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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 Nov 24. 2023

부서졌을 때 비로소 깨어나는 것

To 2017 From 2023

2023년 11월. 너에게 보낸다.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간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의아해했어. 대학원에 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이미 업계에서 자리를 잡고 일하는데 학위가 무슨 소용이냐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학원이라기보단 너에겐 영화를 찍을 돈을 지원해 주는 곳이었던 것뿐이지만. 회사를 왜 그만두냐는 질문에 이런저런 이야기 없이 회피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기도 했지. 물론 학부를 졸업할 무렵,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던 관객들의 부름에 응답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걸 안다. 


결과적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약 8개월 준비했던 두 군데의 대학원 입시에 낙방했어. 모교 대학원은 지원만 하면 입학할 수 있었겠지만 위의 이유가 충족되지 않아서 애초에 원서를 넣지 않았고. 그 사이에 지원 사업에도 합격하고, 연애도 할 뻔하고 많은 일이 있었지. 그 모든 것을 흘려보냈는데 정작 원하던 입시에는 뚝 떨어지고 말았던 거야. 너는 2017년의 기억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고 했지. 그런데 정작 나는 그때의 기억들이 많이 마모되었단다. 실패의 기억이기도 했고,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했던 시기이기도 했거든. 


실패라,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완전히 부서졌던 거라고 생각해. 너도 알잖아? 불합격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오히려 더 후련했던 거. 나는 사실 부서지길 원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가능성은 절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잖아. 그간 회사에서 벗어나길 바라며, 학부 때 못다 한 '나만의 작품'에 대해 부풀려왔던 환상이 2017년에서야 부서졌던 거야. 그 환상은 취업을 했던 2013년부터 점점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었던 거, 기억하지?


부서지고 나서야 깨어났지.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악몽으로부터. 피디의 길 아니면 연출의 길이라고 생각했던 어리석음으로부터 나라고 생각했던 나로부터. 삶은 너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어. 네가 가고자 했던 길은 너의 길이 아니었다고, 너에게는 너만의 길이 있다고. 그래서 후련했고, 한편으론 안도했지. 


2023년에서는 그렇게 생각해.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대학원을 준비해 보지 않았다면, 궁핍한 생활을 해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뻔하지. 아직까지도 억울하고, 어리석고, 불만이 가득했을 거야.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을 알지 못했을 거야. 네가 가고자 했던 길도, 아니라고 돌아가는 길도, 새로 걷는 길도 모두 나의 길이었다는 사실, 그 모든 길이 결국 하나의 길로 향한다는 삶에 대한 비밀을. 


2013년에 만난 인연에 대해 이야기 한 적 있지? 그땐 알려줄 수 없다고. 바로 그 일이 일어났지. 2013년에 시작한 인턴을 그만두면서 계속 존경하던 피디님께 졸업 영화가 담긴 dvd를 전달했잖아. 그때 쓴 인연이 2017년의 말미에 도착했던 거야. 대학원에 떨어지자마자 실의에 빠져있을 새도 없이, 캐스팅과 편성이 확정된 드라마 보조작가 일을 제안받았어. 이때까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 문득 2023년의 오늘, 떠오르더라. 그 일을 만나게 된 것,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시간들이 어쩌면 대학원이나 다름없었다는 거. 넌 이미 3년 전에 포트폴리오를 제출했던 거야. 결과적으로 그 후로 대학원보다 더 값진 시간들을 살아가게 돼. 


나쁜 소식은 미리 알려줄게. 지금부터 잘 들어야 해. 그 값진 시간들은 정말 몸서리칠 만큼 냉혹하고, 처참하게 외롭고, 괴로울 거야. 하나만 기억해. 너는 결국 그 끝에 네가 진정으로 살고 싶은 길로 향하는 문을 발견한다는 것을. 미래의 너를 믿고, 잘 헤쳐 나가길 바란다. 너에겐 언제나 행운이 함께 했다는 것을 부디 믿어주길. 



커버 사진

미야자키 하야오 <하울의 움직이는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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