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 필링스』를 읽고
코로나 확진자가 대폭증하던 시기. 방이 3개뿐인 집. 가족 5명 중 2명이 코로나에 걸렸다. 언니와 남동생이다. 고위험군인 아빠는 연구소로 피신해있다. 남동생은 방 문짝이 없어 내 방에 머물고 있다. 언니도 자신의 방 안방에 있다. 엄마는 방 없이 거실에서 지냈었는데, 거기서 나도 이틀 째 같이 지내고 있다. 집의 소유주는 엄마로 되어 있는데, 엄마 혼자 자기만의 공간이 없다. 이상하고 부당하지만 내 방을 내주고 싶지는 않았기에 별 말 꺼내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그러다 코로나 때문에 반은 공용, 반은 엄마의 공간에 24시간 함께 있게 되었다.
방에 있을 땐 상 차리는 소리가 들려도 모른 척할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집안일을 안 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성평등을 외치며 아빠와 10여 년 간 싸워온 되바라진 딸 아니던가. 엄마는 아무에게도 집안일을 시키지 않고 싫은 소리를 하지 않고 묵묵히 일을 한다. 삼시세끼 언니/동생/엄마와 나 3개의 밥상을 나누어 차렸고, 아빠의 도시락까지 쌌다. 이 기간 동안 다른 건 못해도 설거지만은 하자고 다짐했다. 언니와 동생이 코로나에 걸린 이 기간 만이라도.
한 바가지 쌓인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의 낮은 책상에 앉아 책을 폈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 캐시 박 홍이 쓴 논픽션, <마이너 필링스>. 그동안 겪어온 인종주의와 그 안에서 무해한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면서 살아온 감정을 서술했다. 코로나 이전에 쓰였고, 코로나 직전에 출간되었다. 시대적 절묘함과 맞물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작가는 차별 앞에서 이상하고 미묘하고 치졸해지는 감정을 정확하게 묘사했다. 제목이기도 한 ‘마이너 필링스’라는 용어가 참 적절하다. 눈앞의 장면을 보고 느껴지는 이 불쾌함은 피해의식 때문인가, 쓸데없이 예민해서 인가. 혹은 본능적인 알아챔인가. 내 앞에서 비행기 짐을 내려주는 이 멕시코인이 원래 친절한 것인지, 그럴 수밖에 없는 삶 속에 살아왔는지. 나를 밀치고 사과 없이 지나가는 백인 남성이 원래 싸가지가 없는지, 그래도 되는 삶에 살아왔는지. 하루 종일 과대망상일 뿐이라며 자신을 달래고 구박하다가도 여지없이 또 구조적 차별을 목격하고야 만다. 옮긴이는 책의 끄트머리에 “저자의 글에 묻어나는 여러 가지 세밀한 감정들,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 체험하는 분노, 좌절, 불만, 우정, 애증, 고집, 자기 회의, 양가감정, 투지 등이 마치 내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라고 소감을 적었다. 옮긴이는 미국에서 오래 일한 경험이 있고, 스위스인 남편과 결혼했다. 그런데 외국에서 제대로 살아본 경험도 없는 나에게도 내내 생생했다. 끝없이 감탄했다. 마음에 드는 구절을 골라 필사를 하느라 읽는데 2배의 시간이 들었다. 그 표현들이 한국에서 살아온 내가 지금 가진 답답함과 마음속의 불편감을 설명해주었다.
설거지가 그랬다. 나는 집안일을 하지 않는 아빠와 싸우면서도 정작 똑같이 아무것도 안 하는 철없는 딸이다. 과연 아빠와 다를 게 무엇인가. 그다지 살갑지도 않아서 엄마와 데면데면한다. 남동생은 쫑알쫑알 엄마한테 모든 걸 이야기한다. 엄마를 더 기쁘게 하는 건 내 싸움보다는 동생의 수다 같다. 남동생은 자기 입을 옷을 다림질하고, 빨고, 정리한다. 내 것은 엄마가 해준다. 동생은 페미니즘을 싫어한다. 여성의 날 다음 날 있었던 대선에서 가족들은 모두 한 사람을 뽑았다(그 사람은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지난 대선에서는 3번을 뽑았던 엄마가 동생을 적극적으로 부드럽게 설득했다. 내 말은 씨알도 안 먹히고 반발만 일으킬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조용히 했다. 책에서는 인종적 순수는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아는 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상태”라고 했다. 동생은 순수하고 무해한 걸 좋아한다. 싸움을 싫어한다. 그러나 싸우지 않아도 되는 상태인 건 아닐까? 엄마는 결국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동생을 다정하게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렇게 꼭 착하고 무해하게 움직여야 하는 건가?
대선 당일 치열한 개표 결과에 하루 종일 채널을 돌려가며 방송을 보았다. 등장인물은 거의 남자뿐이다. 주요 후보도, 패널도, 진행자도. 높은 자리에 여자는 너무 드물다. “죄다 남자들 뿐이네.” 내가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들렸으면 하는 크기로 말한다. 아빠나 동생은 별말 없이 넘어간다. 그럼 나는 또 작게 계속 중얼거린다.
엄마를 돕고 싶다. 아니 해방시키고 싶다. 이런 표현은 나의 오만인가? 말할 자격이 없으면 조용히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말을 할 자격을 갖추고 모범부터 보여야 하나? 그러기에는 너무 피곤하다. 나는 착한 딸은 아닌 듯하다. 자존감이 끝없이 부서진다. 성질을 내며 설거지나 할 뿐이다. 엄마 말고는 아무도 코로나로 생긴 집안일을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에 분노하면서. 나는 알아차렸다는 것을 고작 설거지로 뽐내면서. 이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또 온갖 생색은 다 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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