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 가면 런던 보이즈의 런던 나이트를 듣자
런던에서 런던 나이트(London Nights) 듣기
말장난 같은 버킷리스트를 나름 진지하게 적던 때가 있었다. 2년 전, 친구 S와 함께 유럽여행을 준비할 때다. ‘유럽여행가기’는 그 자체로 버킷리스트였지만, 그 여행길에서 꼭 하고 싶은 것들이 따로 또 있었다. 이를테면 런던에서 런던 보이즈 노래 듣기, 피렌체에서 <냉정과 열정사이> 읽기, 바티칸에서 한국으로 엽서 보내기 같은 것들. 버킷리스트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민망한, 소박하고 촌스러운 ‘Want to do’ 리스트였다.
4개월 동안 주중엔 인턴을, 주말엔 아르바이트를 하며 여행 자금을 모았다. 쉬는 날 없이도 지치지 않고 일할 수 있었던 건 떠나고 싶다는 간절함 때문이었다. 인턴 생활이 끝나자마자 바로 떠났으면 좋았겠지만 당시엔 복학이 먼저였다. 학교 다니는 동안, 통장에 있는 돈을 최대한 아껴 써가며 틈틈이 비행기 티켓을 끊고 숙소를 예약했다. 시험과 과제, 팀플로 지쳐가던 일상 속에서 ‘유럽여행’은 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밤새워 PPT를 만들고 시험공부를 해도 괜찮았다. "왜냐면 난 종강만 하면 유럽으로 도망가서 개 쩌는 한 달을 보낼 거니까!"
밤 비행기로 한국을 떠난 지 14시간 만에 영국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주변이 온통 ‘외국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렸을 때 비로소 여행이 시작 됐다는 게 실감났다. 물론 그곳에서 외국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나였다. 한국말로 실컷 떠들어도 아무도 못 알아듣는 새 환경이 낯설고 신기했다. 이방인이 된 그 느낌이 싫지만은 않았다. 비행기에서 잘 먹고 잘 자서인지 아님 밤새며 학교 다니는 동안 의도치 않게 지구 건너편 시간에 맞춰 살아서인지 시차 적응은 어렵지 않았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꾀죄죄한 몰골을 정돈한 뒤 밖으로 나섰다.
첫날 첫 일정은 런던 시내 나이트 투어였다. 피카딜리 서커스를 시작으로 트라팔가 광장, 런던아이 일대를 걸어 다녔다. 처음 본 런던의 밤 풍경은 뭐랄까, 엄청 화려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단정했다. 이게 무슨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소리인가 싶지만 정말 그랬다. 무엇이 이런 조화를 만들어내는 건지 궁금해질 때 쯤, 투어 가이드가 런던을 대표하는 세 가지 빨간색을 찾아보라고 퀴즈를 냈다. 정답은 거리 곳곳에 놓인 빨간 우체통과 빨간 전화박스 그리고 시내를 오고가는 빨간 2층 버스였다. 그제야 이해가 됐다. 화려한 색상으로 통일된 도시, 그것이 런던의 매력이었다.
투어를 마치고 피카디리 서커스에서 킹스크로스 역 근처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버스를 탔다. 난생 첫 유럽여행에서 느낀 이 새로운 감각들을 오래 추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 딱 노래를 들을 타이밍인 것 같아 S에게 말했다. “나는 런던에 오면 런던 보이즈 노래를 듣고 싶었어. 나중에 이 노래를 들으면 지금이 생각날 것 같아서. 같이 들을래?” S는 흔쾌히 자기도 같이 듣겠다고 했고, 우리는 사이좋게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눠꼈다. 이어폰에서는 경건(?)한 종소리로 시작해 빠른 템포로 넘어가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귀를 때려 박는 “런!던! 나잇!”이라는 가사를 들으며 실제 런던의 밤 풍경을 눈에 담았다. 왠지 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신나 보이는, 그래서 나까지 덩달아 신이 나는 밤이었다. 놀랍게도 여전히 이 노래를 들으면 이 모든 서술이 영화 한 장면처럼 머릿속에 그려진다.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청춘을 보낸 부모님 세대는 ‘롤러장’이라는 키워드로 이 노래를 기억한다. 실제로 런던 보이즈의 런던 나잇은 80년대 롤러스케이트장과 나이트클럽을 가득 메웠던 대표적인 음악 중 하나다. 에뎀 에프라(Edem Ephraim)과 데니스 풀러(Dennis Fuller) 두 멤버로 구성된 런던 보이즈는 1988년 첫 번째 앨범 더 트웰브 커맨드먼츠 오브 댄스(The Twelve Commandments Of Dance)를 내놓고 유로댄스의 상징으로 거듭났다. 런던 나잇뿐만 아니라 할렘 디자이어(Harlem Desire)나 레퀴엠(Requiem)도 차트 순위권에 오르면서 이들은 당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1996년 한 날 한 시에 비극적인 교통사고로 두 사람이 모두 숨졌고, 당연히 런던 보이즈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이들이 내놓은 앨범이 많지 않은 것도 그래서다.
런던에서 새 기억을 덧입히기 전까지 4분 3초짜리 이 노래에는 어린 시절 가족들과 함께 여행했던 기억이 담겨있었다. 이모부가 운전하는 지프차 뒷 자석에 동생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 ‘떼창’했던 것이 런던 나이트와 관련된 최초의 기억이다. 유치원생쯤 된 사촌동생과 나, 두 어린이들은 “Give a little love”를 “디비디비럽” 또는 “르블르블럽”이라고 발음하며 뜻도 모르는 노래를 열심히 따라 불렀다. 나보다 5살 더 어린 남동생은 그조차 발음하지 못해 “I-I-I wanna get up tonight!”에서 맨 앞부분 “아~아~아”만 따라 흥얼거렸다. 언제 어디서든 이 노래가 나오면 어른들은 어른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신이 났다.
한 음악에는 그것을 즐겨 듣던 때의 상황과 감정이 담긴다. 90년대생인 나는 런던 나이트을 들으며 어린 시절 추억과 생애 첫 유럽여행에서의 감각을 떠올리고, 60년대생 엄마는 같은 노래를 들으며 롤러장에서 신나게 춤을 추던 당신의 20대 시절을 떠올리듯이 말이다. 따라서 좋은 기억을 오래 간직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기억하고 싶은 소중한 순간에 노래를 듣는 것이다. 여기에 사진과 글이 더해지면 기억은 더 생생하게 박제된다. 여행할 때 나름의 테마곡을 만들어 듣는 건 그래서 재밌다. 지금껏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면 제주도에 가서 <제주도의 푸른 밤>부터 한 번 들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