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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모어책방 Apr 09. 2022

할머니와 목욕탕, 하나.

짧을 것 같은 또는 길이를 가늠할 수 없는 글을 하나 쓰려고 한다. 종종 글이 내면의 호흡 같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 이 글은 조금은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후우 하고 뱉으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글인 것 같다. 


할머니는 참 목욕탕을 좋아하셨다. 어머니와 목욕탕에 한번 들어가면 3시간씩 계시곤 했으니 말이다. 아 정확하게는 2시간 뒤에 보자고 해 놓고서 3시간 뒤에 나오셨다고 해야 하나. 겨울이면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다니셨으니 꾸준하시기도 했다. 이처럼 늘 기대 이상으로 목욕탕을 좋아하셨던 할머니의 목욕탕에 대한 사랑은, 정작 목욕이 끝난 뒤 알 수 있었다. 목욕탕 입구에 걸터앉아서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끽연하시던 할머니의 등이 참 나른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평소 지니고 있는 고독함과는 다른 결이었다. 


나는 그 마른 등을 사랑했다. 인생의 깊고 뜨겁고 차가운 물속을 지나 겨우 숨을 쉬고 있는 마른 등. 위태로운 담배 연기를 내쉬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태우고 있는 등. 여름이면 하얀 모시옷으로, 겨울이면 꽃무늬가 새겨진 누비옷으로 덮어도 숨겨지지 않는 마른 등. 어쩌면 그 마른 등을 보기 위해 방학이면 토요일 아침마다 목욕탕이 있던 수성못으로 갔는지 모르겠다. 


2010년 하와이를 가기 전까지는 그 목욕탕이 내 하와이였다. 어울리지 않는 투스칸 양식의 하얀 기둥에 얹힌 갈색 한국식 지붕을 가진 목욕탕 건물에서 하와이를 연상하기는 어려웠다. 이미 부곡하와이라는 네이밍에 얹은 현실과 괴리된 욕망을 경험한 대구경북 사람들에게는 이 정도는 용납할 수 있었던 것인지. 할머니와 나의 어머니는 무난히 새로운 하와이에 적응했다. 바다 대신 잉어도 발견되지 않는 못에, 야자수 나무 대신 정비되지 않은 향나무. 미국에 손주들이 있음에도 하와이를 가보지 못하신 할머니에게 그곳은 영원히 하와이가 되었다. 


3시간이라는 목욕탕에서의 시간은 일찍 시작되어 느리게 흘렀다. 와이키키 해변에서 sun lounger에 앉아 해가 지기를 기다리는 하루 대신 나는 목욕탕이 붐비는 것을 싫어하시는 할머니 때문에 새벽 6시부터 온탕에 앉아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덕분에 나는 아무도 없는 큰 목욕탕에서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다. 학교에서 부르던 I could sing of your love forever 같은 노래이기도 했고, 토이의 미안해 같은 노래를 말하듯 뱉곤 했다. 노래는 나지막이 퍼져 수증기 속으로 사라졌다. 특히 혈관개선, 피부 노화 개선 등 한국 사람들이 사랑하는 단어들 잔뜩 써붙인 증기 사우나에서 확장된 모공에 벽에 걸린 각종 한약재의 기운을 받으며 백세 인생의 꿈을 꾸곤 했다. 


피가 닮은 것인지. 할머니가 떠난 뒤 가족들은 나 못지않게 노래 흥얼거리는 것을 좋아하던 그녀와 그녀의 노래들을 기억했다. 목욕을 마치고 종종 드라이브를 가던 봄, 그녀는 내가 알아듣지 못할 노랫말들을 흥얼거렸다. 늘 같은 멜로디인 노래들은 가슴을 아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노래를 부르다 갑자기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하고, 욕을 하기도 하고, 그러다 뜬금없이 터진 그녀의 울음에는 우리 어머니의 울음소리도 섞여 있었다. 그렇게 목욕을 마치고, 어린 시절 마주하던 자연을 대하고서야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지난 시간들을 노래와 바람에 실었다. 나는 열린 차창 사이로 오가는 바람 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의 근현대사처럼 굴곡졌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부모님께 사랑받지 못하고 이른 나이 시집을 가야 했다. 사랑받지 못한 유년기는 알츠하이머에 걸려 딸을 엄마로 부르며 울어야 할 만큼 한으로 남았다. 그리움인지 슬픔인지 우리는 알 수 없었다. 아직 그 주름진 얼굴에 흐르던 눈물이 아른거린다.


남편은 유서 깊은 유학자 집안의 막내아들이었다. 시아버지는 직접 세 아들의 교육을 담당하셨고, 아들들은 여성의 교육이 보편적이지 않던 시기에 하나뿐인 여동생을 아껴 따로 글자를 가르치고 책을 읽어주던 따뜻한 가족이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던 시기, 고종의 밀지를 받은 정환직과 함께 시아버지는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장으로 4년을 버텼지만 결국 일본군에 패배하고 잠적했다. 당시 대부분의 의병들이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패배하고 산화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매우 긴 투쟁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 가족들은 일본군이 아버지를 찾을 때 볏짚에 숨어 일본군의 총칼을 피했다. 시아버지는 1940년까지 보현산에 은거했다고 하는데, 막내며느리는 눈에 불이 있던 시아버지를 시집오던 날 처음 영정 사진으로 만났다. 


