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하는 사르데냐 여름휴가기
영국에 살다 보면 한반도에서 가장 무더운 도시가 고향인 나도 다시 더운 곳이 그리워진다. 그것은 특히 2월이 심한데, 크리스마스를 지나고 부활절까지 휴일도 없는 무료한 일상이 흐린 구름과 반복되기 때문이다. 추격자처럼 나를 쫓아다니는 비와 턱없이 짧은 해에 지루함만 길어진다. 그럴 때 즈음 여름휴가 예약에 대한 욕구가 솟구친다.
처음 갔을 때의 감동보다 덜했던 그리스 Corfu 대신 아내는 맛있는 음식을 갈망했다. 그리스 음식이 맛이 없었다고 할 순 없다. 사실 우리는 매년 갔던 리조트 호텔 외에 그리스 음식을 먹어본 일이 없다. 친구가 그토록 추천했던 기로스도 먹어보지 못했다. 뜻밖의 예약 취소로 불시착한 이 호텔에 아이와 함께 하기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있었고, 그중엔 음식도 있었다.
코로나는 확실히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만든 것인가. 아내가 좋아하던 음식들에서 더 이상 풍미가 느껴지지 않았고 즐겨내던 와인도 이상한 냄새가 났다. 아내는 자주 실망감을 표현했다. 그렇게 아내가 우선순위로 꼽은 맛있는 음식과 좋은 날씨라면 사실 유럽에서는 선택지가 좁다. 한 번의 취소 소동을 겪고 내가 우연히 알게 된 사르데냐로 여름 휴가지가 결정되었다.
한 장의 사진이었다, 나의 시선을 끈 것은. 해변에서 보이는 섬이 조수간만의 차이를 만들고, 아이의 무릎 아래로 치는 파도. 작년 여름 한국에 갔을 때, 바다를 무서워하던 아이가 제주 협재 얕은 바닷물에서 행복하게 첨벙 대던 모습이 생생했던 내게 사르데냐 한 바닷가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우리가 사랑했던 Algarve의 바다들을 아이가 좋아하기까지 아직 십 수년이 남은 가운데, 사진 속 바다보다 아이를 행복하게 할 곳을 딱히 알지 못했다. 투스카니 어느 마을의 가장 간단한 바질 페스토 리조또에서 느꼈던 감동에 준하는 경험을 할 곳도 딱히 생각나진 않았다. 단 하나, 이탈리아 남자가 걸렸다.
이탈리아 남자란 누구인가.
이탈리아 남자라 함은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남자를 일컫는 말로 검짙은 갈색의 구불거리는 머리가 귓바퀴와 어깨 승모근 사이에 찰랑거리며, 구레나룻에서 이어지는 수염이 입가에서 연어처럼 솟구쳐 올라 코 아래에서 만나 넘치지 않으며, 뜨겁고 건조한 햇빛에 대지의 빛을 피부에 담아야 한다. 몬테풀치아노의 길에서 마주친 구릉처럼 깊은 눈동자에서 amore mio를 외치며, 한 여름에도 댄디하게 발목 위로 깨끗하게 다린 긴 바지를 입고 단추를 세 개를 풀어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야성미 넘치는 가슴털을 빗어 올려야 한다. 허리가 굽어져 더 이상 기력이 없는 나이가 되어도 집 현관에 놓인 신문을 허리를 굽혀 집을 때에도 인근 10미터에 보이는 아름다운 여성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며, 담배 연기 사이로 'buongiorno bella'를 건넬 수 있어야 한다.
반면 나와 같은 아시아 남자에게는 지나가는 개만도 못한 관심을 가져야 하며, 필요할 경우에는 가차 없이 무례하고 불친절할 수 있어야 한다. 죽고 싶지 않고서는 그의 딸을 데리고 갈 수 없으며,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결투장이 내일 내 방문 앞에 놓을 수 있다. 말문이 막힌 내게 이탈리아어로 욕설을 뱉으며 돈이나 뜯어내자고 속으로 생각할 수 있다. 친절한 알베르토 몬티와 같은 이는 신화 속 유니콘이다.
