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도호(Do Ho Suh)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참 잡기 어려운 놈이 있다.
바로 집값이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이놈을 잡겠다고 외쳐 대지만 허공 속의 메아리가 될 뿐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 새로 분양한 아파트 홍보문구가 들려오고, 길바닥에 널린 게 집인데 왜 내 집은 없는가. 그저 내 몸 하나 눕히는 공간인데 굳이 내 것이 아니어도 상관없지라고 생각하다가도 전셋값을 올려야겠다는 집주인의 문자를 받고 씁쓸해진 마음은 달랠 도리가 없다.
올해 주거 실태조사에서 국민 70% 이상이 “내 집을 꼭 마련해야 한다”라고 답변했다. 월세살이를 전전하다 내 집을 장만하고 방바닥을 닦으며 눈물을 흘렸다는 우리네 어머니 이야기가 “응답해라 1988”에서 볼 법하지만, 여전히 유효한 현재 우리의 이야기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방”에서 살아왔던 청년들은 그래도 결혼해서는 번듯한 “집”에서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악착같이 전세자금을 모으지만 택도 없다. 여기저기에서 웬만하면 “억” 자가 붙으니 쉬워 보이지만, 모으려고 하면 한숨부터 나온다. 옷도 사 입고 밥은 먹고살아야 하니 내 집 장만의 길은 멀고도 멀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는 떠돌이 생활은 계속된다. 그런데 이 떠돌이 생활은 도시화와 함께 시작됐다. 생각해보면 터무니없는 아파트 가격은 대부분 수도권의 이야기다. 급격한 산업 발전과 함께 도시화되면서 사람들은 직장을 찾아 너도나도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올라왔다. 좁은 공간에 사람이 몰리다 보니 살기가 팍팍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도 대학 진학, 취업, 심지어는 시험 준비를 위해 자신의 터전을 옮긴다. 과거에는 한 동네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며 평생을 살아왔지만, 이제는 이곳저곳으로 옮겨가며 사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도 자주 옮기다 보니 고향이라는 개념도 희미해진다. 더 이상 사람들은 한 공간에만 정주하지 않는다.
이는 예술가도 다르지 않다. 공부를 위해 유학길에 오르고, 작업과 전시를 위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다. 오히려 예술가에게서 유목민적 삶을 쉽게 볼 수 있다. 서도호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는 서울 성북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1991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지금은 뉴욕 맨해튼을 본거지로 삼고 유럽과 아시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작업 활동을 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삶은 그대로 작품으로 형상화된다.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도 그중 하나다.
이 작품은 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역사적 개관을 기념하며 전시되었다. 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전통 한옥과 일제 강점기에 사용됐던 기무사 건물에 현대식 건물이 어우러진 묘한 공간이다.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의 역사를 간직한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서도호는 그 자체로 긴 시간이 중첩된 공간에 자신의 공간을 갖다 놓았다. 그는 전시동 중심에 있는 서울박스에 1991년 작가의 미국 유학시절 처음 거주했던 로드 아일랜드 프로비던스의 3층 주택을 실물 크기(높이 12m, 너비 15m)로 재현했다. 그리고 건물의 중심엔 작가가 살았던 전통 한옥집인 ‘서울 집’을 매달아 놓았다.
그런데 두 집은 다른 건물과는 다르다. 단단한 철근과 콘크리트가 아닌 한복에 쓰이는 얇은 은조사로 지어졌다. 옷을 만들 때도, 집을 건축할 때도 쓰이는 ‘짓다’라는 표현은 이 작품에 딱 들어맞는다. 그는 재단사가 온몸을 훑으며 치수를 재듯이, 자신이 살았던 집 구석구석을 측정해 집을 지었다.
두꺼운 벽은 속이 비치고, 땅속 깊이 박혀있던 기둥은 바닥 위로 부유한다. 천으로 지어진 그의 집은 실제 집과는 완전히 다른 집으로 탈바꿈했다. 집은 집인데, 집이 아니다. 그 이미지만이 남아있을 뿐, 그 속성은 완전히 바꿨다.
마치 지금은 그 집이 오직 그의 머릿속 추억으로만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리 다시 그 집에 찾아간다고 하더라도 또는 그 집을 똑같이 만들어 재현한다고 해도, 그것들은 그때의 그 집이 아니다. 그가 살았던 그 당시 그곳은 이젠 머릿속 이미지, 오직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집 속의 집>의 반투명한 벽처럼 언제든지 그 안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고, 그가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항상 그를 따라다닌다. 그의 작품이 이동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시간 흘러감에 따라 그가 거쳐가는 공간에 대한 추억들도 한 겹, 한 겹씩 쌓이게 된다.
지금까지 그가 생활했던 공간이 그에게 흔적을 남기고, 그것이 쌓여 지금의 서도호를 만든 것이다. 그래서 집들은 따로 독립적으로 설치되지 않고 함께 포개져 겹쳐있다. 가장 중심에 그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한옥집이 있고 그 위로 유학 시절 살았던 양옥집이 있다. 작품 제목 그대로 ‘한옥’을 품은 ‘양옥’, ‘양옥’을 품은 ‘서울박스’, ‘서울박스’를 품은 ‘서울관’, ‘서울관’을 품고 있는 ‘서울’까지 공간이 확장된다.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이렇게 그가 점유했던 공간들은 그의 정체성을 만들어갔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과 관계 맺으면서 자신을 형성하고 규정한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일정한 공간을 점유한다. 그 공간에서 거주하고, 성장한다. 하지만 일생동안 단 하나의 공간만을 점유하지 않는다. 이젠 한 곳에 확고하게 뿌리내리는 것은 오래전 일이 되어 버렸다. 태어난 곳과 자란 곳이 다르고, 지금 거주하는 공간이 다르다. 어디에 놓여있는가에 따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요소들이 달라지고, 삶의 이야기도 달라지게 된다. 그리고 그 공간은 내가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나만의 영토이다. 나의 일상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사물 하나, 경관 하나에 담겨있는 나의 기억은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게 해준다.
그렇기에 정체성 문제는 인간 내면으로 침잠하면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공간과의 상호작용에 주목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따라 정체성이 달라질 수 있다. 인간은 같은 공간에서 매일같이 반복되는 삶을 살지만 똑같은 삶의 양상이 전개되지 않듯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과 관계 맺는 양상에 따라 정체성은 차이를 반복하며 변한다. 이러한 공간 중에서도 “집”은 삶의 중심이 되는 장소이다.
그래서 서도호는 자신이 살았던 집들을 만들었고, 그 안의 문고리며 창문이며 물건들을 디테일하게 그대로 재현했다. 그런데 이러한 물건들은 사실 다른 사람들의 물건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가 보여주는 것은 그 집에 대한 그의 기억이 아니다. 사실 그 껍데기만을 보여준다. 그 안에는 집에 대한 그의 개인적 추억은 전혀 알 수 없다. 그저 "집"만이 거기 있을 뿐이다.
관객들은 작품 속 공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 안을 각자의 경험으로 채워 넣을 수 있다. 사람들은 그 공간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면 서로 다른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은 어떻게 보면 지극히 개인적이게 보이지만, 사실 가장 보편적이다. 그렇기에 그가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