장기간의 의병활동으로 인해 풍요롭던 집은 풍비박산이 났다. 종들도 모두 떠나고 양반댁은 변화된 세계 속에서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남편은 그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본으로 일을 하러 떠났다. 수년이 지나도 생활비만 드문드문 왔기에 할머니는 일본 본토로 또 사할린으로 남편을 찾으러 떠났다. 주소가 적힌 종이 한 장이 다였는데 그녀는 그 종이보다 길고 두터운 믿음을 갖고 바다를 건너고 이곳에서의 삶을 건넜다. 다행히 우여곡절 끝에 남편을 만난 그녀는, 첫째를 일본에서 낳았다. 


남편은 자상했다. 10살이 많았기에 어린 아내를 마음으로 아꼈다. 양반집 도련님이었기에 세상 물정에 깊지 않고 모든 이에게 너그러웠다. 술과 화투를 즐겨서 어린 아내의 원성을 자주 샀는데, 그럴 때도 '예끼 망할 것' 이상으로 폭언을 쏟아붓지 않았다. 그런 남편을 외모적으로, 성격적으로 닮은 셋째 아들과 나의 어머니는 자신들의 아버지를 따라 끝까지 어머니를 사랑하고 존중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피난을 다녀오니 첫째 딸이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 유아 사망률이 40% 가까이 되던 시기. 너무 흔했던 일일까. 할머니는 그 일을 너무 담담하게 말하곤 했다. 그냥 그렇게 됐다고, 어느 날 아프더니 갔다고. 넋 놓고 슬퍼하기엔 전쟁 후 굶주림에 지친 자녀가 이미 넷이었다. 어린 목숨이 흰 눈 녹듯 사라지면 그 햇볕에 다른 아이들 언 발을 녹여야 했을 뿐이었던 걸까.


다정했던 남편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내 어머니가 100일을 막 지난 시점. 먼저 보낸 첫째 딸에 대한 슬픔 때문이었는지, 그는 밤에 더욱 많이 마셨다고 한다. 슬픔보다 커야 했던 잔의 크기 때문인지, 아님 젊어서 이국에서 했던 고생들 때문인지. 그는 둘째 딸이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떠나버렸다. 아버지의 사랑을 다 받지 못한 막내딸을 안고 할머니는 남편을 땅에 묻었다. 싱글맘이 아이 여섯을 키우기 쉽지 않던 시절. 성폭행과 강도의 위협을 딛고 꿋꿋이 남의 밭일을 하며 버텼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할머니의 삶 중에 평온했던 시기를 찾는 일이 참 어렵다고 느꼈다. 아이들이 크며 주는 기쁨을 누릴 새 없이 그녀는 생존에 부딪혀야 했고, 그것도 배우자가 없이 다섯 어린 목숨을 위해 매일 아침 눈을 떠야 했다. 


두 아들이 성인이 되면서 집안 형편은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다. 돈을 허투루 쓰지 않았던 할머니는 아들들에게서 오는 돈과 일하며 번 돈을 모아 산 등성이의 땅을 샀다. 집에서는 산 하나를 넘어야 닿던 밭이었기에, 할머니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산을 넘어 일을 하러 다녔다. 밭에 김을 매고 있으니, 호랑이가 위에서 할머니에게 흙을 뿌렸다는 전설은 한반도에서 마지막으로 호랑이가 공식적으로 발견된 기록보다 40년 뒤였다. 호랑이와 삵을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만큼, 할머니는 두려움을 넘어 그 밭에서 집에서 굶고 있는 새끼들을 생각하며 밭을 일궈야 했다. 그만큼 버거워, 까닭 없는 짜증에 어린 딸은 상처를 받기도 했다. 


유달리 키가 크고 고집이 있던 둘째 아들은 베트남 전쟁에 지원했다. 말려도 듣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아들을 전쟁터로 보냈던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이 전사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먼 나라에서의 전쟁은 이미 황폐했던 그녀의 삶을 그대로 관통해 버렸다. 모두가 잠든 밤, '너거 엄마 혹시 나쁜 생각할라, 니가 자지 말고 단디 지켜봐래이' 이웃 아주머니의 말씀 때문에 잠들지 못한 어머니의 눈에 호롱불 아래 탁자 위에 하얀 약봉지를 펼쳐놓고 한참을 앉아 있던 할머니가 들어왔다. 혹 어미가 그 약봉지를 손에 들까. 어린 딸은 그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둘째 아들의 전사자 위로금은 이미 대구에서 장사를 시작했던 첫째의 사업에 재정적 날개를 달아주었다. 결혼한 첫째네가 장사를 하며 태어난 손녀를 기를 상황이 되지 않자, 시골에서 손녀를 자신의 젖을 물려가며 키웠다. 소를 팔고 밭을 판 돈도 첫째에게 주어 사업에 보태게 했다. 그때는 그런 믿음이 있었다. 첫째를 건사하면 나머지 아이들을 챙기겠지. 그래서 첫째는 희생도 많았지만 자본도 집중됐다. 다행히 첫째의 사업은 일정 이상 성공했고 수성못 근처에 살던 집을 헐고 다시 지어 큰 아들네와 함께 살게 되었다. 앞에 조그마한 마당이 있던 2층 양옥집. 할머니는 그 집에서 방풍이 안 되는 가장 작은 방을 얻게 되었다. 그 방에서 처음 잠을 자던 날, 할머니는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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