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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 Nov 20. 2023

삶은 내게 스스로 일으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2017년 퇴사 후 대학원 입시의 기록

2017년 1월 22일

미루고 미루었던, 아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던 새해의 일기장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퇴사 시기와 딱 맞물렸다는 것도 운명 같다. 1월 중에는 넷플릭스를 보면서 아이템 구상에 참조하자. 삼시세끼 잘 챙겨 먹고, 일주일에 3-4회씩 꼭 운동하면서 미래를 도모하자. 체력도 키우고 날씨가 풀리면 유산소 운동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다시 채우는 작업을 해야 한다. 있는 것뿐만 아니라 없는 것까지 싹싹 긁어 모조리 회사 일에 털어놓았다. 그만둔 후에는 계속 채워야 한다. 비어 있던 영혼을 채우고, 창작에의 갈증을 채우고.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설레고 즐겁다.


매달 월급이 들어오는 것은 내 미래를 예측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반대로 말하면, 상상할 수 있는, 예상 가능한 테두리 안에서 내 인생도 진행된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무한한 가능성의 바다 위에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책임감과 동시에 설렘을, 부푼 가슴을 안고 있다. 이 기분이야말로 내가 삶을 살아가는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떤 존재인가. 내 삶 속에서 스스로를 정의하고 정립하고 싶었다. 이제 그 시작점에 서 있다. 키는 내가 쥐고 있다. 내가 선장이자 선원이다.


2017년 1월 29일

나를 괴롭혔던 것은 내 성격적 결함과 연관된 두려움이었다. 무언가를 얻으면 잃는 것도 있다. 그 사실을 받아들였는데도, 그렇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애써 무시하고 있던 것을 다시 보게 해 준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두려울 때마다, 겁에 질릴 때마다, 엄마가 내게 해준 말을 되새겼다. 당장은 그동안 일구어 놓은 것을 잃는 결과가 되겠지만, 그 모든 것은 더 큰 일을 하기 위해, 더 많이 얻기 위해 했던 결정이라는 것을, 혹은 내 인생에 있어 더욱 가치 있는 일을 하기 위함이라는 것.


2017년 1월 30일

설날을 맞아 고향에 내려갔을 때 버스를 타고 익숙했던 동네를 지나가는데 많은 생각들이 스쳤다. 참 많은 길들을 걸어왔다. 미취학일 때, 초등학생일 때, 중학생일 때, 대학생일 때, 대학 휴학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이십여 년 살았던 동네 골목골목 나의 역사가 고여 있었다.


엄마는 그 자리에 있었다. 자신의 일상을 영위하며. 명절을 맞아 찾아간 엄마의 집은 그 순간 엄마의 일상에 내가 비집고 들어간 느낌이라 그 어느 때보다 낯설었다. 엄마는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더 작아지고 늙고, 남편과 자식 없이도 혼자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다들 이렇게 바쁘게 사는 것, 떨어져 사는 것이 당연하고, 이제 각자의 일과 인생을 응원해 줄 수밖에 없는 모습들. 그건 돈이 많건 적건 세대가 변함에 따라 찾아오는 당연한 것인데도 나는 괜히 서글퍼졌다.


잘 살기 위해 왜 지금 잘 살 수 없는 걸까. 엄마를 위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올까.


2017년 1월 31일

그만두기로 결정하면서도 많은 것을 배워나간다. 내가 어떤 사람과 앞으로도 함께할 수 있을지, 그들이 생각하는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진정 가진 것은 무엇인지, 아직까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은 무엇인지. 많은 생각이 오고 간다.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은 바로 나 자신. 그것만 유념하자.


2017년 2월 7일

모두가 아니라 해도 도전해보고 싶다. 지금 내게 의미가 있고, 앞으로의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를 잃고 싶지 않다. 나를 짜릿하게 하지 못하는 것에 매달리고 싶지 않다.


2017년 2월 24일

일을 그만두고 나서도 연이은 약속에 온전히 평일을 누리지 못했다. 어제 겨우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을 했다. 침대에 누워 하루종일 미드 보기, 아무 생각 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전쟁 후유증처럼,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 사람 관계의 균열이 불현듯 떠올라 괴로웠다.


오늘에 이르자 무수한 꿈에 괴롭힘 당하고,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일상생활 '루틴'이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회사를 그만둔 지 딱 5일째. 벌써 몸이 근질거린다.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고통스럽다. 꿈에서 너무 많은 기억이 떠올라서일까. 정말 전쟁이라도 한바탕 치르고 온 것 같다. 냉장고를 열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의외로 많은 식재료가 있었다. 신선도가 의심스러운, 적어도 3개월 이상은 지난 계란과 설 선물로 받은 스팸 한 장, 버터향 나는 식빵 두 장과 뜨거운 커피. 그렇게 먹고 나니,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포근해 보여 도서관에 가기로 했다.


사람은 냄새를 풍기는 존재인 것 같다. 열람실 안은 씻지 않은 사람의 몸에서, 옷에서, 체모에서 나온 체취가 지독했다. 시집을 읽기 위해 들른 카페는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지고 정말 이 세상에는 내 방 외에는 고요한 장소가 단 한 군데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지긋지긋한 인간 냄새, 소음, 눈빛. 집에 돌아가서 자전거를 타러 나가야겠다. 고인곳에는 악취가 풍긴다. 나는 계속 부는 바람 속에 내 몸을 맡기고 싶다.


2017년 3월 4일

봄나무가 아니라, 봄이 되기 직전의 나무만큼 사람들의 시선을 타는 것도 없으리라. 계절이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렇게 헐벗은 나무들을 쳐다보게 만든다. 그러나 화신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꽃은 봄이 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데 그치지 않는다. 꽃이 모두 핀 봄 나무는 우리가 새로운 세계에 접어들었음을 알린다. 예술가에게 프런티어란 새로운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가 모습을 드러내기 바로 그 직전이다. (...) 무슨 일인가 일어나는 순간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 김연수


2017년 3월 16일

며칠간 루틴 하게 할 일을 해보니까 그새 지겹고 압박을 받는다.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지금 집중하고 싶은 건, 아이템, 꾸준히 해야 하는 영어공부, 수영강습, 다이어트 같은 것. 매일 아침 신문 읽기는 쉬자.


2017년 3월 18일

오늘내일 준비 잘해서 다음 주부터는 시나리오 작업 꼭 들어가기. 장면화 구체적으로 안 한지 오래돼서 아마 부단히 수정을 해야 할 것. 초고는 시놉의 보강 느낌으로, 가볍게 작업해 보자.


