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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 May 11. 2024

예술가로 거듭나기 위한 포석

To 2019 From 2024

2024년 5월에 너에게 쓴다.


너는 예감했겠지. 그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그것이 아마도 네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전 해에 생각하고, 트리트먼트 작업을 끝냈던 아이템의 시나리오를 쓰는 것으로 그 시간을 보낼 것이라고 결심했을 거야. 2년의 시간. 물론 생계로 인해 창작에만 집중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나, 충분했다고 느꼈어. 결코 포기한 것은 아니었어. 그저 이 방식으로는 오래 지속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었어.


시나리오를 쓰면서 동시에 연이 닿은 제작사에 제안할 또 다른 상업 장편 아이템의 시놉시스를 작업했지. 그 끝에 들었던 말이 아직도 기억이 나네. '너는 글을 참 잘 쓰지만, 작가는 하지 마라'란 말이었지. 그 말은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끊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게 했던 말이기도 했어. 계속 이대로 작업할 시간을 마련하려고 했던 노력이 무산되는 순간. 너를 끊임없이 재촉하던 시계침이 결국 정각을 맞이하여 쨍하고 괘종이 울리던 순간. 그 여운이 가시기 전에 곧장 너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지. 또 다른 제작사를 찾아가 이번엔 글이 아닌 '너라는 사람'을 팔았어. 피디로서 너는 여전히 좋은 값을 받고 팔렸지.


결국은 실패했구나. 결국은 창작자가 되지 못하고 다시 하던 일로 돌아왔구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까 봐 두려웠어. 2년 전의 너와 2년이 지난 후의 너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인데, 사람들은 당장은 자기들 좋을 대로 떠들어 댈 테니까. 내가 감독이길 포기하고 피디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듯, 내가 다시 피디의 일을 한다고 해서 내가 창작자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닌데 말이야. 물론 이 사실을 너 자신도 제대로 깨닫게 된 것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였지만. 그땐 너 역시도 사실 마음속 한 구석으로는 어느 부분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너는 새 회사에 출근을 한 달 앞두고, 잠시 멈춰둔 시나리오를 다시 쓰기 시작하기로 했지. 그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것이 내가 보낸 2년의 시간의 마지막 장이었다는 것을, 무조건 완성해야만 하는 결말이었다는 것을  너 역시도 직감했던 거야. 

 

정말 징글징글한 인연이었던 것 같아. 너와 그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하지만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인연과 그 아이들과 함께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매일도 끝은 있더라. 지금 생각해 보면 안 될 아이템은 결국 안 되는 거였어. 그런데도 너는 악으로 붙들고 있었지. 애정으로 매일 그 아이들을 생각했고, 매일 백지 위로 그 아이들을 불러다 앉혀 놓았지. 


2년 간 이야기에 결말에는 교훈은 없어. 철저한 실패의 기록일 뿐. 심지어 실패는 그 후 2년은 더 이어질 거야. 지금에서야 돌아보니 17년에서 21년까지가 사실은 하나의 테마로 묶을 수 있게 되네. 그 후로도 나는 처참히 실패하고, 속수무책으로 부서졌어. 하다 하다 자기 자신조차 잃어버릴 정도로 부서졌지.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나라는 폐허, 허무한 공동에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잉걸불이 들끓고 있었다는 것을 24년이 되어서야 알게 될 거야. 그리고 24년이 되어서야 그때의 기억을 다시금 리플레이해 보게 될 거야. 누가 뭐래도, 당장 내일 굶어도, 거리에 나앉게 되어도, 이 세상 그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엄숙한 임무를 수행하듯 눈을 뜨자마자 자리에 앉아 글을 쓰던 너의 그 타오르는 집념의 나날들을.. 더 이상 꿈도, 열정도 아닌 그저 집념 하나뿐이었던 시절을 떠올리게 될 거야. 


그것이야말로 감독도, 피디도, 작가도... 이와 같은 어느 직업으로 표현될 수 없는..

'예술가'로 거듭나기 위한 포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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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큐브릭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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