사실 카프리에서만 뿐이지, 나는 꽤 친절한 이탈리아를 남자들을 만난 적이 있다. 아내 직장 동료의 홈파티에서 만난 멋지게 생긴 건축가 친구도 있었고, 투스카니 여행에서 만난 호텔 사장은 다른 도시에서 겪어보지 못한 친절함으로 투스카니에서 돌아봐야 할 도시들을 안내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카프리 블루라군 보트 투어 중, 잘 못 알아들었다고 어깨를 눌러버리며 욕설을 뱉었던 이탈리아 남자에 대한 반대급부로 형성된 낮은 기대치 때문인지 알 수 없다. 늘 의외성은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사르데냐에서 만날 사람 중 절반일 이탈리아 남자는 여전한 경계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따뜻한 이탈리아 남자라니. 이 무슨 아이슬란드에서 폭염으로 땀 흘릴 소리인가. 하지만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은 그것을 가능케 한다.
모든 부모가 그렇듯 아이로 기쁨도 얻지만 고통도 겪는다. 아이가 늘 아름다울 수는 없다. 어쩌면 미울 때가 있어서 더 아름다울 수 있다. 그것이 아이 같아서. 단조로울 수 있는 인생에, 이미 정형화되어버린 나라는 존재에 아이는 변화를 요구하고, variation을 만든다.
아내와 가끔 또는 자주 이야기하는 것이 아이가 아니면 우리가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을까, 라는 점이다. 아내에게 가장 가까운 동네 친구도 한 달 앞뒤로 태어난 아이들이 공통분모가 되었고, 내게 가장 가까운 직장 동료이자 친구도 같은 나이의 아이를 두고 이야기가 훨씬 풍성해졌다. 같은 nursery에 다니는 아이의 친구 아빠 엄마와 운동을 같이 하거나 play date을 하는 것도, 아이가 없었다면 할 수 없었을 일이다. 아이의 철없는 행동을 보고 스쳐 지나가는 동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웃음도 나 스스로 받기는 어려운 것이다. 아이는 그렇게 그의 존재로 우리를 둘러싼 공기들의 온도를 높여주었다.
이번에 이탈리아 남자에게서 받은 호의 역시 그러했다. 우리의 에어비앤비 호스트인 그는 공항에서 멀지 않은 숙소와 바다라, 차를 렌트하지 않은 우리에게 친절히 저렴한 비용으로 공항에서 픽업을 해주었고, 집으로 가는 내내 서툰 영어로 가는 내내 사랑스러운 그의 아내 로사에 대한 이야기와 사르데냐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늦은 체크인인데도 아이의 웃음을 보며 불편한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니 밤 9시가 넘은 시간. 아이와 우리 모두 저녁도 먹지 못하고 지쳐 있었다. 남국의 여름은 영국의 낮보다 따뜻한데 피로가 마음을 차갑게 할 즈음. 살라미, 멜론, 햄, 치즈, 와인, 샌드위치가 놓인 플라터를 놓고 기다리던 로사를 만났다. 사실 오는 동안 저녁을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이 많았다. 주변에 식당이 없었고, 마트는 걸어서 30분 거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사는 이탈리아 남자의 말처럼 정말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아이를 생각해서 플라터를 준비해주었고. 매일마다 구글 번역기로 아이와 우리가 불편함 점이 없는지 물으며, 체크아웃을 할 때는 아이에게 자동차 장난감을 선물로 주었다.
모든 여행이 끝난 후에 이탈리아 남자는 우리를 공항으로 굳이 바래다주었다. 하루 종일 다른 일로 고단했을 그가 저녁에 우리를 공항으로 배웅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땀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나타난 그는, 공항으로 가는 동안 사르데냐에서의 시간이 행복했길 바란다고 말했다. 마른 들판과 게으른 햇살을 지나 공항에 도착한 뒤, 큰 캐리어 2개와 작은 캐리어 하나를 밀고 가느라 낑낑거리는 나를 보고, 그는 차에서 내려서 공항 입구까지 짐을 옮겨주었다. 그 순간, 이탈리아 남자에 대한 나의 꿍한 정의가 모호해짐을 느꼈다. 아이 때문인지, 아이와 함께 여행하는 상황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영국에 사는 동양인 아저씨에게 사르데냐가 꽤 따뜻하게 느껴진 순간이었다.