2017년 3월 22일

일단 구상한 대로 밀고 나가보자. 재미있을 것 같다. 내 마음속에서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가면 좋을 듯하다.


2017년 3월 28일

나도 알고 있다. 내가 얼마나 대책 없이 이야기를 쓰고 있는지를. 그냥 감각을 따라가 보고 싶었다. 지금은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야만 비로소 나도 즐거울 수 있는 이야기가 되고, 그것이 '나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최고가 되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그것이 실전에서 실력의 차이가 된다'는 말을 떠올린다. '그냥 한번 해봤고, 후회는 없고, 재미있었다.' 이렇게 끝낼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평생 하고 싶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과정이 마냥 즐거운 것도 아니다. '매일 글을 착실하게 써나가는 것이 매일 머리를 쓰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란 거. 알잖아.' 마음가짐을 바꿔서 본심을 가지고 노력하고 정면돌파 해야 한다.


수영할 때 느낀 것. 나는 지금 당장 숨이 막혀와도, 아직 죽을 정도는 아닌 상황에서 이렇게 막혀가는 채로 계속하는 것이 두려워서 결국 멈춰 선다. 지레 겁먹고 행동을 그만둔다. 그것이 내 약점이다. 머릿속으로 가보기도 전에 판단하는 것. 우선은 육체적으로 먼저 그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애써봐야겠다.


2017년 3월 29일

독서를 되찾은 것 같아서 즐겁다. 그렇지. 그동안 회사에서 아이템 찾으랴, 검토하랴 해서 숙제처럼 봐왔지. 그나저나 오늘도 씬리스트 앞에서 작업 시작하는데 고통을 느끼고 있구나. 넘버스 키기까지가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지. 그래도 슬쩍 훑어본 <거장의 노트를 훔치다>에서 처음부터 명확한 건 없다고, 그걸 찾아가는 탐험이라고 한 감독이 말해주어서 너무 고마운 것.


2017년 3월 30일

굳이 씬트릿을 작성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바로 시나리오로 쓰고, 장면 구상이 잘 안 되는 부분은 줄글로 대신하던가 코멘트 붙인 다음 넘어가자. 매일매일 꾸준히 쓰는 것이 더 중요할 듯하다. 오늘 해피 쪽 라인 9 씬까지. 내일 글라스 쪽 씬까지. 마지막(절정~결말) 총 3일에 걸쳐서 쭉 쓰고, 그 이후에 안 풀리는 부분, 대사, 지문 덧붙이기. 그다음 총 수정 1회는 곧 초고 완성. 총 5일간. 하루에 5시간 이상 글쓰기에 할애할 것


2017년 4월 3일

3월은 영어공부, 글쓰기를 꾸준히 했고, 몸이 수영 덕분에 가뿐해지는 동시에, 수영을 더 잘하고 싶어서 하다 보니, 홈트도 예전만큼 힘들지는 않은 것 같다. 비록 달은 넘겼어도, 영어는 1권 곧 완강이고, 시나리오 작업에 착수했고, 팔다리는 단단해졌으며 배와 등의 군살이 줄어들어 간다. 일을 그만두고 한 달간. 정말 애썼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템 하나 잡으려고 엄청 발버둥 쳤었는데. 나의 테마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만들어나가며 알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페이스 잃지 말고, 어두컴컴한 길이더라도 스스로 믿고 앞으로 나아가자.


2017년 4월 7일

스티브 킹의 말이 맞다. 글이 안 써져도 꾸준히 책상 앞에 앉아있어야 한다. 생각을 적든, 자료조사를 하고, 코멘트를 달든. 약 한 달간 꾸준히 책상에 앉아 끄적거린 후에야 지하실에 있는 뮤즈님이 영감 한번 줄까 하고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니 기껏 오신 분 떠나기 전에 마무리하자. 그리고 다음 스태프로. 믿음이 생기기 시작한다. 꾸준한 노력은 날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몸도 그렇고, 마음도 마찬가지다. 용기를 내고 마지막까지 완주할 것.


2017년 4월 13일

당장 찍지 못하는 시나리오를 쓴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호라이즌 제로 던>을 일주일 내내 빠져서 했던 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엔터테이닝한 요소가 이미 게임업계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콘솔게임이라는 것이 대중적이진 않지만 이토록 다채로운 재미를 주는 요소가 많은 오락거리가 있다는 것 자체가 아이템을 대하는 태도를 달리하게 만든다. 체험과 스토리의 매력. 게임에서는 체험이, 플레이가 주목적이므로 세계관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장편을 준비한다면, <분노> 같은 호흡의 영화도 좋지만 이런 설정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3월에 시나리오를 준비하면서 몰두했던 생각은 남들의 영화가 아닌, 나의 영화, 내 생각과 그를 위해 표현되는 스타일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이 생각만은 놓치고 싶지 않다. 내가 공백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과거의 실력부족에도 불구하고 시나리오 한편을 쓸 수 있을까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는 점에서 3월의 작업을 후회하고 싶지 않다. 더불어 내 스타일을 가지고 싶다는 바람도 불어넣었고, 다양한 목적을 내 나름대로 달성했다고 생각한다.


2017년 4월 18일

무질서를 질서로 매듭짓는 것이 나의 시선.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가에 대답. 이게 없으면, 아니 없는 상황에서 영화를 찍으면 안 될 것 같다. 이러지 않을까 정리해서 결말을 내면 이야기가 가짜가 되는 것 같다.


2017년 4월 26일

한 편의 시나리오 초고를 마감한 후 이렇다 할 결과물 없이 4월이 가고 있다. 물론 그 초고가 4월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3월의 연장선 상에 있던 작업이라 4월 만의 결과라 볼 수 없다. 그래서 조바심이 난다. 이제 한 주도 남지 않았다. 눈부신 4월이. 재정비했다고 보고, 5월에 도약하기 위해서 남은 한 주를 의미 있게 보내고 싶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다음 아이템을 바로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머리는 내가 고민하고 개발하는 방향으로 계속 발전하는 모양이다. 회사에서 기획 아이템을 끊임없이 생각해 내게 되었듯이, 단편 아이템도 생각할수록 수면에 떠오른다. 물론 대다수 금방 버릴 만한 것들이긴 하지만.


