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고고미술사학을 전공했다. 고고학과 미술사학이 결합된 학문으로, 유적 유물을 통해 과거 문화와 미술사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연애할 때 아내랑 사찰이나 유적지를 방문하면 아내가 옆에서 "이건 팔작지붕이야", "이건 맞배지붕이고", "통일신라시대 탑의 특징은 이거야"라는 식으로 전공에서 배운 지식을 하나씩 얘기해 줬다. 옆에서 듣던 나는 어찌나 재미있던지 심지어 아내가 대단해 보였다.
생각해 보니 요즘 들어 내가 문화재를 찾아보는 즐거움에 빠지게 된 데는 아내의 공이 컸다. 물론 나도 학창 시절 역사과목을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아는 역사라는 건 책에서 배운 지식이 전부였는데, 답사 경험이 많은 아내와 데이트 삼아 다니다 보니 전문적인 식견은 없어도 국보는 국보인 이유가, 보물은 보물인 이유가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이제는 우리나라 국보를 다 순례하는 일이 나의 버킷리스트가 되었다.
10월 중순, 법주사에 다녀온 뒤 아내에게 부석사를 가 보고 싶다고 슬쩍 얘기했다. 그때는 아내가 멀다고 안 된다고 했는데, 다음 주가 되니 아내가 먼저 부석사를 가자고 했다. 가을에 예쁜 부석사가 아닌가. 부석사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갔으니, 마지막 방문이 10년도 넘었다. 이왕 멀리 경북 영주까지 가는 길이니, 포털사이트에서 영주시에 있는 국보를 검색해 봤다. 총 7점이 검색됐다.
영주에는 부석사 무량수전, 무량수전 앞 석등, 조사당, 소조여래좌상, 조사당 벽화, 안향 초상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이 중 5점이 부석사에 있었다. 동선을 짜 보니 소수서원을 지나야 하기에 부석사 다녀오는 길에 소수박물관에 들러 안향 초상을 보고, 컨디션이 가능하다면 마지막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단양팔경 휴게소 위에 있는 단양 신라적성비까지 7점을 보고 오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월 19일, 당일치기로 영주 부석사로 일찍 출발했다. 집에서 부석사까지 편도 거리는 2시간 40분. 구름 사이로 해가 보여서 날을 잘 잡아구나 속으로 안심했다. 그렇지만 단양을 지나 경상도 땅으로 넘어가니 회색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중간에 단양팔경 휴게소에서 잠시 쉬면서 주전부리를 하고 부석사까지 쉬지 않고 달려갔다.
부석사에 가까이 도착하니 아래서부터 교통통제를 하기 시작했다. 하필 이 날이 행사날이었다. 아래 주차장에 대면 한참 걸어가야 하기에 "아이가 어린데 위쪽에 주차하면 안 될까요?"라고 창문 열어 보여주며 양해를 구했더니 봉사자가 차량 깜빡이를 켜고 올라가라며 길을 열어줬다. 그렇게 윗쪽 주차장 인근 도로에 차를 댔다. 예전에 왔을 때는 주변에 적었던 것 같은데, 유네스코 세계유산 산지승원으로 등록되어서인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이때부터 오르막 길이었다. 법주사는 평지를 걸으며 도착하지만, 부석사는 산 중턱에 자리 잡아 높낮이가 있다. 무량수전까지 오르막길과 계단을 계속 통과해야 했다. 은행나무길을 지나, 일주문을 지나, 사과밭을 지나, 당간지주와 천왕문을 지나고 범종각이 나타났다. 중간에 차량이 지나도록 휘어지는 포장길이 있었지만 우리는 오로지 직진을 했다. 올려다보니 범종각과 뒤편으로 부석사 무량수전이 보였다.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다. 『송고승전』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앉았다고 전한다.
안양루를 지나 부석사 앞마당에 올랐다. 부석사 무량수전 하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었던 혜곡 최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이 떠오른다. 과거 김용만, 유재석이 진행했던 MBC 프로그램 느낌표의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코너에서 추천된 책 중의 하나. 우리말이 참 아름답다. 배흘림기둥이라니. 가 보면 왜 배흘림이라고 했는지 알 수 있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건물이다.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를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짜올 린 주심포 양식이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 중 하나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주변을 둘러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높이 2.78m 소조불상이 보였다. 소조불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 만드는 것인데, 이 불상은 우리나라 소조불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이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특이한 점은 일반 절의 불상처럼 정면 가운데 봉안된 것이 아니라 것이 아니라 중앙 서쪽에 봉안되어 있다는 점이다. 무량수전 공간감을 고려한 배치라는 해석이 있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와 아이는 부처님께 삼배했다. 불교도는 아니지만 절에 오면 절을 하는 편이다. 사진은 찍지 말라고 되어 있어 안 찍었다. 그냥 나가기에는 아쉬워 세 가족 다 같이 바닥에 앉아 잠시 불상을 올려다보았다. 아내가 복을 받으려면 복전함에 시주를 해야 한다고 말해서 지갑에서 지폐를 꺼냈다. 시주는 아이의 몫. 복전함에 넣고 오라고 줬더니 잘했다.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는 석등이 있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하여 광명등이라고도 하며, 대개 사찰의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세워진다. 4각 바닥돌은 옆면에 무늬를 새겨 꾸몄으며, 그 위의 아래받침돌은 큼직한 연꽃 조각을 얹어 가운데기둥을 받치고 있다. 전형적인 8각 기둥형태인 이 기둥은 굵기나 높이에서 아름다운 비례를 보인다. 위로는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은 윗받침돌을 얹어놓았다.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비례의 조화가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지니고 있다.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처럼 압도적인 느낌은 아니었지만 4면에 새겨진 보살상 조각의 정교함은 돋보였다. 석등 앞에서 사진을 찍고 조사당으로 올라갔다.
무량수전 오른쪽 높은 지대에 위치한 3층 석탑을 지나 조사당을 보러 올라갔다. 조사당은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곳이다.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웠고, 조선 성종 21년(1490)과 성종 24년(1493)에 다시 고쳤다. 앞면 3칸·옆면 1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조사당 오른쪽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 선비화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였다는 전설이 있다. 조사당 문은 닫혀 있었고, 6면으로 된 벽화는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조사당 벽화를 보려고 성보박물관으로 갔다. 그런데 성보박물관은 공사를 하는지 출입이 막혀 있었다. 아이에게 음료수를 사 주러 옆에 있는 매점에 들어가서 사장니에게 물었더니 문 닫힌 지 오래됐다고 하셨다. 아쉽게도 못 보게 되었다. 자주 올 수 있지 않아서 이왕 간 김에 다 보고 와야 하는데 하나가 빠지니 김이 샜다.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아이에게 포카리스웨트 하나 사 주고 우리는 천천히 절을 내려왔다.
(나중에 한국일보 신문기사를 보니 보존처리를 위해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운송됐다고 한다. 2026년 7월까지 진행 예정)
부석사 구경을 다 하고 내려와 거의 다 내려왔을 무렵 아이가 옆에 있던 입간판을 보고 물었다. 아빠 "임신금지가 뭐야?"라고. 간판을 보고 웃음이 났다. 입산금지라고 써 붙인 것인데, 누군가 장난으로 떼어냈는지 '입산금지'가 '임신금지'가 되어 있었다. 요건 바로 손보면 좋겠다. 내려오면서 할머니가 파시는 영주사과도 사고, 호떡도 먹고, 축제 행사도 구경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장소인 소수서원으로 이동했다.
* 참고문헌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 설명
* 과거 국보 번호를 붙였습니다. 지금은 지정번호 사용이 폐지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