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시대 혹은 고조선 시대에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느껴지는 몇몇 순간이 있다. 옛날에 태어났으면 별다른 방법 없이 죽어야 했겠지만 의료기술 발전의 혜택으로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때, 상하수도 시스템의 발명으로 쾌적한 삶을 누릴 수 있을 때, 그리고 좋아하는 후추를 마음 것 뿌려 먹을 수 있을 때 나는 현대 사회에 살 수 있어서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낀다.
세계사 시간에 배운 내용을 더듬어 보자면 예로부터 후추는 매우 귀한 향신료였다. 후추를 구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항해를 떠났고 후추를 얻기 위해 큰 금액을 지불해야 했다. 그러니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후추를 맛볼 수 있는 지금 이 시대는 조금 부풀려서 후추의 전성기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후추가 너무 좋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설렁탕에 파를 잔뜩 넣고 후추를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뿌려서 먹으면 천국이 따로 없다. 라면에 뿌려먹을 때에는 꼭 후 첨으로 후추를 뿌려서 먹는다. 라면을 끓일 때 후추를 넣는 것보다 탱글한 면발에 따로 후추를 듬뿍 뿌려서 먹는 방법을 선호한다. 경양식 돈가스와 함께 나오는 수프에 후추를 마구 뿌려야 맛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 것이라고 믿는다. 오일 파스타, 토마토 파스타 할 것 없이 통후추를 드륵드륵 갈아 뿌려 넣으면 풍미가 향상된다. 스테이크에도 후추는 빠질 수 없다. 후추와 합이 잘 맞는 음식은 꽤 많지만 하나하나 다 열거하자면 끝이 없으니 이 정도에서 예시를 마무리하겠다.
과거의 황금과도 같은 가치를 가졌던 후추를 마음껏 뿌려 먹는 사치를 부리고 있노라면 웃음이 나온다. 만약 내가 돈 많은 귀족이었다면 후추를 구하기 위해 집안의 기둥을 뿌리 뽑았을 것이다. 반대로 가난했다면 후추는 어떤 맛 일까 궁금해하며 후추를 먹는 귀족들을 부러워하지 않았을까. 가난했다면 애초에 후추를 접할 기회가 없어서 부러워하지 않았을 확률이 더 높겠지만.
내 개인적인 사랑과 더불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듬뿍 받는 향신료 후추. 앞으로도 계속 식탁을 풍성하게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왜냐면 후추는 너무 맛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