2017년 4월 30일

일기장 앞에서 가장 솔직해진다. 그래서 일기장을 마주하면 나아갈 수 있는 동시에, 일기장을 마주하기가 두렵기도 하다. 내일부터 5월이다. 4월은 항상 내게 잔인했다. 올해도 예외는 없었다. 행복하다면 행복했지만, 어느 때보다도 고민이 많고 끙끙 앓았던 것 같다. 약속해야겠다. 스스로에게. 5월부터는 매일 일기장을 마주하겠다고, 한 글자도 제대로 된 것이 없고, 하나도 제대로 된 생각이 없다 할지라도, 계속 영화 아이템을 잡는 일을 게을리 지 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믿겠다고. 내가 생각하고 재미있어하는 방식으로, 내 스타일을 만들어가겠다고, 현실은 아직 생각할 때가 아니라고.


2017년 5월 2일

확실히 내가 지루함을 못 견디는 스타일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지루한 걸 못 견디는 건지, 어떤 상황이건 불만족을 느끼는 건지. 3월에 했던 행동, 장소들의 반복이 지겨워진 거다. 스스로에 대해 다시금 들여다보는 잔인한 4월이었다. 물에 있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잡념들, 만남들, 모든 걸 뒤로하고 눈앞에 있는 일에 집중하자.


<아메리칸 허니> 스타는 제이크가 돌아왔을 때 절망하지 않았을까. 그는 그저 자신의 집을 가지고 살고 싶다는 꿈이 있지만, 그래서 그렇게 영영 떠나버린 것 같지만 결국은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길바닥의 삶으로. 그것이 마치 그의 유일한 일거리인 것처럼. 스타가 매춘하는 것에 분노하지만 사실 그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아마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이며 분노가 된 것 아니었을까. 이런 현실.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의 집에서 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삶들이 이렇게 너무도 당연하다는 현실.. 하지만 스타는 꿈꾼다. 물에 잠긴, 갇힌 벌을 구해주고, 아이들에게 먹거리를 사주고, 거북이를 놓아준다. 물에 들어가야 수영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녀는 이제 기꺼이 뛰어든다. 물속으로. 잠수했다 일어서며 거친 숨을 몰아쉰다. 그녀의 눈앞에 꺼질 듯 말 듯 위태로운 반딧불이의 녹색빛이 아른거린다.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길거리에서. 앞으로도, 꽤, 당분간은. 하지만 그녀는 기꺼이 삶을 살아가기 위해 뛰어들 것이다. 이제 막 배운 꿈이라는 것, 미래라는 것, 꺼질 듯 위태롭지만 아직 빛나는 그 어떤 것이 존재하기에.


2017년 5월 15일

5월도 벌써 보름이 흘렀다. 아무리 생각할 것이 많다고 해도 일정이 너무 늘어지고 있다. 아이템 확정하고 한 달이 지났다. 이번 주 내로 톤 앤 매너랑 설정 확정해야 하고 본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나 자신에게 집중하자. 나라는 관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쓰자.


  빌리는 가스난로 위에 놓인 탁상시계를 보았다. 비행접시가 올 때까지 1시간을 더 보내야 했다. 그는 샴페인 병을 식사시간을 알리는 종처럼 흔들며 거실로 들어가서 텔레비전을 켰다. 시간에서 조금 해방되어, 심야 영화가 역방향으로 보이다가 다시 정방향으로 보였다. 그것은 2차 세계대전의 미군 폭격기들과 그것들을 모는 씩씩한 사나이들이 등장하는 영화였다. 빌리가 역방향으로 보니, 이런 내용이었다.

  곳곳에 구멍이 나고 부상자들과 시체를 가득 실은 미군 비행기들이 영국의 한 비행장에서 후진으로 이륙했다. 프랑스 상공에서 독일군 전투기 몇 대가 그들을 향해 거꾸로 날아왔고, 폭격기들과 승무원들로부터 탄알과 포탄 파편을 빨아들였다. 그들은 지상의 파괴된 미군 폭격기들로부터도 똑같은 행동을 했으며, 그 폭격기들은 후진으로 날아올라 편대에 합류했다.

  편대는 화염에 휩싸인 어떤 독일 도시 위를 후진으로 날았다. 폭격기들은 폭탄 투하실의 문을 열었고, 기적 같은 자력을 일으켜 불길들을 작게 만든 후 원통형 강철 용기들 속으로 거둬들였으며, 그 용기들을 폭격기의 뱃속으로 끌어올렸다. 강철 용기들은 깔끔하게 거치대에 장착되었다. 지상의 독일군도 기적을 일으키는 장치를 여럿 갖고 있었다. 그것은 길쭉한 강철 튜브였다. 그들은 그 장치를 이용해 폭격기들과 승무원들로부터 더 많은 파편들을 빨아들였다. 그러나 아직 상당한 미군 몇 사람이 있었고, 파손된 폭격기 몇 대가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 상공에서 독일군 전투기들이 다시 올라오더니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을 새것처럼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폭격기들이 기지로 돌아갔을 때, 철강 원통들은 거치대에서 내려져 미합중국으로 반송되었고, 그곳 공장들은 밤낮 작업을 하여 원통들을 해체하고 위험한 내용물을 각각의 광물로 분리했다. 애처롭게도, 일하는 사람들은 주로 여성이었다. 그 광물들은 이제 멀리 떨어진 지역의 전문가들에게 보내졌다. 광물들을 지하로 보내 다시는 누구에게도 손상당하지 않도록 꼭꼭 숨기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다.

  미군 비행사들은 제복을 반납하고 고등학생이 되었다. 히틀러는 갓난아기로 돌아갔을 거라고 빌리 필그림은 추측했다. 그것은 영화에는 없는 장면이었다. 빌리가 기지의 사실로부터 미지의 사실을 추정한 것이었다. 모두가 다시 갓난아기로 돌아갔으며,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전인류가 생물학적으로 협력하여 아담과 이브라는 두 명의 완벽한 인간을 탄생시켰다고 그는 추측했다.

- <제5 도살장> 커트 보니것


2017년 5월 24일

나는 지금 나의 생활을, 나의 일상을 침범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그것이 가볍게 지원했다가 된 사업이든, 연애든, 내 자신이 되기 위해, 그리고 작품을 만들기 위해 월급과 번듯해 보이는 직장을 포기했다. 다시 결심을 다져서 결과물을 내야 할 때가 왔고, 그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다.


