴라에게 부담과 상처를 준 에블린과 지기 모두 매몰차게 차이고, 자신의 세계가 우월하다고 주장하려 했던 두 사람의 신경전은 이렇게 종결된다. 후반부로 진입한 <웬 유 피니시 세이빙 더 월드>는 화해의 가능성을 연 에블린과 지기의 순간을 그려낸다. 사무실에서 모니터를 응시하던 에블린은 아들이 업로드한 음악 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하고, 이에 반응하듯 지기는 창밖을 바라보다 무단 조퇴해 엄마가 있는 사무실로 향한다. 이어서 에블린은 영상을 통해 그동안 놓쳤던 지기의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사무실에 도착한 지기는 액자 속 사진들을 살피며 지금까지 몰랐던 엄마의 인생을 하나둘씩 알게 된다. 교차 편집은 그 순간에서 감동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이 감동은 겉돌기만 한다. 왜냐하면 대구적인 연출과 교차 편집만으로는 어떤 미장센을 만들어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에블린과 지기가 여태껏 무시하던 서로의 세계에 발을 내딛기로 한 이유가 서사 내에서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분명 줄리안 무어와 핀 울프하드의 호연이 서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버텨줬기에 제시 아이젠버그의 지나치게 단조롭고 안정적인 연출력이 무척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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