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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성경은 예수님 이야기인가?

[궁금했성경] 98화, 성막의 색깔과 네 복음서가 가리키는 한 분 예수

by 허두영

1. 성경, 66권이 아니라 한 분 예수님의 이야기


성경을 읽는다는 건 무엇일까. 한마디로, 하나의 얼굴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일이다. 1,600여 년이라는 시간 동안, 40여 명 넘는 서로 다른 저자가 다른 언어와 문화에서 기록했는데, 신기하게도 그 모든 이야기가 '한 사람'을 향해 흘러간다. 그 흐름은 4복음서에서 절정에 이른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네 권의 복음서는 예수님의 네 차원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마태는 '왕으로 오신 예수'를 조명하고, 마가는 '섬기는 종의 예수'를 포착한다. 누가는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진 참 사람 예수'를 기록하며, 요한은 렌즈를 하늘 높이 올려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신 예수'를 바라본다.


왕이면서 종이고, 사람인데 동시에 하나님. 네 복음서는 각자 다른 각도에서 조명을 비추지만, 그 빛들이 만나는 한 지점에는 언제나 한 분, 예수만이 서 있다.


2. 4복음서가 보여준 예수의 네 얼굴


마태복음은 예수를 왕으로 소개한다. 유대인을 향한 기록답게 예수님의 족보를 다윗까지 끌어올리며 "이분이 바로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선언한다. 통치와 권세, 왕의 위엄이 마태복음의 첫 페이지부터 흐른다. 세리 마태는 ‘왕과 권세’가 어떻게 실제로 작동하는지를 권력의 통치 구조를 누구보다 잘 이해한 사람이었으리라. 그렇기에, 예수님을 바라보며 이렇게 깨달았을 것이다. “이분은 로마보다 위에 계신 진짜 왕이다.”


마가복음은 다르다. 설명은 짧고, 행동은 빠르다. 족보도, 탄생 기록도 없이 곧바로 사역에 들어가며, '곧', '즉시'라는 단어가 쉼 없이 등장한다. 예수는 말하기보다 섬기고, 설교하기보다 일하고, 끝내 묵묵히 고난을 감당하며 피 흘려 죽는다. 마가의 예수는 영광의 왕이 아니라 희생으로 낮아지신 종이다.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수종 드는 자’(행 13:5)로 복음 여정을 지원하는 조력자였다. 예수님의 제자 12명에는 속하지도 않았다. 그는 사도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동역자였으나 도중에 이탈했으며(행 13:13), 이후 바나바의 격려를 받고 다시 사역에 복귀한다. 조력자였던 그였기에 무대 뒤에서 고난 당하신 예수를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누가복음은 인간 예수를 가장 섬세하게 그린다. 배고프고 피곤하셨고, 울기도 하셨다. 어린 시절 성장 과정까지 다루며, 아담의 계보로까지 족보를 내려가 '이분은 모든 인류의 구원자'임을 말한다. 성경의 저자 중 유일한 이방인(헬라인)이자 의사였던 누가의 시선 아래 예수는 낯선 신이 아니라 내 곁에서 울어주는 참 사람이 된다. 누가의 직업은 의사였기에 그는 예수님을 논리적이고 세밀하게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고통에 공감하는 완전한 인간이자 모든 죄와 연약함을 치유하는 구원자로 기록할 수 있었으리라.


요한복음은 방향이 다르다.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예수는 세상을 도운 위인이 아니라,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으로 등장한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선언은 그분이 단지 종교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존재의 근원이심을 드러낸다. 어부였던 요한은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의 세 핵심 제자 중 한 명으로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본 제자였다. 오래 살아남아 사도 중 마지막 세대를 대표했다. 특별히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제자'로 불렸다(요 21:7). 가장 가까이 있었기에, 그는 가장 멀리 떨어진 진리, 즉 예수님의 신성을 볼 수 있었으리라.


네 복음서가 함께 들려주는 이야기는 놀랍도록 단순하다. 예수는 왕이면서 종이고, 참 사람인데 동시에 참 하나님이다. 그 말도 안 되는 정체성 속에 구원의 비밀이 숨어 있다. 마태복음은 기다리던 유대인들에게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한 천국 복음이다. 마가복음은 로마인들에게 여호와의 종으로 오셔서 수난을 겪으시고 일하시는 예수님을 증거한 능력 복음이다. 누가복음은 인간의 의를 강조했던 헬라인에게 참 사랑의 아들로 오신 의로우신 예수님을 증거한 인자 복음이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은 초대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한 영적 복음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고난 당하신 종으로, 죄가 없으신 완전한 사람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믿을 때. 그때 비로소 구원이 시작된다.