2017년 5월 31일

보고 싶은 사람도 많았고, 챙겨야 할 행사도 많았고, 새로운 것을 시작해보려 하기도 했고, 꼭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오랫동안 품고 있기도 했고. 그렇게 정신없이 보내서 달이 저무는 며칠간 몸도 마음도 아팠다. 엄마는 에너지를 자꾸 낭비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게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니니까. 너무 꽉 들어차면 비우고, 정체되어 있으면 뒤흔들고, 그러다 방전되면 채우면 그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5월을 보내며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직감과 직관이 더 정확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수영이라는 것을 선망하게 된 이유의 6할은 요시모토 바나나이고, 4할은 무라카미 하루키일 것이다. 요즘 부쩍 물속에 있는 시간이 좋다. 힘을 빼고 유유히 물살을 가르는 그 느낌이 좋고, 짧은 순간 호흡의 달콤함이 좋고, 몸의 열기가 바로 물에 씻겨 나가는 감각이 좋다. 강사님은 나를 중급반으로 쫓아내고 싶어 하지만 여전히 더 배우고 싶은 마음과 이대로 있고 싶은 마음에서 맴돈다. 영영 같은 자리에 있을 수만도 없어서 이번주부터는 강습이 끝나고, 쉬지 않고 자유형을 하는 연습을 시작했다. 반 바퀴도 겨우 하다가 한 바퀴 반 정도 쉬지 않고 돌게 되었다. 힘이 들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아 좋고, 물 안이 영영 다른 세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제 그만하고 가야지 하다가도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하고 물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하게 되는 것. 그로 인해 얼굴을 붉히게 되는 것. 그런 것에 너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반합. 충돌과 갈등에서 더 좋은 것이 생겨난다고 믿고, 스스로에게 당당하고, 나 아닌 누구도 나를 상처 입힐 수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나는 일을 이리저리 벌리는 경향이 있는 사람치고 지나치게 신중하고 예민하다.


2017년 6월 7일

고작 4개월이다. 3월부터 6월. 아직 4개월도 채 되지 않았다. 일을 하면서는 1년을 참았으면서, 하고 싶은 일은 왜 이렇게 참을성이 없이 구는 것일까. 나 스스로에게 웃음만 난다. 마음을 독하게 먹자.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한 삶을 받아들이자. 익숙해지자. 아무것도 가지지 않아도, 내가 쓴 시나리오 한 부에 온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드는 것. 이 세상에서는 먼지 같은 존재이지만 그런 내가 하나의 세상을 창조해 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기분인지. 가장 내게 충만함을 주는 일. 원고에 마침표를 찍을 때. 편집 후 export 할 때. 벌써부터 편집을 하고 싶다.


REPLAY (2018)

이거 좋은 거 같은데 형식적으로도 맞고, 내용적으로도 맞고.

스포츠에서는 승부가 나지 않았을 때 다시 하는 경기.

비디오를 다시 재생하다.

제목 정했고, 이제 무엇에 대해 이야기할 것인가. 죄책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2017년 6월 10일

루틴한 일상이 매우 중요하다. 내키는 대로 하면 자꾸 보상을 바라게 되고, 계속 뭔가 덜한 듯한 찝찝한 기분이 들 것이다.


2017년 6월 17일

돈이 떨어져 가면서 내가 정말 엄청난 결정을 했었구나 하고 느끼게 되었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고된 길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일단 가볼 때까지 가보자. '미래를 계획하고 대비할 수 없다'는 것이 이 길의 핵심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할 것 같다.


주중에 씬리스트 작업을 하다가 깨달은 놀라운 사실.

이건 정말 기록해 두고, 앞으로 작업할 때마다 참고해야 한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이야기 - 좋은 아이디어 - 를 일단 그냥 바로 써라! 마음이 가는 대로!

결국 첫 비전이 마지막까지 간다. 그렇다면 혼자 끌어안고서 끙끙대지 않고 바로 쓰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습작이 늘어갈수록 내게도 훈련이 되는 것이다. 지금 고작 단편 한 두 편으로 인생 베팅할 것도 아니고, 계속 계속 써나가면서 세련되게 만들고, 심플하게 만들어나가고 하는 작업 과정을 훈련해야 한다.


고정적인 수입이 보장되는 직장을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1년도 안 되는 시간에 모든 것을 판단하고 승부를 보려고 하면 될 것도 안된다. 인내심을 가지고 걸어갈 용기가 필요하다. 작업들은 계속되어야 한다. 일지를 쓰면서 스스로를 알아가고, 작업의 효율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건 나만의 지도 같은 것이다. 앞으로 갈 길이 험난하다.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


2017년 6월 21일

그래서 결국 어떻게 해야 할지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려고 했는데 바로 민낯을 드러내게 되어서 위축된 것 같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고, 왜 나는 이 정도인가 싶고. 그래, 이 생각이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하루종일 자유롭게 어떤 노동도 하지 않는 환경에서 써낸 것이 고작 이 정도인가?' 내가 고작 이런 글을 쓰려고 회사를 그만둔 것인가? 이 생각이 너무 치명적이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현실이다. 내 능력은 회사를 다니면서 플러스된 부분도 있지만, 멈춰있었던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맨땅이나 다름없음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더 이상, 이 길을 가보지 않음에 후회는 없을 것 같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단계일 뿐, 무언가가 되기 위해 가는 길이 아니다.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기획도 필요하다. 도발적이고 야심적이어야 한다. 리프레시하자.


2017년 6월 24일

나는 one of them이 아닌, only one이 되고 싶다. 내 목표는 영화감독이 아니다. 나는 나만을 위한 나의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콘텐츠 제작자를 목표로 하자.


2017년 6월 29일

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냐 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했던 누군가를 상처 입혔던 것도 대수롭지 않게, 혹은 전혀 생각 없이 기억 속에 자리조차 주지 않은 채 뻔뻔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모든 인간이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겠지.


2017년 7월 1일

누나는 나를 믿었고, 나도 나 자신을 믿었는데, 결국 나는 책을 쓴다던 꿈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어. 난 이제 쉰 살 밖에 안 됐어. 내가 담배와 술을, 그래 술과 담배를 끊는다면, 난 책 한 권쯤 쓸 수 있을 거야. 여러권도 쓸 수 있겠지만 어쩌면 단 한 권이 될 거야. 난 이제 깨달았네, 루카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나.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힐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 지나갈 뿐이네. -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타인의 증거> 아고타 크리스토프


2017년 7월 7일

그동안 상황에 집중해, 나의 욕심 때문에, 무조건 두 사람이 나와야 한다고 고집했으나, 사실은 거기서부터 잘못된 생각이 아니었나,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이 든다. 주인공은 한 명이다. 그를 중심으로 세계를 펼쳐나가야 한다. 그의 난관, 장애물을 위해 그다음 인물이 탄생하는 것 아닐까? 제대로 된, 좋은 아이디어의 인물들이라면 확고하겠지만, 우선 한 명의 인물과 한 개의 공간으로 한계를 정하고 다시 고민해 보자.


