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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운 Nov 19. 2019

'웬만하면 그들을 막을 순 없다'가 주는 위로

얼마 전부터 할 일 없이 TV 보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넷플릭스의 세련된 컨텐츠들은 선뜻 손이 안 가고, 왓챠플레이의 영화는 각 잡고 봐야 하는데 요새 통 무언가에 집중하는 게 힘들어서 TV만 보고 있다. 지난주에는 제일 좋아하는 만화인 소년탐정 김전일 애니메이션 판을 오리지널부터 리턴즈까지 전부 다 봤다. 이미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으로 몇 번이나 봐서 익히 알고 있는 스토리였지만 결코 시간 낭비는 아니었던 건, 그 살벌하고 끔찍한 살인사건 속에서도 꽤 진지한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주변 사람들과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하자’는 것. 나는 지인들과 트러블이 생기면 입을 꽉 다물거나 반대로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모조리 퍼부어서 문제를 크게 만드는 나쁜 버릇이 있다. 작은 오해가 불어나 언니가 동생을 죽이고, 오랜 친구들 사이에서 연쇄살인이 벌어지는 김전일의 에피소드를 보면서 앞으로 괜한 오해는 만들지 말고, 어쩔 수 없이 생긴 오해는 적극적으로 풀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교훈을 좋아하는 편이다.


언젠가 내 목숨을 살릴 수도 있는 교훈을 얻었다는 기쁨이 가시자마자 나는 다시 무료해졌다. 웬만한 예능은 다 봤고, 긴 드라마를 정주행 할 자신은 없어서 이리저리 채널을 찾아보는데 ‘레전드 시트콤’이라는 채널을 발견했다. 들어가 보니 김병욱 PD의 전성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순풍 산부인과,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똑바로 살아라, 이른바 순풍-웬그막-똑살 트릴로지를 하루 종일 방영해주고 있었다. 나는 김병욱 PD의 작품을 무척 좋아해서 ‘거침없이 하이킥’, ‘지붕뚫고 하이킥’은 물론이고, 내 주변에 본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가장 최근작인 ‘너의 등짝에 스매싱’까지 한 회도 빼놓지 않고 다 봤다. 심지어 아직도 욕먹고 있는 지붕뚫고 하이킥의 엔딩도 마음에 들어했다.


지금은 아니다. 충격적인 엔딩이나 반전도 결국 관객이 납득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20년 전 만들어진 시트콤이라 지금 보기에 불편한 유머도 있지만, 여전히 웃음이 터지는 장면이 많았다. 깊이 몰입하거나 머리 쓰면서 보지 않아도 돼서 설거지를 하거나 방 청소할 때마다 켜놨다. 컴퓨터 앞에서 밥 먹을 때도 틀어놓고, 가끔은 집중해서 보며 웃기도 했다. 3부작 중에서는 ‘순풍 산부인과’가 제일 유명하지만, 보다 보니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에 더 정이 갔다. 박영규나 오지명 같은 역대급 캐릭터는 없지만, 과장되지 않고 현실에서 있을 만한 이야기인 점이 편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중에서 이홍렬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가장 많이 웃었다. 툭하면 삐치는 소심한 그에게 심히 공감했기 때문이다. 특히 홍렬의 생일날 아주 사소한 일(가령 자기가 말하는데 딴짓을 한다거나 갑자기 얼굴에 케이크를 묻히는 행동) 때문에 자신의 생일파티에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삐치는 에피소드를 보다가 몇 번이나 빵 터졌다. 전에 다닌 회사에서 동료들이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고 배려가 없어서 괴로웠던 적이 있었는데, 그게  의 소심함 때문이었음을 깨달은 일이 생각나서.


