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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링스 Dec 05. 2021

"필요한 거 없어" 라던 아이

필요하다고 하면 사줄 것이니까

최근 누나 육아를 위해 서울에 와계신 부모님을 만났다. 나의 어린시절 이야기가 나왔고, 엄마는 같이 살던 시절을 떠올리며 나에대해 말했다. "너는 뭐 필요하다고 하지 않아서, 사달라고 하지 않아서 가끔은 서운했다." 나는 왜 그랬을까.


나는 왜 그랬는지 안다. 그 순간들을 기억하니까. 최초의 기억은 약 30년 전, 내가 학교를 들어가기 전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그 때 엄마와 아빠는 일하러 나갔고 누나는 학교를 갔다. 나는 할머니와 단 둘이 하루를 보냈다. 할머니는 자주 시장을 갔고 나는 할머니 왼손에 모든 것을 기댄채 시장에 갔다. 보이는 것은 어른들의 발 뿐이었지만 시장의 냄새는 강렬했다. 가장 매혹적이었던 것은 어묵이 끓는 뜨끈한 냄새였다. 나는 어묵을 좋아했고, 냄새가 날 때면 늘 먹고 싶었다. 하지만 한 번도 먹고싶다거나 사달라고 하지 않았다. 이유는 나름 논리적이다. 내가 태어나면서 날 키우기 위해 같이 살게 된 할머니는, 내가 사달라고 하면 사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할머니의 셋 째 아들이었다. 둘 째는 멀리, 첫 째는 더 멀리 가정을 꾸려 떠났고, 고향을 지키는 첫째는 아빠였다. 누나가 태어났을 땐 엄마가 휴직을 했지만, 내가 태어나자 어쩔 수 없이 막내삼촌과 고향집에 살던 할머니를 우리집으로 모셔왔다. 방이 두 개 밖에 없었기에 누나와 할머니와 함께 방을 썼다. 밤에 내가 아플 때마다 할머니는 내 배를 만져주었고, 자기 전까지 항상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들려주곤 했다. 그 때 내가 알게 된 것들 중 하나는 우리 집은 가난하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할머니는 장남도 아닌 셋 째 아들의 집에 얹혀 사는 것이 늘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맞벌이를 하는 엄마와 아빠를 두고 살림을 하던 할머니는 그래서 늘 돈이 부족했다. 나도 그 마음을 밤마다 들으며 할머니와 같은 편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달라고 할 수 없었다. 나만 먹고 싶지 않으면 어묵을 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이런 순간들은 커가면서도 자주 있어왔고, 뭐가 먹고싶냐는 질문엔 고등어를 자주 대답했다. 할머니와 다니던 시장에서 배운 바로는 겨우 고등어가 500원이기 때문에 부담이 없었다. 물론, 누나가 먼저 치킨이나 피자를 말하는 날이 있는데, 그래도 되나 싶으면서도 내심 누나에게 고마웠고 치킨과 피자는 늘 고등어보다 맛있었다.


그렇게 사춘기를 지나 고1이 되었을 때, 누나는 대학을 갔고 핸드폰을 샀다. 나도 핸드폰이 갖고 싶어졌다. 그 당시엔 반에서 절반 좀 넘는 아이들만 핸드폰이 있었지만, 가깝게 지내는 애들은 다 핸드폰이 있었다. 특히 여고 학생들과 반팅을 하던 무리는 다 핸드폰이 있었고, 나는 연락을 하려면 빌려서 잠시 대화를 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었다. "엄마, 나도 핸드폰 갖고 싶다." 엄마는 대답이 잠시 없었다. 괜히 말했다고 생각하고 "아, 근데 괜찮다"라고 말하려는 순간, "그럼 장학금 타면 엄마가 사줄게"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리고 몇 개월 뒤, 나는 내신성적으로 장학금을 받았다. 문제는 내가 장학금을 받았다는 증서를 엄마에게 줬는데도, 엄마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핸드폰 사러 가자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나는 오랜 알고리즘을 발동시켰다. '아... 엄마는 핸드폰 사줘야 하는 걸 알지만...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나보다.' 그리고 나는 침묵했다. 아마 내가 갖고 싶다는 말, 혹은 장학금 타면 사주기로 했다는 말을 꺼냈다면 엄마는 무리해서라도 핸드폰을 사줬을 것이다. 엄마가 그럴 걸 알기 때문에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수능을 끝내고 나서야 엄마는 핸드폰을 사줬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20대를 훌쩍 지나 이 핸드폰 이야기를 엄마와 나눴을 때 엄마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한 번 정도 내가 장학금을 탔다는 사실만 기억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니가 어릴 때 뭘 사달라거나 갖고 싶다고 말하지 않아서 서운했지. 다른 집 아이들은 늘 사달라고 난리인데..."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허무하기도 했던 것 같고, 이게 할머니의 영향인가라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나쁜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어린이었던 나, 청소년이었던 나에게는 미안했다. 더 빨리, 더 많이 할 수 있는 경험을 마음으로 삼켜버렸기 때문에. 그치만 지금의 나에게는 고맙기도 하다. 이 기억으로 할머니와 그 시절의 나를 더 가깝에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생각해보면 우리 집은 어릴  가난했던 느낌도 있었지만, 부모님  분은 공무원이었고 점점 삶은 나아졌다. 그럼에도 나는 그만큼  변하지 못했던  같다. 사실 누가봐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아이라고 한다면, 쉽게 뭘 사달라는 말을 못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그렇게 안보이는 아이라고 해도, 경제적 문제가 없어 보여도 이면엔 많은 것이 있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른까지도 이어지겠지. 나는 많이 변해버려, 지금의 나를 아는 사람들은  이야기를 믿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제  이상  걱정은 없다. 다만 내가 다른 사람의 필요없다는   조용한 혼잣말을 들을  있게 되었는지가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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