2017년 7월 17일

심기일전하는 월요일. 못하면 재능이 없는 것이다. 해내면, 재능이 있는 것이다.


2017년 8월 4일

우선은, 정말로 여성 주인공을 내세우고 싶고. 공포는 내가 그만큼 일그러진 사람의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서 어려울 것 같고. 여성 주인공 스릴러나 여성 서부극. 어떤 영화를 할지 고민하고 그 레퍼런스에 맞는 영화, 감독을 분석하는 것이 더 효율적으로 보임. 장편이므로 그에 걸맞은 큰 이야기.


이번 달에 예상외로 시간 누수가 많이 생길 것 같다. 확실한 데드라인이 있는 작업과는 달리 아이템 기획하는 일은 정말 시간을 눈뜨고 날려버리기 딱이다. 회사 다닐 때 피칭 날짜 앞두고 계속 써치 했듯이 지금 장편 아이템을 잡는 일도 뾰족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도 매일매일 생각해야 한다. 염두한 채로 영화를 보고, 책을 보고, 생각과 좋아하는 내용을 정리하다 보면 목적지가 생기기 마련이다.


2017년 8월 7일

사회생활을 하지 않고, 한정된 사람들과의 만남이 나를 점점 외골수로 몰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무렵. 나는 내 감정과 생각을 나눌 사람이 그 안에서도 충분치 않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독한 고독이 밀물처럼 가득 닥쳐왔다. 내 마음을 나누고, 생각을 나눌 상대는 오로지 내 작품의 등장인물 밖에 없는 듯했다. 그래서 이야기를 만드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마치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내 반쪽처럼 각별하게 생각되었다. 그립고, 사랑스럽고, 애틋하다. 이런 내 마음을 결코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모르는 일이다. 성큼 다가온 준비되지 않은 미래와, 물릴 수 없이 쌓여버린 살아온 시간들이 나를 불안함 속으로 내모는지도. 오늘 같은 날, 위로가 되어주는 것은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 같은 소설 <쇼코의 미소>와, 쇼팽의 피아노이다. 몸이 힘들면 잡념은 사라지기 마련인데, 그것도 예외가 있나 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수마가 찾아온다는 것. 잠과 망각은 축복이다. 신이 내게, 인간에게 준 축복. 당장의 2주간 드라마틱한 아이디어가 생길 일은 없다. 그저 내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진실하게 그것을 풀어낼 일이다. 내일은 여행준비를 마무리 짓고 쉬어야겠다.


2017년 8월 21일

내가 지금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진심으로 파고들 수 있는 이야기인지를 고민하고,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금전적인 지원이 있으니, 상업적이거나 기획적인 터치는 필요하겠지만.


앞서 생각한 대로, 나는 주인공이 범죄자인 편이, 쫓기는 쪽이 더 재밌을 것 같다. 혹은 쫓기는 자와 쫓는 쪽 모두를 보여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기도 하다. 소재를 강렬한 것으로 잡자. 주인공은 여자. 다른 영화와 겹치더라도 나만의 시선과 터치가 있으면 되니까.


현대 사회 시스템이 개인에게 가하는 억압은 인간적인 삶을 포기하게 만든다. 특히 여성에게는 더욱 그렇다. 정치, 경제, 문화 권력은 남성들이 쥐고 있다. 그들만의 연대는 너무도 단단해 여성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간다는 것은 고군분투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미모, 지성, 성적매력, 성격 등에서 특정 가치 일색을 요구한다. 즉 본성대로 살면 살아날 재간이 없다. 40~50대 중년 어머니. 왜 그들은 우리를 파괴하는가?


2017년 8월 28일

장편은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해야 해. 투자는 둘째치고 내가 재미있고 하고 싶은 이야기여야 신명 나게 버티고 빠져들어서 하는 것 같아.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장편은 즐거운 이야기, 희망을 주는 이야기, 감동적인 이야기가 되면 좋을 것 같아. 아이러니가 있는 골 때리는 상황에서 시작해서. 난 가족의 회복보다는 가족이 아닌 자들이 화합하는 이야기가 좋고, 그 인물들이 아이러니한 관계에 있는 것이 재미있는 것 같다.


우리 현 나이의 고민. 결혼, 임신, 직장. 가족의 해체, 새로운 가족, 늙어가는 몸.

세상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 법. 사람 사는 이야기를 충실히 보여주면 그곳에 사회와 시대가 있을 거야.


2017년 9월 13일

이제 돈이 다 떨어졌다. 퇴직금, 주식 전부 썼다. 지원 사업은 낙방했다. 내년, 영화를 찍고 나면 다시 업계로 복귀하지 않고 공무원 공부를 시작할까 한다. 지방에서 살고 싶다. 일단, 대학원 지원하고 교육 수료하고, 9월 마지막주, 알바자리를 찾아봐야겠다.


2017년 9월 15일

이제 더 생각해 봤자 더 좋은 생각이 나올 일은 없을 것 같다. 준비된 것이 아니라, 데드라인에 겨우 맞춘 정도의 아이템으로 뭘 하겠다는 건지. 전형료만 날리는 거 아닌가 싶은 회의감이 들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남은 일주일은 잠을 줄이고 바쁘게 보내야 한다.


2017년 9월 17일

난관에 봉착했다.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야기는 펼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친구가 나와 다른 성향, 취향을 가진 것은 분명히 나에게도 작품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자감독이 할 법한 뻔한 드라마'라는 표현을 굳이 썼어야 했을까.


그건 그거고 그래서 나는 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얼마나 해낼 수 있을까. 점점 자신감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경지에 왔다. 어디에 있어도 불편함을 느끼는 내 기질이 너무너무 싫다. 욕심부리지 말고, 미리 속단해서 포기하지 말고, 그냥, 할 일을 하는 거다. 오늘은 충분히 펼칠 거리가 있는 로그라인 한 줄 완성시키자. 잘 만들어진 로그라인.


