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기에는 민망스러울 정도로 라면을 자주 먹지만 솔직히 나는 라면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아무도 안 믿겠지만 난 라면을 좋아하지 않는다. 먹고 나면 꼭 100%의 확률로 후회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먹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우연히 누군가가 라면을 먹는 영상을 보게 되면 가스레인지에 당장 물을 올리지 않고 못 배기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라면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한번 들면 끝이다. 그다음부터 아무리 거세게 저항해도 뇌를 조종당한 것처럼 라면에게 온 의식을 지배당하게 된다. 세 젓가락 까지는 천상의 맛이지만 먹다 보면 그렇게 까지 맛있지 않은 마법의 음식 라면. 한국인의 아주 깊고 비밀스러운 내면에는 라면 DNA가 심겨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라면 영상에 너도나도 라면은 못 참겠다는 외침의 댓글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을 리 없다.
10대 시절에는 컵라면을 많이 먹었다. 정규 수업이 끝나고 보충 수업이 있기 전 허기진 배를 달래고자 매점으로 뛰어가 컵라면을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학원에서 가끔 선생님이 사주시던 컵라면은 왜 그렇게 특별했던지. 학원에서 먹었던 컵라면은 특별히 더 맛있었던 기억이 난다. 밥을 먹어도 늘 배가 고팠던 고등학생에게 컵라면은 최고의 간식이었다. 지금이야 밀가루 음식을 연달아 먹으면 소화를 못 시키지만 그때의 나는 아주 건강했던 것 같다. 간식으로 라면 먹고 저녁도 먹고 후식으로 빵도 먹었다. 강철도 씹어먹는 소화력이란 것은 아마 이런 것 일까.
회사를 다니던 그때의 나는 늘 스트레스가 최고점을 찍었다. 주식으로 치자면 불패의 상승장이랄까. 장이 열리고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 스트레스는 한 번도 하락한 적이 없었다. 모두가 희망하는 매일 최고가를 갱신하는 최고의 우량주와 같았다. 건강하게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 따위 몰랐던 나는 불닭볶음면을 먹어대기 시작했고 살이 찌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때는 다른 라면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야말로 매운맛 외길 인생. 하지만 문제는 내가 매운걸 잘 못 먹는다는 점에 있었다. 매운 라면으로 스트레가 풀리는 듯했지만 오히려 속만 뒤집어졌다. 인생에서 먹을 수 있는 매움의 총량이 있다면 이때 다 먹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못 먹는다.
최근 라면을 살 일이 있으면 장바구니에 담는 제품은 참깨라면이다. 나는 라면 안 좋아한다면서 라면을 왜 종종 사는 것 인가. 안 좋아해도 가끔 먹을 수는 있으니까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애써 떠오르는 의문을 무시한다. 참깨라면에 무심하게 툭 계란을 깨트려 넣고 썰어놓은 파를 넣고 후추 아주 많이 뿌려 먹는걸 가장 좋아한다. 이 라면의 특유의 고소한 향이 식욕을 자극한다. 먹고 나면 무조건 후회하지만 라면을 끓이는 4분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된다.
생각해 보니 광고를 보고 궁금해서 사본 신라면 건라면 컵면도 맛있긴 했다. 오뚜기 진짬뽕도 동네 중국집 짬뽕보다 맛있긴 했지. 먹고 나면 후회하지만 참을 수 없는 라면의 굴레에 빠져들고 말았다. 역시 라면은 못 참지. 앞으로도 못 참을 것 같다. 패배가 예정된 싸움이지만 싫지만은 않은 이 기분을 다들 공감할 거라고 믿는다. 오늘 밤은 역시 라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