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석·박사 선생님들과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며 자기소개를 했다. 그중에는 내가 졸업한 대학교의 학과 전공을 하는 박사과정 선배님도 계셨다. 지도교수님의 성함을 여쭈었더니, 학부생 시절 개인적으로 종종 상담을 부탁드렸던 교수님이어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사실 이 정도는 국내 대학원이 워낙 좁아 충분히 일어날 만한 일이다. 헌데 이분과의 인연은 더 깊었다. 오랫동안 극단 생활을 해오셨다는 걸 알게 되었고, 나도 연기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던 중 얼마 전 영화를 찍으며 섭외했던 남자 배우님이 떠올랐다. 연극계에서 터줏대감으로 유명하다는 기사를 봤었고, 이분이라면 잘 아실 것 같아 조심스럽게 그 배우님의 성함을 여쭈어 보았다. 그러자 그분이 깜짝 놀라며, 본인이 그 극단 소속이라고 하셨다. 연극과 영화와는 전혀 다른 전공의 워크숍을 위해 올라온 서울에서, 얼마 전 촬영을 위해 모셨던 배우님이 속한 극단의 배우님을 만나다니, 참으로 놀라운 인연이었다. 그리고 만날 일이 종종 있을 걸 예감하며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과거에는 학연, 지연, 그리고 모든 인연이 만들어내는 불공정함과 비도덕성에 분노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관계들이 불평등을 초래하고, 정당한 경쟁을 방해하며, 사회 정의를 훼손한다고 느꼈다. 나는 오랫동안 이러한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법의 절대적 공정성을 주장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사람보다는 법이, 폭력보다는 법의 지배가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법의 절대적 공정성이 때로는 현실을 왜곡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인간 사회는 복잡하고, 사람 사이의 관계는 단순히 법으로 재단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과 경험들로 이루어져 있다. 법은 그 자체로 중요하지만, 그것이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어가는 건 사회가 잘못 흘러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공정성은 법의 준수뿐 아니라, 그 법이 적용되는 사람들의 상황과 맥락을 고려해야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법과 사람, 그리고 그 사이의 관계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법의 지배는 분명 중요하지만, 그것이 인간적인 면모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를 이어주는 인연과 관계들의 가치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결국 세상의 대부분의 일은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이다. 대부분의 관계는 온정과 신뢰를 기반으로 형성된다. 특히 보상이 적은 노동 혹은 창조적 작업의 현장에서는 더 쉽게 온정적 관계를 맺는다. 이런 관계들은 계약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대부분 서로의 흥미와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온정적 관계로 형성되어 있다. 물질적 이익보다는 각자의 흥미와 가치관을 공유하고, 자아실현을 도모하는 데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의 필요를 이해하고, 힘든 시기에 도움을 주고받으며, 소속감을 느낀다.
영화와 연극을 하는 현장은 열정적이면서 곤궁하다. 그래서 사람에게 더 많이 의존한다. 서로가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당기며 서로를 돕고 기억하며 앞으로의 기회를 암묵적으로 약속한다. 그러나 지나친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 인연이 결과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걸 경험을 통해 터득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인연의 역할은 기회의 문 앞까지 데려다주는 데 까지다. 그리고 그 기회의 문을 여는 데서부터 문 안에 들어가 헤쳐나가야 할 난관들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하지만 대부분 그 기회의 문이 보이길 고대하고 있거나 때론 자신에게 온 기회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의 상태로 머물러 있다.
모든 삶의 현장이 이 두 가지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걸 살면서 터득한다. 우아하고 고고한 직업은 없고 그런 삶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인연을 만나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를 이어나가야 하고 그 관계들에 항상 감사함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인연에 기대어 엄청난 결과나 보상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연을 맺게 된 것에 감사하고 그분에게 도움을 받거나 줄 수 있음에 감사하고 나중에 닿을 인연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럴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 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으로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되어
다시 만나랴
- 김광섭, 「저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