2017년 9월 18일

보여주고 싶은 것

쿨하고 무자비한 여캐. 액션. 도끼

여자의 우정과 성장

장르, 형식


2017년 9월 29일

오늘부터 본격적인 추석연휴가 시작된다. 할 일이 태산이다. 집중해서 쓸 수 있는 것은 이번 주말 내로 다 끝내자. 해설서, 프로필, 그다음엔 오로지 작품 계획서에 매진한다. 급할 때 나오는 것이 실력이고, 본모습이다. 이번에 지원을 하면서 그 사실을 다시 확인했으니 됐다.


2017년 9월 30일

어느덧. 9월의 마지막 날. 내가 고대했던 10월이 추석연휴와 함께 시작된다. 이것도 기회다. 지금 이 시간도 다 돌아오지 않는 소중한 시간들, 순간들이다. 그러니 지나가버린 후에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자. 이번 달에 알바를 구해야 한다.


2017년 10월 1일

일정을 정리하면서 이번 달 일정이 생각보다 빡빡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작품계획서의 우선순위. 현재 우선순위는 장편 아이템이다. 오늘 영화를 보고 정리하고, 장편 아이템을 구상해야 한다.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은지 고민해 보자. 이제는 정말 나다운 것이 필요하다. 단순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단순한데 꽉 차 있는 영화. 문학적인 것, 연극적인 것 모두 배제하고 영화적인 재미로. 꼭 하고 싶은 건, 드라마+범죄다. 주인공이 범죄자인 이야기. 단순하고 직관적인 이야기일 것.


2017년 10월 3일

나보다 잘 해낼 남자 감독들이 많은 아이템은 그만두자. 그들 속에 편입되기 위해 애쓰지 말고 내가 잘할 수 있고, 나만이 가진 감성과 진정성을 녹여내는 영화를 하자.


2017년 10월 4일

나는 죄책감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그것이 범죄와 엮이면 좋을 것 같다.


2017년 10월 7일

죄(상처), 죄악감, 죄책감. 내가 관심 있는 주제.

이런 내가 못나서, 내가 나조차도 혐오스러워서 미안하다고도 차마 말하지 못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어렸던 날들의 이야기가 졸업영화였다면, 이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미안하다'라고 말하는 용기를 내는 이야기로. 그것에 대한 고군분투를 다룬 한 사람의 이야기였으면 한다.


2017년 10월 8일

클라이막스. 클라이막스를 떠올려보자. 그녀를 위해 대신 목숨을 던질까? 마지막은 <제5도살장> 같았으면.


수치심의 문화: 나에 대한 남의 비판이 중시

죄책감의 문화: 나에 대한 나의 비판이 중시

우리 사회에 혼재. 서양에서 죄책감에 대한 문화가 유입. 잘못의 판단 기준이 자아냐, 집단이냐. 수치심의 문화에서 자살한다면, 죄책감의 문화에서는 세상이 뭐라고 해도 결백을 위해 싸운다.


2017년 10월 11일

달리기를 연달아하거나 조금만 더 달리는 시간을 늘리게 되면 밤에 잠을 잘 못 잔다. 오늘도 계속 뒤척이고 여러 번 모양을 바꾸는 꿈을 연달아 꾸며 괴로웠다. 그래도 그런 식으로 몸을 움직이는 건 확실히 쾌감이 있다. 단순히 걷기로 만족되지 않는 화학작용 같은 것들이.


불안한 미래. 특히 돈으로 인한. 때문에 오늘 부쩍 마음이 무겁지만 바흐의 음악을 듣고 있자니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진다. 유려한 음계, 반복했다 변주되는. 듣고 있으면 확실히 정돈되고 차분해진다. 성가 같아서 세속의 고통을 아무것도 아닌 일로 생각하게끔 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음악은 놀랍다.


장편 아이템의 가닥이 조금씩 잡히고 있다. 그 이야기는 몇 겹의 베일 뒤에 가려져 있어, 나는 끊임없이 베일을 들춰내야 한다. 인물에 애정이 생겨야만, 일말의 매력을 느껴야만, 그를 들여다본 순간부터 이야기는 시작되는 것 같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2주. 인물부터 고민해 보자. 그런데 모 작가님 말씀이 다 맞는 것 같다. 단편은 불현듯 하나 둘 번뜩 떠오르는 것. 쓰는 것도 금방인데 장편은 그렇지 않다. 항상 염두해야 할 듯하다.


2017년 10월 15일

고대했던 대학원 입시도 이제 일주일 후면 시작이다. 통장 잔고는 바닥을 드러냈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그래도 다음 주는 어떻게든 되겠지, 내일은 어떻게 되겠지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2017년 10월 19일

마치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모 대학원에 제출했던 이야기를 다시 꺼내보았다. 그다지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처럼 느껴졌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이걸 써낸 것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지금 아무 생각이 들지 않고, 꽉 막힌 수채구멍이 된 것 같은 머릿속을 들여다보며 나는 당황하고 있다. 어쩌면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촉박한 시간에 하나로 뭉쳐지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늘 같은 고민지점에 서 있다. 이상은 저 높은 곳에서 반짝이는데, 나는 항상 닿을 수 없다. 너무 잘해보려고 하는 이 마음이 오히려 독이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잘하고 싶고, 조바심이 난다. 내가 천재가 아님을, 노력하는 자, 그중에서도 그렇게 노력해야만 중간은 가는 사람이라는 것. 어디에 있어도 불편함을 느끼며 새로움을 꿈꾸는 사람이라는 것. 그걸 인정만 해도 편해질 것이다. 여기서 절대 멈추지 말고 장편 시나리오로 꼭 쓰자. 내년까지 습작 꼭 채울 것. 그 후에야 내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할 수 있으리라.


2017년 10월 22일

정말 불완전함 자체다. 자기소개서와 포트폴리오 해설서를 다시 읽어봐도 정말 마음에 안 들고. 미치겠다. 그래도 일단 준비해야 하는 서류의 구색은 다 갖췄다.


2017년 10월 24일

나의 성향을 제대로 파악하게 된 9월과 10월이었다. 나는 데드라인 직전의 집중력이 약하다. 데드라인 직전에 더 여유로운 이 감각이 참 우습다. 확실한 건 처음에 생각이 안 나면 아무리 시간을 들여도 크게 나아질 가능성이 별로 없는 듯하다. 그러므로, 처음이, 첫 아이디어가 제일 중요한 것 같다. 또 다른 단편은 킵해두고 우선은 알바나 일자리 구하기에 집중하자. 일부터 구해놓고, 단편을 고치거나 구상하든, 장편 아이템을 추가로 생각하든 해야지.