아마 이번 여행에서 가장 와닿은 문장인 것 같다. 우리가 있었던 바닷가 동네에 하나 있던 슈퍼마켓에서 사르데냐에서 어떤 와인이 좋은가 찾아보던 중에 읽은 문장 - 사르데냐는 딱히 역사의 중심에 있어본 적이 없다. 사르데냐가 늘 이탈리아의 일부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로마제국 시절엔 아프리카 총독부 산하에 있었고, 딱히 독립을 위해 투쟁하진 않았지만 이슬람의 유럽 진출과 맞물려 우연히 독립도 했다. 중세엔 아라곤 왕국의 통치에 놓였다가 사보이아 공국과 합병하여 사르데냐 왕국이 되었으나 수도는 토리노에 있었고, 이름만 빌려줬다. 그 가운데 여러 와인이 들어와, Gallura 지방에 사르데냐 최초의 DOCG를 받은 와인이 나오기도 했다. 그런 만큼 그들은 그 찬란한 팍스 로마나의 중심에 있어본 적도 없고 (로마에서 350km 남짓), 심지어 그들 이름을 지은 왕국이 이탈리아를 제패할 때에도 잠잠히 지중해 어딘가에서 부유하고 있었을 뿐이다.
어쩌면 그것은 아이가 사랑했던 그 바닷가와 닮아있었는지 모른다. 맞은편 섬의 인력에 의해 하루 종일 잔잔한 파도만 치는 곳. 38도에 육박하는 온도에도 건조한 덕분에, 한국의 그 온도보다 힘겹지도 않은 곳. 강수량이 적당한 것인지, 길 이편저편에 피어난 정체 모를 분홍 꽃이 이곳이 지중해 연안의 어느 휴양지임을 짐작케 하는 곳. 관광지임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버기를 밀고 다니기에 불친절하고 낙후된 인도가 편만한 게으름을 증명하는 곳.
아이는 그곳을 만끽했다. 그 게으른 섬에서 뜻하지 않게 아침부터 부지런한 사람들이 아침 9시부터 파라솔을 펴는 바람에 근면한 한반도 출신 아빠는 8시 반에 해변에서 파라솔을 펼쳤다지. 바닷 바위 사이를 오가며 발톱이 빠진 왼발이 무색하게, 아이는 모래를 퍼 나르고 자신의 무릎 아래로 빛나는 바다를 즐거워했다. 아빠가 야심 차게 준비한 공룡 화석 발굴 장난감(?)보다 엄마가 잡아온 게와 조개, 소라를 보며 신기해했고, 엄마와 아빠가 만든 모래성을 1분 만에 파괴하는 파괴 왕으로서의 책임을 방기 하지 않았다. 오후면 바닷물이 차오르는 협재와 달리, 점심이 넘어도 편만한 파고 덕분에 아이는 점심이 늦어져도 괘념치 않았다. 엄마는 밥보다 놀이가 먼저인 아이를 아직 공감하진 못하지만 말이다.
오후면 버스를 타고 올비아 시내로 이동해 늦은 점심과 젤라또를 즐겼다. 우리가 좋아한 것은 사르데냐 특유의 Fregula라는 파스타였다. 작은 옥수수알 같은 파스타인데 특별히 맛이 있다기보다, 사르데냐에서 유래된 파스타인 만큼, 그 originality을 즐겼다. 투스카니에서 경험했던 어디든 심봉사가 눈 뜨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비싼 곳일수록 값을 했고 섬세했다.
"여기 동네 마르게리따 피자가 7 파운드 (만원 정도)인데, 거긴 5 유로야 (6천원)"
라는 나의 항변이 어울리지 않게 우리의 식사는 60 유로는 쉽게 넘겼다. 끽해야 파스타 둘에, 이삭이 메뉴 하나에, 물 한 병에, 나의 와인 한 잔이었는데도 말이다. 사르데냐는 역사는 잔잔한데 물가는 그 위 어딘가에서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더불어 이번 우리의 여름도 잔잔히 어딘가로 흘러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