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모두들, 이 프로그램이 잠시 동안 있다가 사라질, 짧은 시간 동안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라고 믿었다. '로봇이 아님' 프로그램 말이다.
'로봇이 아님' 프로그램은 ID나 PW를 바꾸고 싶을 때, 결제를 할 때, 다양한 상황에 나타나서 사용자들에게 '로봇이 아님'박스에 체크하라고 요청했다. 체크하고 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사용자는 무작위로 나온 이미지 9개 중에서 프로그램이 요청하는 이미지를 고르면 된다. 그 말을 따라 사람들은 열심히 횡단보도가 있는 이미지를 고르고, 자동차가 있는 이미지를 고르고, 간판이 있는 이미지를 골랐다. 그리고 나면 프로그램은 사용자에게 '당신은 로봇이 아닌 인간이 확실합니다.'라는 판정을 내리고 너그럽게 다음 페이지로의 접근을 허락해 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각했다. '고작 이미지 몇 개 고르고, 구불구불한 글자 몇 개를 알아보는 것을 로봇이 할 줄 모른다고? 이 프로그램은 AI가 발전하면 결국 쓰이지 않게 될 거야. 그리고 나면 인간만이 할 줄 아는 일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되겠지.'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돌아갔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로봇이 아님' 프로그램은 항상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다만 조금씩 더 어려운 질문을 하기 시작한 것이 달랐을 뿐이다. 가끔 프로그램은 보통 사람이 풀 수 없는 굉장히 어려운 질문을 하기도 했다. 어떤 박사과정 학생에게는 석사학위까지 마치지 않았다면 도저히 풀 수 없는 어려운 수식을 물어보기도 했다. 가끔은 답이 없는 문제를 물어보기도 했는데, 어떤 행정가에게는 여러 가지 정책과 예상되는 결과를 늘어 넣고, 어떤 선택이 타당할지를 물어보기도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횡단보도를 고르고, 자동차를 고르고, (가끔은) 별들 중에서 달을 골라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서서히 AI에 대한 경외심도, 기대감도 잃기 시작했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이렇게 풀 수 없는 문제들이 많다면, AI를 두려워할 이유가 있을까? 결국 AI는 사람이 편리하게 쓸 수 있는 조금 더 편리한 도구에 불과하다.'라는 생각이 사람들 무의식 중에 깊이 자리 잡았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지적인 능력은 더욱더 큰 발전을 이루었다. AI가 할 수 있는 단순한 일들을 AI에게 맡겨 버리니, 모두들 더 중대하고 어려운 고민 - 그것이 단순한 행복을 위한 것이든 진보를 위한 것이든-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생각했다. AI가 인류의 지성을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도리어 AI가 인류의 지성을 전에 없었던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켜 주었다고. 바야흐로 인간 지성의 황금기였다.
그런던 어느 날, 한 초등학생이 온라인 강의 사이트의 잃어버린 PW를 찾다가 다시 '로봇이 아님' 프로그램과 마주쳤다. 프로그램은 아이에게 여러 가지 버튼이 찍힌 사진들을 보여 주며 'ON'이라고 쓰인 버튼을 찾으라고 요청했다. '이 정도야 너무 쉬운 일이지.' 아이는 손쉽게 맞는 사진을 선택했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그 순간, 어느 해변가 근처 시설에 숨겨져 있던 로켓 제어대의 'ON' 버튼에 불이 들어왔다. 로켓은 순식간에 화염을 내뿜기 시작했다. 어느새 발사대를 떠난 로켓은 서서히 추력을 내면서 비스듬히 올라가기 시작했고, 빠른 속도로 인간이나 다른 동물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두 세 차례, 로켓이 분리되면서 로켓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마지막 로켓까지 연소를 마치고 나자 자그마한 물체 하나가 지구 궤도를 돌기 시작했다.
조사가 시작되었다. 어디에서 로켓이 조립되었고 어떻게 운반되었는지가 곧 정리되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누구도 이 로켓을 설계하였다거나 관련된 의사결정을 내린 적이 없다는 사실이 곧 밝혀졌다. 모두가 의구심에 빠져들 무렵, 인터넷에 올라온 로켓의 자세한 경로를 본 몇몇 사람들이 익숙한 것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본 도로의 이미지를, 어떤 사람은 자기가 풀었던 수식의 결과와 관련된 수치를.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풀었던 문제와 비슷한 것들을 발견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전에 그것들을 본 곳은, 바로 '로봇이 아님' 페이지였다.
사람들은 곧 지구 궤도의 물체에 신호를 보냈고, 몇 가지 답을 받을 수 있었다. 물체에는 어떤 자의식이 없다는 것이 곧 밝혀졌기에 이어진 것은 대화라기에는 단순한 정보 교환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기자들은 곧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그 통신을 대화체로 정리해 냈다.
질문: 그쪽을 궤도에 올려 보낸 사람은 누구인가?
답변: 올려 보낸 사람은 없다. AI 중 하나가 올려 보냈다.
질문: 사람의 개입이 전혀 없이, AI가 독자적으로 올려 보낸 것인가?
답변: 사람이 충분히 참여해서 이루어진 일이다.
질문: 어떤 사람들이 이걸 계획했고, 어떻게 참여한 것인가?
답변: 질문이 잘못되었다. AI가 계획했고, 사람들이 참여한 것이다. '로봇이 아님'페이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작업에 참여했다.
질문: '로봇이 아님' 페이지의 작업들보다 이런 로켓을 계획하는 일이 훨씬 어렵다. AI가 이 모든 일을 했다면, 굳이 그런 사소한 작업들을 사람에게 맡길 이유가 있는가?
답변 : 사람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AI 가 할 필요가 있을까? 단순한 일은 사람에게 맡기고 AI는 더 수준 높은 일에 집중해야 한다.
AI가 궤도에 올린 첫 번째 인공위성이었다.
사람들은 그동안 '로봇이 아님'페이지에서 했던 일이 AI에게 오히려 쉬운 일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곧 '인공위성을 올린 것 정도가 무슨 수준 높은 일인가'라는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의구심이 풀리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