2017년 10월 25일

모든 것은 과정. 과정이 내 삶이다. 오늘 서류 제출을 끝냈다.


2017년 10월 27일

이제 다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갈 때인 것 같다. 두 달간은 일하고 돈 버는 데에만 집중하고 싶다. 뭐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저 살아가는 자체가 힘이 드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렇게 살아가는 중에 놀라운 것들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마지막 발버둥이다.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기 위한 발버둥. 모든 삶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나의 도전은 노멀 라이프로 가기 위한 발버둥. 내게 재능도, 꿈도 없다는 것을 깨닫기 위한 여정. 평생을 저주받지 않는 생을 살기 위한 발걸음이다.

  

2017년 10월 29일

초반 열 씬. 시퀀스 1에서 보여주어야 하는 것.

중학교 시절. 유준의 마지막 경기. 빠르게 치고 나가서 1등 하다가 숨 못 쉬고 기절. 과거 트라우마와 디졸브. 유준의 친구. 급식체 쓰는 뚱보. 전교 1등과의 관계. 소진 등장. 사실은 친구가 아니라, 수영장에 씐 귀신이었다.


2017년 10월 31일

큰 분기점을 하나 지났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모든 서류 작업이 완료되었다. 남은 일은 필기시험과 면접, 그리고 돈 버는 일이다. 회사를 퇴사하고 3월부터 10월. 총 8개월 동안, 놀기도 했지만, 계획에 따라 잘 달려온 것 같다. 비록 장편 아이템은 마음에 드는 수준까지 구상해내지 못해서 아쉽지만, 앞으로 해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까지 움직여 왔던가. 생각해 보면 단순한 몇 가지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 같다. 그저 삶의 흐름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손으로 만들어낸 것, 그것으로 절대적 평가를 받는 것, 그것이야말로 숨길 수 없는, 그리고 누구도 앗아갈 수 없고,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일이며, 그 일을 할 때 아직은 미숙하지만 내가 서 있는 이 땅이 허상이 아닌, 내가 발을 굴러 단단하게 만든 땅이라는 것을 믿고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앞으로 해야 할 일도 산더미다. 습작으로 장편 시나리오 쓰기. 내년 초에 당장 촬영할 단편 시나리오 준비하기. 그에 앞서 시험을 준비해야 하니 영화감독, 영화분석 및 영어공부도 병행해야 할 것이고. 시나리오 구성이나 작품 분석은 몸에 배어있는 실력으로 하면 되겠지만 연출 부분은 아무래도 그동안 내가 손을 놓고 연마하지 않았던 부분이니 이건 그래도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스콜세지 말대로 연출자는 카메라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 지를 알아야 한다. 어떤 영화 분석할지 리스트업 하고 씬바이씬, 샷바이샷할 것.


2017년 11월 1일

1차 합격은 내게 자신감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 마음이 제일 불안한 이유는 '돈' 앞으로의 생활비 문제 때문이다. 어디건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이었는데, 먼저 제안해 온 여러 회사들에게 답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12월까지는 기다려보아야 할 것 같다. 다만 이런 식으로 돈을 쓰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2017년 11월 7일

제안받은 일은 성사되지 않은 채 최종 마무리가 되었다. 실망한 것도 사실이지만 심호흡을 하고 평정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새로운 곳에 발을 딛는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아직까지는. 적지만 다른 곳에서도 돈은 벌 수 있다. 그래도 사심 없이 이사님이 해주신 이야기는 감사했다.


입사 당시에 내가 정말 반짝반짝했다는 것. 난 스스로에 대해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확실히 피칭 때 사람들에게 많은 어필이 되었던 것 같고, 잘했던 것 같다. 이어 유명한 한국의 작가 감독들을 이야기하며 그들이 그다지 관객 수에 동요하지 않는 것을 보았고, 그저 자신의 길을 걷더라면서. 내가 당신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그 지점인 것 같다고 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나아간다는 점. 나와 긴밀한 시간을 보냈던 것도 아닌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해 주어 고마웠고,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이미 충분히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거기에는 스스로 회사를 박차고 나왔기에, 그런 선택들이 있어 가능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2017년 11월 8일

월요일에 일이 그렇게 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사무보조 아르바이트 모집에 이력서를 내고 곧장 연락을 받아 바로 출근하게 되었다. 어쨌든 하면 된다라는 용기를 얻었다. 새삼 깨달은 것. 회사에서 월급을 그래도 잘 받고 다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르바이트하면서 그만치 벌기가 쉽지 않다. 앞으로는 그렇고, 내년이 되면 또 다른 방법이 생기겠지. 의외로 시험 준비할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서 스스로 어이없기도 하고 그렇다.


최근 또 느낀 건, 나의 세계 안에서는 너무나 크고 대단해 보이는 것도 남들 눈에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너무 당연한 사실이지만 한 번쯤 깨닫고 자극받는 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그래야 나와 세상을 조화롭게 바라보고 균형감각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계속되었던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 소진되었던 것 같다. 그저 손만 움직이고 싶다.

 

2017년 11월 14일

Y피디님이 해주셨던 이야기가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기획 영화든 예술 영화든, 내 작품이든 이에 맞춰서 생각하게 되었을 때 방향을 못 잡겠다고. 무엇이 옳은지 모르겠다고. 그런 답답함을 느낄 때 피디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 건 나눠지지 않는다고, 결국에는 그 모든 카테고리를 관통하는 본인이 하려는 바가 있을 거라고 했다. 자신이 그동안 나를 보아왔던 것이 있으므로, 그 부분을 문제없이 찾아낼 거라고. 용기를 낼 수 있는 말을 해주셨다.


2017년 11월 17일

모두가 볼 수 있는 영화는 얼마나 값진가. 이런 영화도 값지지만, 모두가 즐겁게 보는 가운데, 인간애가 있고, 가치 있는 주제에 대한 레이어가 들어간다면, 단순히 말초적인 즐거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무언가, 감동을 줄 수 있다.


2017년 11월 20일

그냥 다 그만두고 싶다. 돈이 떨어져 가는 걸 보니까 미치겠다. 모은 돈을 다 쓰더라도 다시 벌면 되니까. 지금 걱정되는 건 오히려 대학원을 들어간 이후다. 지금이야 그냥 아르바이트하면서 돈 벌면 되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빨리 발표가 났으면 좋겠다. 새 출발은 즐겁지만 그 외에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이 너무 괴롭다.