요즘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성숙해지기는커녕 갈수록 쪼잔해지고 완고해지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사회생활에서,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의 찌질함을 감추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왔는데, 찌질함은 쉽게 감출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결국 더 찌질한 나를 들킬 때가 많아 서글펐다. 멋지게 나이 들고 싶은데 잘 늙어 좁쌀영감밖에 안 될 것 같아서. 그랬던 나는 틈날 때마다 시트콤을 보며 평안을 찾았다. 만들어진 이야기 안의 과장된 인물일지라도 소심한 홍렬, 고집 고 괴팍한 신구, 눈치는 없고 식탐만 많은 주현이 너무나도 잘살고 있다는 점이 내게 위로가 되었다. 가끔 그들이 귀엽게 보일 때면 최근의 걱정이 조금은 해소되는 듯했다.


찌질한걸로 치면 영삼이 4인방도 만만치 않은데 내가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마냥 귀엽게 보인다.


작년에 5년 다닌 콜센터를 퇴사하며 그동안 상담원으로 일하며 겪은 이야기를 연재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지난 5년이 아쉬워 뭐라도 남겨보자는 마음으로 쓴 글을 기대 이상으로 많은 분이 읽어주셨다. 나의 아픔에 공감해주고, 콜센터의 현실에 대해 대신 화내주시는 분들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 글을 보며 위로받았다는 댓글이 달렸다. 누군가에게 위로를 주고자 쓴 글은 아니었지만, 읽으신 분께서 그런 감상을 얻으셨다니 의아하면서도 내심 뿌듯했다. 그 이후로도 종종 ‘위로가 된다’는 댓글이 달리면서 궁금증이 생겨났다. 내가 회사로부터 부당한 처우를 받고, 진상 고객에게 수모를 당하는 게 무슨 위로가 된다는 걸까. 마음에 여유가 없던 날에는 '매일 욕을 먹으면서도 쥐꼬리만 한 월급 때문에 구차하게 회사에 다니는 나를 보며 자신들의 삶이 나보다 나은 것에 위로를 얻는다는 건가' 하는 꼬인 생각마저 들었다.


결국 나는 그 ‘위로’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연재를 마감했고, 반년이 더 지난 오늘에서야 알게 됐다. 내가 ‘웬그막’의 소심한 홍렬을 보며 얻은 위로와 독자분들이 내 글에서 받은 위로가 비슷한 게 아닐까 하고. 물론 홍렬의 소심함을 보면서 ‘나는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구나’하는 마음에 안도한 점도 분명히 있지만, 그보다는 나처럼 소심하고, 찌질한 존재가 시트콤 안에서라도 살아가는 사실이 더 큰 위안이 됐다. 내 글에 위로를 받으셨다는 분들도 고군분투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등바등 살아가는 내게서 자신들의 모습을 봤던 게 아닌가 싶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긴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나는 20년도 더 전에 이것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동병상련’이라는 아주 쉬운 사자성어로.


내가 찌질해서 힘든 것처럼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이유로 힘들지 않나. 다들 삶이 팍팍하고 괴로워서 좋은 사람을 만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가끔은 힐링 에세이 같은 것도 읽는다. 그러면서 쬐끔은 남의 힘듦을 보며 위로를 얻는 게 그리 나쁜 걸까. 타인의 고통을 나의 행복으로 여기는 고약함이 아니라면, 비슷한 처지들을 돌아보며 적당히 치사하게 위로를 챙기는 것쯤은 괜찮지 않을까. 나의 고통이 너의 위로가 되어주고, 너의 아픔이 나의 위안이 되어주는 위로의 품앗이 같은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내가 홍렬의 소심함에 위로를 얻었듯이, 나의 소심함과 찌질함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나는 앞으로 계속 찌질할 용의가 있다. 남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 괴로워질 용기는 없어도 찌질해지는 건 가능하다. 그건 내게 너무도 쉬운 것이기에. 뭔가 굉장히 찌질한 글이 되어 버렸지만, 이런 글에서도 위로를 얻을지 모를 누군가를 생각하면 그것도 나쁘진 않다.

작가의 이전글 황유미의 <피구왕 서영>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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