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승문보 Mar 31. 2022

구렁에 선 남자의 선택과 결과,
<하모니움>(2016)

후카다 코지 감독의 <하모니움> (淵に立つ, 2016)


일상의 공포는 타자(他者)의 등장으로 인한 균열의 발생과 유관하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킬링 디어>(2017)를 상기해보면, 심장전문의 스티븐(콜린 파렐)의 가족은 여타의 가정처럼 평화롭게 지냈으나 수년 전 의료 사고로 죽은 환자의 아들 마틴(베리 키오간)이 갑자기 등장한 후 민낯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마틴의 신화적이고 예언적인 테스트는 스티븐이 감추려고 했던 죄악을 수면 위에 끄집어 올려 가족 간 불화를 야기했으며, 더 나아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스티븐이 희생양을 고르기 위해 진행한 러시안룰렛은 불안이 스며든 나약함과 추악함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후카다 코지 감독에게 제69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주목할 만한 시선 섹션)의 영예를 안긴 <하모니움>(2016)은 <킬링 디어>와 같이 종교적인 색채를 드러내면서도 스승인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처럼 특별한 연출적 기교 없이, 일상에서 비일상으로의 전환과 인간 본연의 불안과 공포에 접근한다. 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모니움>은 ‘구렁에 서다(淵に立つ)’라는 원제의 의미에서 눈치챌 수 있듯 타인의 죗값을 대신 짊어져야 하는 자들의 비극을 그린 영화로, 영원히 잊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존재 야사카(아사노 타다노부)의 방문을 경유해 파멸에 도달하게 만드는 불안을 탐구한다. 이와 더불어, 영화 제목이기도 한 ‘하모니움(a.k.a. 하모늄)’은 연주자가 페달을 조작해 생긴 바람을 구멍 안에서 진동하는 리드에 전달해 소리를 내는 메커니즘을 이용한 오르간의 일종으로, ‘페달을 조작하는 연주자 – 속내를 파악하기 힘든 존재 야사카’, ‘리드에 바람을 전달하는 장치 – 본인의 죄악을 숨긴 채 살아가는 토시오(후루타치 칸지)’, 그리고 ‘하모니움에서 흘러나오는 사운드 – 후미에(츠츠이 마리코), 호타루(시노카와 모모네), 타카시(나가노 타이가)가 고통을 겪으며 내는 정서적 외침’으로 치환했을 때 후카다 코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모니움>은 아침을 먹으라는 엄마 후미에의 부름에 하모니움만 정리하고 부엌으로 향하는 호타루의 모습과 함께 시작한다. 여전히 작동 중인 메트로놈은 멜로디로 가득했던 스크린을 단번에 진공 상태로 바꾸며 낯선 공기를 불러일으킨다. 곧바로 이어지는 식사 장면은 그 낯선 공기를 더욱더 짙게 만든다. 스크린 한가운데에 위치한 카메라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무심히 신문을 읽으며 먼저 숟가락을 드는 토시오가 있고, 우측의 후면에 있는 후미에와 전면에 앉아 있는 호타루는 주기도문을 외운다. 해당 장면을 그저 토시오 일가의 가족적 특성을 간단명료하게 보여준다고만 받아들이기에는 기이하다. 왜냐하면 토시오는 부재한 옆자리에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가만히 있기 때문이다. 후미에와 호타루가 등굣길에 나선 후, 철공소에서 일하던 토시오가 바깥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수감생활을 마치고 사회로 복귀한 오랜 친구 야사카가 멀뚱히 서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는데, 순간의 정적은 방금 전 장면에서 목격했던 부재한 옆자리의 주인이 야사카임을 일깨워준다. 더 나아가, 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의 옷차림과 한동안 토시오에게 존댓말을 쓰는 모습은 공기를 서늘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시선 불일치는 편집의 연속성을 무너뜨림으로써 지금 일어나고 있는 만남이 평범하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무언가 책잡힌 듯한 토시오는 후미에에게 자세한 설명도 없이 야사카를 집에 들이고, 심지어 본인이 운영하는 철공소에 취직시킨다. 이에 사무실에서 후미에는 불만을 토로하지만, 토시오는 현 상황을 그냥 넘어갈 뿐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숏-리버스 숏’이 아니라 설정 숏으로만 밀고 가는 후카다 코지의 연출은 토시오의 감정을 읽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가 후미에를 어딘가로 밀어내는 듯한 인상을 느끼게 한다.



