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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통 계시를 받았다고요?

[궁금했성경] 100화, 계시의 종결성과 완결성, 지금은 조명의 시대다

by 허두영

"어제 하나님께 직통 계시를 받았어요."


한국 교회에서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은 이 말은, 사실 신학적으로는 위험한 선언과 같다. "성경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성경 바깥의 새로운 무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한 문장이 품고 있는 무게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계시의 시대'를 살고 있는가, 아니면 '성령 조명의 시대'로 건너와 있는가. 이 질문 하나에 대한 답이, 성경을 대하는 태도와 예수를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 전체를 뒤흔든다.


1. 계시란 무엇인가


신약이 사용하는 '계시'는 헬라어로 "덮개를 벗기다"다. 뚜껑이 열린 순간을 가리킨다. 핵심은 그 뚜껑을 연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점이다. 계시는 인간이 올라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온 것이다. 우리가 머리를 쥐어짜서 신의 세계를 발견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보여 주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계시는 언제나 하나님이 시작하신 당신의 이야기다. 인간의 내적 느낌, 직관, 영적 센스와는 애초에 차원이 다르다.


구약의 히브리어에는 '계시'에 해당하는 단일 용어가 없다. 대신 '드러내다', '보다', '환상을 보다'와 같은 동사들이 흩어져 등장한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구약은 아직 계시가 진행 중인 시대였다. 씨앗이 심기고, 싹이 트고, 가지가 자라가는 과정이었기에, 그 전체를 한 단어로 규정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였다. 계시라는 개념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계시가 절정에 이르고, 동시에 문을 닫는 신약의 순간이었다.


2. 구약에서 심은 계시의 씨앗이 그리스도로 열매 맺다


계시는 역사 속에서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진행되었다. 첫 장면은 에덴 동산의 심판 자리에서 열렸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창 3:15). 이름도, 장소도, 십자가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여자의 후손'과 '뱀의 머리'라는 희미한 윤곽만 보여준다. 구속사의 씨앗이 땅에 떨어진 순간이다.


이후 계시는 조금씩 선명해진다.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얻을 것"(창 22:18)이라 약속하시고, 출애굽 사건에서는 어린양의 피로 구원을 설명하신다(출 12장). 다윗에게는 "네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겠다"(삼하 7:16)라고 말씀하시며 메시아의 왕권을 예고하신다. 이사야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사 53:5)라고 노래하며, 고난받는 종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구약에서 보여준 실루엣은 선명해지지만, 얼굴은 끝내 보이지 않는다. 이 흐름을 정리해 주는 구절이 바로 히브리서 1장이다.


"하나님이 옛적에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으나,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1~2)


여기서 '마지막에는'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시간 순서가 아니다. 계시의 방식이 더 이상 이전처럼 계속되지 않음을 선언하는 메시지다. 하나님은 더 이상 조각과 그림자로 말씀하시지 않고, 아들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계시의 정점을 찍으셨다. 요한복음은 이를 또 다른 언어로 설명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그를 나타내셨느니라."(요 1:14, 18)


이제 하나님은 상상 속 인물이 아니라, 성육신 하셔서 얼굴을 가진 분이 되셨다. '하나님의 형상'(골 1:15)이자 '영광의 광채'(히 1:3)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는 더 이상 힌트가 아니라 본체가 되었다. 구약이 계시의 씨앗이었다면, 그리스도는 계시의 열매인 셈이다. 사도들의 역할은 이 열매를 보고, 듣고, 만지며 그것을 증언하는 증인이었다(요일 1:1). 그리고 그 증언을 기록으로 남겼다. 요한은 고백한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요 20:31). 사건에서 기록으로, 음성에서 문자로, 계시는 그렇게 정착되었다.


3. 계시는 왜 멈추었는가


이 지점에서 질문이 따라온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계시는 멈추었다"라고 말하는가? 네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계시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과 계획, 사랑을 보여 주실 수 있는 가장 극적인 방식이 십자가와 부활이었다.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라고 증언한다. 이미 확증된 사랑 앞에서 더 큰 증거를 요구하는 것은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신뢰가 부족해서다.


둘째, 성경 66권이 마지막 사도의 죽음과 함께 완결되었고, 하나님은 그 책에 더하지도 빼지도 못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더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재앙을 더하시고 이 책의 말씀을 제하여 버리면, 생명책과 거룩한 성에서 그의 분깃을 제하시리라" 요한계시록 22장 18~19절의 이 경고는 단지 이 책에만 해당되는 좁은 경고가 아니라 종결된 계시 전체에 대한 상징적 선언으로 읽어야 한다. 하나님은 계시의 책을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는 상태로 두셨다. 그 누구도 제2의 복음서를 덧붙일 수 없다.