2017년 11월 21일

언제나 시야를 넓게, 그리고 좁게, 자유자재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두 가지 모두 복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균형감을 유지할 수 있다.


2017년 11월 24일

모두가 떠나가고 모든 것이 사라지네

강물이 흘러가듯 근심도 잊히네

-플로베르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어도 지금 어떤 상황에 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있던 팀은 말 그대로 박살 나버렸으니까. 오히려 내 정신에 악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고, 경멸하는 사람에게 더욱 매달리는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운전하는, 내가 키를 잡고 있는 조각배는 너무도 위태롭고, 풍랑에 버티질 못할 것 같다. 지나가는 견고한 범선에 타 있는 안전하고, 또 그럴듯해 보이는 삶에 비하면 초라하고 위험하다. 하지만 그런 배도 침몰한다. 언젠가 모두 죽을 운명이라면, 나는 내가 왜 죽는지, 어떻게 죽을지는 알고 싶다.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현재가 더 내게 가치 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가슴을 필 수 있다. 그래서 어떤 결말이 되든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후회도 없다. 어떤 결말이 더 낫다고 할 수 없다. 모든 엔딩에는 즐거움과 걱정거리가 함께한다. 그저 나는, 역시나 늘 그래왔듯.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삶이 이끄는 대로 나아갈 뿐이다.


지친 건 확실하다. 올 한 해가 엄청난 무게로 다가온다. 그래도 즐겁고 보람찼다. 아마 나이가 들어도 올 한 해는 잊지 못할 것 같다. 내년에도 내 자유의지를 가지고 즐겁게 먹고살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연말에는 그저 올 한 해, 특별히 아픈 곳 없이 행복하게 보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으로 따뜻하게 보내야겠다. 지친 것을 받아들이되, 너무 심각하지 말고.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 늘 운명이 나를 손짓한다.


2017년 12월 15일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신이 좀 나갔던 것 같다. 어떻게 시험을 그딴 식으로 볼 수 있었을까. 특히 3번.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그렇지. 미치겠다 정말. 나 왜 이러지. 미쳤나 정말? 내 나름대로는 두 인물의 대화 안에서 갈등을 주기 위한 설정이었다. 선정한 인물에 대해 상소한 정보가 없기 때문에 생각한 궁여지책이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던 것 같다. 어쩔 수 없다 이제. 잘 보이려고 애쓰지 말고 솔직하게, 생각한 바를 말하는 수밖에. 일단 오늘은 모르겠고, 아무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내가 그동안 쌓아놓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분명히 쓰일 곳이 있으리라.


이제 마지막 시험 하나 남았다. 끝이, 올해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도 매년 내 계획은 우여곡절 끝에 달성해 왔던 것 같다. 나이가 들고, 경험을 할수록 한 사건과 물체를 바라보는 원근감을 조율할 수 있게 되고 다양한 각도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나는 그것이 나이 듦의 지혜인 동시에 고단 함인 것 같다고 생각한다. 작품에서 뿐만 아니라 본인의 삶에 대해서도 이러쿵저러쿵 비판하는 자아가 큰 영향력을 발휘하여 이리저리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나이 듦은 점점 무던해지는 거라고들 하는데 난 오히려 나이 듦에 따라 자아가 더 견고해져서 폭넓게 사고하거나 열려있지 못한 것 같다. 무던해지는 것과 지나치게 완고해지는 것. 두 가지 모두 나이 듦의 증거일까. 모르겠다.


2017년 12월 18일

이 감각은 그다지 좋은 결과는 아닐 거라는 바로 그 감각, 혹은 예감이다. 떨어진 면접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기대하던 바로 그 지점이 없어 흥미를 잃은 눈빛. 내가 쌓아온 것이 없었다거나, 대답을 기똥차게 못했다거나 물론 그 부분에 있어서의 아쉬움은 있지만, 무엇보다 내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것은, 결말은 날 테지만 '얻지 못함'에 있다. 회사를 그만두고 이정표를 삼은 대학원 입시였으나 한 해를 바라보며 왔는데 수확하지 못한 것은 그 자체로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발표를 앞둔 일주일간, 플랜 B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때인 것 같다. 뭐 어쩌겠는가. 이것도 다 연이다. 연이 닿으면 함께 하는 것이고, 연이 아니라면 각자 갈 길을 가는 것일 뿐.


2017년 12월 20일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하면 할수록 분명 해지는 감각이 있다. 점점 그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어가자 순간 마음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그래. 정말 어떻든 간에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런데도 말이다. 사람이란 가진 것을 버릴 순 있어도, 가지지 못한 것에는 끝내 아쉬움이 있는 법이다. 그래, 그것이 사람이라면 평범한 사람이라면 다 그런 거지만 난 기도를 했다.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 끝의 길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솔직히 월요일의 일기가 나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 한껏 허세를 부린 거였다는 것을 인정한다. 점점 사실감을 가지고 다가오는 금요일을 앞두고, 이제는 오히려 침착해져 가는 것 같다. 이 길이 아니라면 또 다른 길이 있다. 운명의 수레바퀴가 움직이는 소리를 내며 기계처럼 맞춰 돌아가는 세상. 내 운명은 고작 그렇게 움직일 뿐이다. 우주의 먼지나 다름없는 나의 삶은, 내 안에서는 우주보다 광활하고 깊지만, 별 것 아니기도 하다. 내가 별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하고 있다.


2017년 12월 26일

포부를 안고 시작했던 2017년이 저물어가고 있다. 아쉬운 마움, 안타까운 마음 하나도 없이 내 마음은 전에 없이 평온하다. 올해 단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맘 편히 제대로 놀지 못했던 것. 그것 하나뿐이다. 결국 이렇게 다시 일을 하게 될 거였다면 맘이라도 편하게 놀 걸. 애초에 그럴 수 없는 인간이라, 아쉬움은 아쉬움으로 남길 도리 밖에 없다. 이 일의 교훈이 무엇인가 막연히 생각해 보았다. 내가 부족했다거나, 준비가 덜 되었다던가, 이 길은 내 길이 아니었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런 단순한 이야기를 삶이 내게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삶은 내게 스스로 일으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누군가가 깔아놓은 레일 위를 달리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눈에 보이는, 누가 밟아온 길을 걸으면 불안함은 없을 것이다. 대신 내게 가장 잘 어울리고 적합한 길을 찾을 수는 없다. 결국은 누가 깔아놓은 길을 가려면 그 길에 나를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커버 사진

장 뤽 고다르 <네 멋대로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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