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설렘 없이 여행하기 2
크으아아 케에엑
도시의 소음이 사라진 곳에서 반가운 새소리에 잠이 깨면 다행이련만, 바르셀로나에서의 아침은 공룡덕후이신 아드님의 공룡 이야기와 함께 시작된다. 꿈도 공룡 꿈을 꾸는 것인지, 아침부터 뭘 그렇게 잡아먹히고 쿵쿵 난리인지. 2센티 두께의 총천연색 공룡 책으로 가끔 자고 있는 내 얼굴을 후려치시는 아드님은 아마 쥐라기 공원에서도 충분히 생존할 것 같다.
그런 아이와 우리의 기호 사이에 처음으로 균형을 잡아보자고 계획한 것이 이 여행이었다. 락다운과 오미크론을 거쳐 2년 만에 런던 자연사 박물관에 갔을 때, 신나 하던 아이의 얼굴. 2년 동안 우리도 부지런히 공룡 관련 지식을 쌓았더랬지. 한 살 아이를 데리고 처음 갔을 때는 박물관 한쪽 면을 수놓은 참치 같은 화석들이 영국에서 많이 서식한 이크티오사우르스였다는 것과 그 옆에 커다란 악어 머리 같은 뼈들이 모사 사우르스인 것을 알지 못했다. 보이는 만큼 알게 되는 건 좋은데 크게 좋진 않다.
유럽에 있는 자연사 박물관들을 살펴보다, 바르셀로나에 자연사 박물관이 있고 구글맵 사진에는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스피노사우르스도 있었다. 혹시 상설 전시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따라서 첫 일정은 그 자연사 박물관으로 자연스레 정해졌다. 아주 자연스럽다.
아이를 위하는 훌륭한 부모와 배가 고픈 자연인의 욕구 사이의 갈등도 아침 식사를 일단 하는 것으로 자연스레 균형을 맞췄다. Federal Café Gotic는 람블라스에서 고딕지구 안쪽으로 조금 들어간 곳에 위치한 카페인데, Pasaje de la Paz 바로 앞에 위치해 있다. Passage of peace. 작은 아치형 문을 지나면 잿빛 문들이 늘어선 작은 골목을 지나게 되는데, 한 때 도시에서 가장 성행했던 사창가가 있던 자리이다. 화려한 도시의 삶은 고통스럽고, 고통은 위로를 호소한다. 누군가 여기에서 방 한 칸에서의 짧은 평화를 원했나 보다.
카페는 다른 의미에서 작은 안식이 된다. 약간의 outdoor space는 끽연가들이 커피 한잔에 담배 연기를 묻어 하루를 시작하기에 좋고, 넓게 열린 창 사이로 스미는 바람은 시원하다. 코스타에서 파는 가짜 코르타도 말고, 여기선 꽤 괜찮은 코르타도를 마실 수 있다. 진하지만 탁하지 않다. 아이는 여기에서 파는 베이직한 토스트를 좋아했다. '잼 좋아' 하는 아이에게 잼을 한번 더 듬뿍 발라준다. 아침이 조금 더 여유롭다.
Museu de Ciències Naturals de Barcelona는 람블라스나 고딕지구와 같은 여행객으로 붐비는 곳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La Mina에 위치해있다. 우리가 묶던 숙소에서 걸어서 1시간 거리여서, 어떻게 갈까 아내와 심각한 토론을 시작한다.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괜찮다는 젤라토 가게를 들려서 해안도로 근처에 있는 유명한 빠에야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갈 것인가, 아님 지하철을 타고 바로 갈 것인가. 결국 빠에야보다 강력했던 젤라토를 먹고 지하철을 타는 것으로 절충안이 타결됐다. 단 맛은 짠 맛보다 강하다.
고딕지구를 가로질러 가는 길만큼 Gocce di latte는 즐겁지 않았다. 어느 가이드북에서 바르셀로나 최고의 젤라토 가게라 했지만, 늘 명성은 경험을 깎아먹는 편이다. 개인적으로 쌀맛 같은 특이하거나 과일 맛 젤라토들을 선호하다 보니 초콜릿이 들어간 젤라토들은 기피하는 편이다. 덕분에 그 흔한 딸기 맛 젤라토도 없고 넛류 베이스가 주를 이루던 이곳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스탭도 로마나 베니스의 젤라토 가게보다 불친절했으니 뭐 할 말 다한 거지. 아이도 몇 입 먹다 바지에 잔뜩 흘리고 안 먹는다 선언하시어 졸지에 세 스쿱짜리 젤라토를 두 개나 먹어야 하는 사치를 누렸다. 부모는 늘 배부른 일이다.
