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승문보 Jul 31. 2022

내 육체와 욕망을 지키기 위한 선택, <젠틀>

라즐로 추야 & 안나 네메스 감독의 <젠틀> (Szelíd, 2022)


한가람 감독의 <아워 바디>(2018) 속 자영(최희서)은 모든 관계에 경쟁의 논리가 주입된 사회에서 번번이 시험에 떨어지며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도태되고 있는 8년 차 행정고시생으로, 성취적 욕망을 일깨운 현주(안지혜)를 삶의 모델로 삼아 달리기로 몸을 단련하기 시작한다. 로런 해더웨이 감독의 <더 노비스>(2021)에서 알렉스(이사벨 퍼만)는 늘 최고를 갈망하는 대학 신입생으로, 장학금 수혜자이긴 하나 동급생으로부터 느끼는 경쟁심 때문에 자기 몸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며 강박감이 빚은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다. 이처럼 육체에 막대한 관심을 두거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단련을 다루는 영화가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방향성 및 의도가 각기 다름에도 이와 같은 작품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은 절대로 ‘보기 좋은’ 혹은 ‘아무 탈 없이 튼튼한’ 육체를 칭송하는 게 아니라, 육체 자체가 결과 지향적 삶에 갇힌 자에게 탈출할 기회이자 물음을 던진다는 것이다. 제38회 선댄스영화제와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공식 초청작 <젠틀>(2022) 또한 이런 경향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라즐로 추야와 안나 네메스 감독이 공동 연출한 <젠틀>은 세계 보디빌더 대회의 출전권을 따낸 중년 여성 보디빌더 에디나(에스테르 촌커)가 트레이너이자 연인인 아담(죄르지 투로시)과 함께할 수 있는 미래를 위해 우승을 목표로 훈련하다가, 경제적 문제와 갑작스러운 건강 문제 때문에 역경에 처하고 이상과 현실의 간극까지 마주하면서 겪는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다. 안나 네메스 감독이 제작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Beauty of the Beast>에도 출연하는 에스테르 촌커는 실제로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네 차례 따냈던 전문 보디빌더로, 본인이 분한 ‘에디나’라는 캐릭터처럼 건강상 문제로 현역 은퇴했다는 점에서 <젠틀>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경쟁에 잠식되어 가는 삶이 절대로 허구가 아닌 실재라는 점을 입증한다. 오프닝이 시작되기 전에 나오는 텍스트 컷은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는 보디빌더들이 과도한 근육을 축적시키고자 끊임없는 단련과 식단관리를 통해 평균적으로 약 74%의 지방량을 줄여 극심한 탈수 상태에 빠지고, 더 나아가 심사기준에 부합하고 경쟁에 앞서기 위해 신체적 윤곽을 잡고자 영양제와 약물 모두 사용한다고 한다. 즉, 보디빌더들은 세계적인 대회에서 최상의 결과를 내기 위해 자기 몸을 조각한다. 에스테르 촌커의 사생활이 작중의 삶과 얼마나 동일한지 알 수 없다만, 그녀 또한 에디나처럼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며 은퇴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젠틀>은 상기에서 언급한 두 작품과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혹은 <젠틀>은 두 작품보다 신자유주의적 가치에 압제되는 개인의 삶을 더욱 냉철하게 논하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에디나에게 육체는 단순히 스포츠 선수처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녀의 육체는 자긍심과 자아 존중감을 느낄 수 있는 거울과 다름없다. 전국 대회를 우승으로 마무리한 다음, 백스테이지에서 자의든 타의든 몇 가지 포즈를 잡는 에디나의 모습을 포착하는 클로즈업이 내면의 자아가 자기 몸에 집중하는 듯한 몽환적이고 환시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이를 명확하게 증명한다. 세계 보디빌더 대회에서 상위권 그 이상의 성적을 넘보려면 당연히 육체적 단련의 강도를 높여야 하고, 현재보다 더 효과적인 영양제와 약물이 필요한 에디나에겐 광고를 비롯한 각종 프로모션 출연과 안정적인 스폰서십이 필수불가결하다. 물론 아담은 전국 대회에서 우승한 에디나에게 충분한 상업적 매력과 가치가 있다고 믿기에 모든 게 당연히 순차적으로 진행될 거라고 안심한다. 그러나 현실은 완전히 정반대다. 에디나의 육체는 기업가 및 투자사가 생각하기에 적당히 건강해 보이고 다이어트 욕구를 자극할 수 있는 이상적 모델과 완벽히 거리가 멀다. 결국 경제적 곤경에 처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아담은 자기만 믿고 훈련에 매진하라고 호언장담한다. 허나 세계 보디빌더 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승을 한 과거의 영광에 여전히 빠져 있는 아담은 자존심을 굽히지 못해 어떤 곳에도 취직하지 못한 채 낙담만 하고 산다. 어쩔 수 없이 돈을 벌기 위해 에디나는 ‘퍼스널 서비스’, 솔직하게 말하자면 유사 성매매 일을 시작한다. 오로지 자기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었던 환경에서 돈이면 뭐든 해결되는 음지로 떨어진 에디나는 형언할 수 없는 충격에 빠진다. 누군가의 추악한 욕망에 몸이 더럽혀진 에디나는 돈이 얽힌 관계가 얼마나 극악무도한지 직면하는 동시에, 자아 존중감과 정체성을 느낄 수 있는 세계의 파괴에 의욕을 잃어간다. 무엇보다 일련의 에피소드를 계기로 아담의 이면을 점차 안 에디나는 자기 몸이 아담의 과거의 영광을 복원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심적으로 방황한다. 이와 같은 심리적 붕괴를 단계적으로 보여주고자 <젠틀>은 쿨레쇼프 효과를 일으키는 정서적 편집을 활용한다. 분명 이전까지 피트니스 센터에서 단련하는 에디나의 모습에는 자부심이 느껴졌으나, 음지에 빠지 에디나의 숏들이 점점 병치되자 이후 피트니스 센터에서의 운동하는 모습에는 대단한 우울감과 절망적인 상흔만 남을 뿐이다. 경제적인 문제가 야기한 변화가 개인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치는지 명백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에디나는 몇 차례 숲속에서 숨바꼭질하자는 고객 크리스티안(차바 크리스티크)을 만났고, 기존 고객들과 다른 언행을 하는 그에게 묘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크리스티안에게 조금씩 호감을 느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에디나는 피트니스 센터에서 단련 중에 의식을 잃는다. 의식 회복한 에디나는 안절부절못하는 아담에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말하지만, 기실 그녀는 심장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겨 당장 보디빌딩을 그만두지 않으면 손쓸 겨를도 없이 죽을 거라는 소견을 받았다. 그럼에도 에디나가 이 사실을 숨기는 이유는 자신을 향한 아담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점에 실망했기 때문이다. 대회가 코앞에 다가왔음에도 심란해 훈련에 집중하지 못하는 에디나는 거의 매일 밤 크리스티안이 부른 장소로 향한다. 더는 숲이 아닌 고급 호텔에서 만나는 두 사람은 아이 같은 장난을 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이전 만남의 장소인 숲이 주는 몽환적인 시간, 그리고 새로운 만남의 장소인 호텔이 주는 고급스러운 공간은 에디나의 지친 심신을 달랠뿐더러, 더 나아가 조금만 더 있으면 손에 집어넣을 수 있는 판타지적 시공간이 된다. 꿈만 같은 선물을 준 크리스티안에게 고마운 마음을 직접 전해주고, 그가 보여주지 않았던 사적 영역에 발을 내딛고 싶은 에디나는 그의 집에 방문한다. 그렇지만 소망과 다르게 에디나가 발을 디디려고 했던 크리스티안의 사적 영역에는 다른 사람들이, 즉 크리스티안에게는 아내와 자식이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곤란한 상황에 처한 크리스티안은 여타 가부장적 혹은 권위적 남성과 동일한 화법으로 에디나를 쫓아내는데, 이는 에디나에게 인간보다 자본이 우선인 세상에서 신데렐라 같은 판타지를 일절 꿈꾸지 말라고 비아냥거리는 것과 다름없다. 특히 쫓겨난 후 길 건너편에서 크리스티안의 집을 쳐다보는 에디나의 모습을 롱 숏, 하이 앵글 숏 등 다양한 숏으로 보여주는 연출 방식은 그녀의 심경에 입체적으로 접근해 물질적 박탈감으로 인한 상처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든다.