셋째, 이 책이 구원과 삶에 충분한 계시이기 때문이다. 디모데후서 3장 15~17절은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고, 사람을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한다"라고 선언한다. 만약 구원과 순종에 필요한 것이 여전히 부족하다면, 성경의 충족성은 무너진다. 새 계시를 요구하는 마음 깊은 곳에는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이런 생각이 숨어 있다. "성경만으로는 어딘가 모자라다."


넷째, 계시가 멈춘 건 하나님이 침묵하신 게 아니라, 이제 성령이 성경을 환하게 비춰주시는 시대로 넘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펜을 내려놓으셨지만, 빛을 끄신 적은 없다. 쉽게 말해서 계시가 "기록하라"의 시대였다면, 이제는 "깨달으라"의 시대다.


4. 계시에 대한 다섯 가지 오해


문제는 성경이 아니라, 우리가 계시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오늘 한국 교회 안에서 계시에 대해 자주 등장하는 다섯 가지 오해를 정리해 보면 이렇다.


첫째, "지금도 새로운 계시가 있다"라는 생각이다. 이는 곧 "성경은 아직 완전하지 않다"라는 명제다. 계시의 종결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새 계시를 말할 수는 없다.


둘째, 예언을 곧 계시와 동일시하는 오해다. 신약적 의미에서의 예언은 정경인 성경 66권을 보충하는 새 문서가 아니라, 이미 주신 말씀을 상황 속에 적용하고 해석하는 사역에 가깝다. 새로운 예언이 성경 위에 서기 시작하는 순간, 교회는 성경 중심에서 체험 중심으로 흐르고 만다.


셋째, "강하게 느꼈으니 계시다"라는 감정주의다. 눈물이 흘렀다는 이유로, 혹은 다른 연유로, 그것을 곧바로 계시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신비주의로 흐르기 쉽다. 성경은 진리를 느낌의 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성으로 분별하라고 권한다.


넷째, 꿈과 환상을 계시로 착각하는 오해다. 성경은 하나님이 꿈과 환상을 사용하신 기록을 숨기지 않지만, 그것은 계시가 진행되던 시대의 사건이다. 정경이 완성된 이후에는 어떤 경험도 성경 위로 올라설 수 없고, 반드시 성경 아래에서 검증되어야 한다(딤후 3:15~17, 요일 4:1). 성령은 지금 새 계시가 아니라 이미 주신 말씀을 조명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꿈은 성경을 해석할 수 없고, 성경이 꿈을 해석해야 한다.


다섯째, "성경보다 더 깊은 계시가 있다"라는 위험한 표현이다. 이 말은 곧 이런 의미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직통 계시는 신비롭게 들리지만, 실은 "하나님을 더 깊이 드러낸다"라기보다 "나를 더 특별하게 보이게 한다"는 심리적 욕망과 결탁하기 쉽다.


5. 지금은 성령 조명의 시대다


이제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오늘 교인은 "계시를 받았는가"보다, "성령의 조명을 받고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보혜사 성령을 약속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성령은 새로운 문장을 쓰는 저자가 아니라, 이미 쓰인 문장을 살아 있는 음성으로 들려주는 해석자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성령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고전 2:12)이다. 성령은 이미 주어진 은혜를 알게 하는 분이다.


결국 문제는 계시의 부족이 아니다. 우리는 더 많은 말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말씀을 새롭게 보는 눈이 필요하다. 이 시대에 요구되는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새로운 말씀을 찾아 헤매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주신 말씀을 볼 새로운 눈을 구하고 있는가?"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고, 66권으로 종결되었다. 그러나 성령의 조명은 오늘도 말씀을 펼치는 그 순간마다 우리를 향해 조용히 불을 밝힌다.


하나님은 더 이상 새 문장을 쓰지 않으신다. 이미 쓰신 문장에 빛을 비추실 뿐이다. 이걸 받아들이면, "계시 받았다"라는 자랑은 사라지고 "말씀이 보인다"라는 감격만 남을 것이다.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인천성산교회 홈페이지: http://isungsan.net

인천성산교회 l 인천이단상담소(상담 및 문의): 032-464-4677, 465-4677

인천성산교회 유튜브: www.youtube.com/@인천성산교회인천이단

인천성산교회 고광종 담임목사 유튜브: https://www.youtube.com/@tamidnote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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