야사카와의 동거를 탐탁지 않았던 후미에는 호타루의 하모니움 연주 연습을 도와줄뿐더러 항상 나서서 가사를 돌보는 다정한 모습에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관심을 끌기 위해 야사카가 후미에의 생활 반경 안으로 발을 내딛는 선제적 행동, 후미에가 자기 방으로 들어오도록 한밤중 불을 끄지 않고 취침하는 유도적 행동을 비롯한 여러 장면들이 이건 후미에의 주체적인 변화가 아니라는 걸 넌지시 이야기한다. 어느 날 길에서 야사카와 마주친 후미에는 토시오와의 관계를 묻자, 야사카는 ‘친구 관계’가 아니라 ‘지긋한 관계’라고 답한다. 야사카의 답변이 아리송하긴 하나 개신교라는 공통점을 발견한 후미에는 이를 금세 잊고 다음 주말 예배에 데려가겠다고 말한다. 약속일이 다가왔고 예배 후 두 사람은 카페에서 대화를 나눈다. 그곳에서 자신은 독선적인 남자였다고 입을 연 야사카는 “첫째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 목숨이나 법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 둘째는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을 거라 믿은 것. 셋째는 내가 절대 옳다고 철저히 믿은 것. 마지막은 저의 잘못된 가치관을 근거로 사람을 해친 것입니다”라고 고해 성사한다. 이를 통해 야사카가 살인죄로 오랜 기간 복역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는 하나 부차적인 정보에 불과하다. 이 장면에서의 핵심은 그의 고해 성사의 행간에 배어 있는 ‘약속’, ‘배신’, 그리고 ‘후회’다. 분명 이걸 들어야 하는 사람은 토시오이지만, 어째서 후미에가 먼저 듣는가? 이와 더불어, 롱 숏으로 카페 실내 공간을 보여줌으로써 낮 시간대임을 명확히 했으나, 후카다 코지 감독은 무슨 이유로 야사카의 고백에 감정적 반응을 하는 후미에를 칠흑 같은 어둠에 밀어붙였는가? 두 가지 의문점은 곧이어 후술할 물놀이 여행 장면에서 굉장한 파문을 몰고 온다.



이젠 야사카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후미에는 간만에 떠나는 물놀이 여행에 그를 데려간다. 한편 야사카가 후미에에게 과거의 죄악을 고백한 사실을 안 토시오는 둘이서 낚시할 때 굳이 말할 필요가 있었냐고 묻는다. 이에 야사카는 마치 심판을 하러 온 자처럼 목소리 톤을 바꿔 “진짜 후진 놈일세. 그렇게 두려워? 절대 얘기 안 해. 너도 있었다고 말한 적 없어”라고 압박한다. 나중에 농담이라고 했으나 야사카는 “왜 내가 아니고 네가 이 집에 사냐고”라는 말을 덧붙이며 과거에 자기를 배반한 토시오에게 희생양을 바치라고 우회적으로 요구까지 한다. 가족의 안전을 지키는 것보다 본인의 과오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는 게 우선인 토시오는 낮잠 시간에 숲으로 산책을 떠나는 야사카와 후미에를 보고도 못 본 체한다. 숲에서 키스하는 두 사람, 부끄러워하는 후미에의 리액션 숏은 이 키스가 로맨스에서 기인했음을 보여주는 반면, 야사카의 모호한 얼굴(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소거된 리액션 숏)은 지금 나눈 키스는 로맨스와 전혀 관련성이 없음을 명백히 한다. 며칠 후 후미에를 집어삼키기로 결심한 야사카는 그녀와의 육체적 관계를 시도하지만 거절당한다. 여태껏 눌러왔던 분노가 폭발한 야사카는 토시오와 암묵적으로 합의한 희생양이 아닌 어린 호타루를 건드렸고, 아무도 없는 거리와 피로 물든 놀이터는 걷잡을 수 없는 폭풍이 지나갔음을 싸늘하게 묘파한다.



8년이 지난 시점에서 <하모니움>의 2부가 시작된다. 호타루는 뇌성마비 환자가 되었고, 그런 딸을 병간호하며 불결한 자기자신을 견디지 못하는 후미에는 극심한 결벽증에 시달린다. 두 사람과 달리 죄의 구렁텅이에서 완벽히 탈출했다고 생각하는 토시오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며 타카시라는 청년을 새 견습생으로 받아들인다. 타카시는 야사카의 아들로, 그가 남긴 편지를 읽고 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고자 토시오가 운영하는 철공소에 지원했던 것이다. 당연히 타카시는 야사카가 8년 전에 무슨 일을 저지르고 사라졌는지 모르며, 토시오와 후미에 또한 타카시가 야사카의 아들이라는 걸 미지한다. 기실 이건 야사카가 계획한 일이며, 타카시가 8년 전 호타루가 앉았던 자리에서 식사하는 장면이 이를 입증한다. 즉, 세 사람은 야사카 만든 체스판 위의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타카시가 야사카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더 나아가 야사카가 과거에 저지른 살인 사건의 공범이 바로 토시오라는 걸 뒤늦게 안 후미에는 사라진 야사카를 찾아내 그의 눈앞에서 타카시를 죽이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아버지의 원죄에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낀 타카시는 후미에가 탑승한 차량에 올라 그녀의 충격적인 결심에 순응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렇지만 흥신소가 건넨 사진 속 인물은 야사카가 아니었고 후미에의 복수는 무산이 되었다. 극진히 딸을 간호하는 것과 동해보복(同害報復)만으로 죄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없다고 느낀 후미에는 영원히 절망을 잊고자 투신자살을 시도한다. 비로소 본인의 죄의 무게를 자각한 토시오는 후미에와 호타루를 구하기 위해 강으로 뛰어든다. 온몸을 물에 적시는 토시오의 모습은 마치 그 몸이 죄에 죽고 의(義)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침례 의식을 연상시킨다. 그렇지만 후카다 코지 감독은 영화의 결말을 명확하게 서술하지 않는다. 이 불명확함은 관객들에게 두 가지 결말을 제시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해석은 관객의 몫이긴 하나, 후카다 코지 감독이 열린 결말을 통해 본인뿐만 아니라 타인을 파멸로 이끄는 죄악의 전가를 경고하려고 했을 테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난하고 안정적이어서 아쉬운 연출 데뷔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