Museu de Ciències Naturals de Barcelona는 El Maresme 역에서 5분 거리인데, 주요 관광지를 벗어나 해안도로를 인접해 제법 여유로운 도시의 느낌이 난다. 모던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1882년 한 사업가의 유지에 따라 만들어져 역사가 깊다. 스위스의 건축가인 Jacques Herzog and Pierre de Meuron의 설계에 의해 지어진 Forum building을 2011년부터 사용해왔고, Historical Botanical Garden of Barcelona 등이 합쳐지며 현재의 전시를 구축했다 한다. 삼각형 상부구조의 하층면은 지구의 표면과 지질을 형상화하여 아래에서 보았을 때 중량감과 초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입구 찾기는 꽤 어려운데,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야 입장이 가능하다. 거대한 삼각형의 박물관 건물을 비스듬히 띄우기 위해 열중하다 보니, 입구까지 버기를 밀고 올라가는 사람의 다리에 붙는 중력은 계산하지 않은 것 같다.
지구는 참 신비롭다. 수백만 년, 수천만 년, 수억만 년 전의 바람과 불과 공기의 기록이 고스란히 돌에 새겨진 압력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다만 4살이 아직 덜 된 아이에게는 그 신비가 빛나는 돌들과 덜 빛나는 돌들의 향연일 뿐이다. 존재론자인 아들은 그 돌들 사이를 누빈 거대 생명체에 유일한 관심이 있으나, 이 박물관의 전시는 이 유한한 존재에 관심이 그다지 없다. 하늘을 누비는 모사 사우르스 화석 하나가 잠시 눈을 끌뿐이다. 아이는 급기야 형체를 알 수 없는 동물뼈나 식물화석을 보고 스테고사우르스 화석이라는 둥 알로사우르스 뼈라는 둥 시뮬라시옹을 만들기 시작했다. 더 아이가 철학적이 되기 전에 서둘러 버기에 태우고 도망치듯 나왔다. 아, 가드닝 마니아 우리 아내는 여기서도 말려서 걸어놓은 나뭇잎과 꽃들에 흠뻑 빠졌다. 우리 셋 중에 가장 현실적인 것 같다.
박물관에서의 피곤함과 배고픔을 이기고 10년 만에 마주한 카사 밀라는 여전히 비현실적이었다. 10년 전 처음 봤을 때의 충격만큼은 아니었지만, 기형적인 발코니에 붙은 부조들과 건물 벽면에 흐르는 연속되는 곡선들은 낯설고도 불편했다. 사실 오지랖 넓은 불편함이었다. 얼마나 저 고집스러운 곡선을 건물에 부여하기 위해 추가적인 비용들이 쓰여야 했을까. 마케팅에 있어 ROAS (광고비용 대비 효과)를, 데이터 분석을 더 고도화할 때 ROI를 따져야 하는 내가 사는 세상과 참 다르다. 클라이언트가 만든 잉여의 tag 하나도 지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세계의 총 여유량과는 다르다. 가우디는 예전에 글을 쓴 적 있듯이 그가 사랑했던 어린 시절 바닷가의 해초의 유려함과 그 위 울렁이는 바닷물, 그 사이를 진자운동하는 나무뿌리들과 함께 표류했다. 그래서 내가 가장 카사 밀라에서 사랑하는 공간도 여전히 잉여인간처럼 부유하던 가우디의 세계를 조금 엿볼 수 있는 loft. 홀로 바닷가에서 마른 나뭇가지와 조개껍질, 솔방울을 들여다보며 균형과 완전함을 찾던 어느 마른 소년의 눈을 들여다본다.
귀납적이었던 가우디와 달리 끝없이 이 지루한 바르셀로나 여행에서 시뮬라시옹을 창조해 내시는 아이에게, 나는 새로운 오브제를 선물하기로 결심했다. 가우디가 평범하디 평범한 굴뚝들에 예수를 심문하던 병정들과 십자가로 채워 넣어 버렸다면, 연역적으로 '이 타일들이 공룡의 피부라면'이라는 가설을 부여했다.
사실 이 건물을 지은 할아버지가 공룡을 엄청 좋아했대. 그래서 여기 공룡들을 잔뜩 세웠대. 쟤는 안킬로사우르스고 쟤는 스피노사우르스야. 그지?
아이는 이미 스스로 박물관에서부터 최면상태였고, 가우디도 꽤 파충류들을 좋아해서 구엘공원의 심벌을 만들었으니, 전혀 틀린 말은 아니야라며. 계속 영국 집으로 돌아가자며 보채던 아이가, 신나서 쟤는 기가노토 사우르스고, 쟤는 티라노야 어쩌고 하며 뛰어다니는 것을 보며 드는 양심의 가책을 외면한다. 근데 집이 가장 좋은 아이와 낯선 도시로 여행을 오며 아이가 좋아할 것이라 생각한 나의 시뮬라시옹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