암울한 현실로 복귀한 에디나는 무기력하게 아담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에디나는 아담에게 현재 상황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이에 아담은 에디나에게 건강이 먼저라며 세계 보디빌더 대회에 출전하지 말고 휴식을 취하자고 말한다. 그 중요한 순간에 서로의 시선이 엇갈리기도 하지만, 완전히 그만두자는 게 아닌 휴식을 취하자는 아담의 위로는 에디나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있음을 명징하게 그려낸다. 건강을 고려하면 반드시 대회 출전을 포기해야 한다만 에디나는 예전과 달리 아담의 속내를 너무 잘 알 뿐만 아니라, 그만둔다고 해도 자기 의사가 먼저 반영되지 않은 현실에 심적으로 요동친다. 비록 죽을지언정 새로운 판타지를 세우고 싶은 에디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세계 보디빌더 대회에 출전하기로 결심한다. 역시나 대회 당일 심각한 탈수 증세를 겪는 에디나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설 수 없다. 설상가상으로 심신을 컨트롤할 수 없는 나머지 약물 주사를 놓은 자국이 난 게 들통나 메디컬 팀과 대회 관계자가 상황을 파악하고자 대기실로 가고 있다. 에디나에게 약물 사용을 종용한 사실이 들통나 자기 명예와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수단이 사라지는 게 두려운 아담은 에디나가 무대 위에 오르지 못하게 막으려 한다. 하지만 아담의 고함과 만류를 뿌리친 에디나는 비로소 꿈꿔 왔던 세계 보디빌더 대회 무대 위에 오른다. 간신히 포즈를 취하던 에디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쓰러진다. 그런데 <젠틀>은 쓰러진 에디나와 함께 끝나지 않는다. 대신에 노래가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형식상 <젠틀>은 어떻게 끝난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 테지만, 스크린 안에서 목격한 장면과 이질적인 멜로디의 충돌은 실질적인 결말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모호한 연출과 편집은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에디나의 선택과 무대 위 안간힘을 쓰며 제스처를 취하는 그녀의 클로즈업 숏을 되돌아보게 하며 자본과 경쟁에 익숙한 나머지 주체성, 자유 의지를 비롯한 가치를 잃었는지도 모르는 우리들에게 각성을 촉구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구렁에 선 남자의 선택과 결과, <하모니움>(2016)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