3. 에스겔이 미리 본 네 얼굴


이 네 방향은 신약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설정이 아니다. 이미 구약에서 미리 묘사되어 있었다. 바벨론 포로기에 에스겔은 그발 강가에서 환상을 본다. 그는 하나님의 보좌를 받드는 네 생물을 보는데, 그 얼굴은 각각 사자, 소, 사람, 독수리였다.


사자는 왕의 위엄을, 소는 종의 노동과 희생을, 사람은 인성과 공감의 능력을, 독수리는 하늘의 초월성과 신성을 상징했다. 초대 교부들은 이 네 생물을 볼 때마다 자연스레 네 복음서를 떠올렸다. "아, 성경의 구조는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있었구나."


마치 시간을 건너뛴 것처럼. 신약에서 밝혀질 하나의 얼굴을 구약의 선지자가 미리 본 것이다. 이름은 몰랐지만, 얼굴은 이미 알고 있었던 셈이다.


4. 성막의 문과 휘장 - 네 가지 색으로 짜 넣은 복음


출애굽기에서 성막이 세워질 때, 하나님은 성막의 뜰로 들어가는 문과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에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실(흰색)을 사용하라고 세밀하게 지시하셨다. 이 네 색은 구원의 드라마 전체를 압축해 보여주는 암호였다.


"뜰 문을 위하여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짠 스무 규빗의 장이 있게 할지니 그 기둥이 넷이요 받침이 넷이며"(출 27:16)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 놓아 짜서 장막 문을 위하여 휘장을 만들고"(출 26:36)


자색은 왕의 색이었다. 값비싼 염료라 왕과 귀족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마태복음의 예수는 바로 이 자색처럼 왕의 권위를 지닌 존재로 등장한다. 홍색은 피를 상징한다. 마가복음의 예수는 피 흘리는 종, 고난받는 제물로 나타난다. 흰색의 베실은 흠 없는 순결과 인성을 상징한다. 누가복음의 예수처럼 연약함을 가진 채 우리 곁에 서 있는 따뜻한 인격이다. 청색은 하늘의 색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위에서 오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다. 이 네 색이 모여 성막의 '문'을 이룬다. 그리고 예수는 나중에 이렇게 선언한다. "내가 곧 문이다."(요 10:9) 문은 천이 아니었다. 아직 몸을 입지 않은 예수의 얼굴을 미리 수놓은 예언의 직물이었다.


그 문을 지나면 또 다른 문이 나온다.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다. 그 휘장 역시 네 색으로 촘촘히 수놓아져 있었다. 히브리서는 이 휘장을 이렇게 해석한다.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다."(히 10:20) 십자가 위에서 예수의 살이 찢어질 때, 성소의 휘장도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졌다. 인간이 아래에서부터 찢어올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위에서부터 찢어내리셨다. 구원은 인간이 쌓아올린 계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오신 길이다.


자색의 왕이 죄인의 자리에서 죽고, 홍색의 종처럼 묵묵히 고난을 견디며, 흰 베실 같은 인자 예수는 버려짐과 목마름을 경험하고, 청색의 하나님만이 그 모든 것을 감당하실 수 있었다.

성막의 문은 얼굴이었고, 휘장은 몸이었다. 그 몸이 찢어지는 순간, 하나님께 가는 길이 완전히 열렸다.


5. 결론 - 성경은 결국 예수님의 이야기다


어쩌면 하나님은 인간이 성경을 공부하길 바라신 게 아니라, 성경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길 바라셨는지 모른다. 성경은 도덕책이나 성공학 교재가 아니다. 성경은 죄인을 부르는 러브레터다. 구약은 오실 분을 기다리는 이야기이고, 복음서는 오신 분을 만나는 이야기이며, 서신은 그분을 따른 사람들의 이야기다. 계시록은 다시 오실 분을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이다.


성막의 구조, 네 복음서가 모두 하나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 왕이면서 종이고, 사람이면서 하나님이신 분. 그래서 성경은 66권이 아니라, 예수님의 66장짜리 긴 인터뷰다. 성경을 펼칠 때마다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이 본문은 예수님의 어떤 얼굴을 보여줄까? 왕으로? 종으로? 사람으로? 하나님으로?" 이 질문을 붙잡는 순간 성경은 숙제가 아니라, 다시 보고 싶은 이야기가 된다. 성막 설계도는 복음의 입구로 보이고, 휘장의 찢어진 천이 아니라 찢기신 그분의 몸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고백하게 된다. 길은 처음부터 하나였다. 문은 처음부터 예수였다.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인천성산교회 홈페이지: http://isungsan.net

인천성산교회 l 인천이단상담소(상담 및 문의): 032-464-4677, 465-4677

인천성산교회 유튜브: www.youtube.com/@인천성산교회인천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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