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던전밥>
일본 TVA 애니메이션에 대해 꽤 역사 깊은 씹타쿠였던 나는 30대에 들어서면서 점점 탈덕 노선을 타서 최근에는 거의 보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가끔씩 재미있는 거 없나 하고 기웃거릴 때가 있다. 그때마다 넷플릭스에서 눈에 띈 < 던전밥>은 뭔가 정체불명의 제목 때문에 딱히 관심이 가지 않았고, 외견을 보고 범람하는 이세계물이 또 나왔나라는 편견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묘한 이끌림에 의해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내가 애정하는 정통 판타지 세계관 혹은 고전 판타지 게임과 흡사한 세계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로그라인은 사실 어마어마한 흥행작인 <귀멸의 칼날>과 흡사하다. 던전 미궁에서 모험 중에 레드 드래곤에게 잡아먹힌 여동생 파린을 구하러 가는 라이오스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 작품은 목표를 위해 치열하게 달려 나가는 비장함도, 액션에도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돈도 식량도 떨어진 이들은 미궁에 널린 마물들을 잡아먹으면서 앞으로 나아가자고 결심한다. 이들이 파린을 구하러 가는 여정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먹는 일’인 것이다.
마물을 먹는다는 것은 꽤 복잡한 일이다. 방금 전까지 자신들을 위협했던 존재들이 요리 재료가 되면서 마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하고, 의미가 치환된다. 심지어 그들을 요리하여, 맛있게 먹고, 소화를 시키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 자체가 살고자 하는 의지로 느껴지며 인간이 어떻게 자연의 정복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생각까지 하게 한다.
‘먹는 일’ 다음으로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유머’다. 물론 작중의 상황은 심각하지만 주인공 라이오스는 호기심 많은 마물 덕후인 데다가, 병적으로 긴장감이 없다. 그와 누구보다 진지한 마물식 전문가 드워프 센시가 ‘보케’ 역(바보)을 맡고, 엘프 ‘마르실’과 하프풋 ‘칠책’이 ‘츳코미’ 역(지적)을 맡으면서 작중의 톤 앤 매너는 시종 유머러스하다.
‘난 확실히 실력이 좋은 편도 아니고, 넌 웬만한 모험가보다 강해. 하지만 이건 단언할 수 있어. 하루 세끼 꼭 챙겨 먹고 잠도 푹잔 우리가 너보단 훨씬 진지해!’
애니메이션 기준, 라이오스의 이 대사가 <던전밥>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래곤에게 잡아먹힌 여동생이 소화되기 전에 구해야 한다는 설정도 그렇고, 이후 여동생을 살려내지만 마물과 혼종이 되어버린 상황도 그렇고 사실상 여동생이 죽은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라이오스와 동료들은 잘 먹는다. 그것만이 비극적인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세수하기를 포기한 사람부터 죽기 시작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잘 먹고, 잘 자고, 무엇보다 유머를 잃지 말자는 메시지는 무척 감동적이다. 그렇게 살아있다 보면, 우리가 원하는 방향은 아닐지라도 더 나은 상황이 올 것이라고 믿고 싶게 만든다.
뭐 실제로 라이오스가 왕이 되는 스토리로 이어지는 것 같아서 무척 기대가 되는 부분. 자신의 왕을 너무도 사랑하여 왕국에 불로불사의 저주를 걸고, 왕국 자체를 미궁에 가둬버린 빌런, 미치광이 마법사도 맛도리인 부분.
다만 고전 판타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나, 작품의 유머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에겐 매력적인 요소가 없을 가능성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