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단 2명의 배우
조감독을 맡고 가장 우선 해야 할 일은 주연 배우들을 뽑는 일이다. 오디션 지원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래도 조금은 배우를 보는 눈이 있지 않을까 하는 다른 팀원들의 기대를 보았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필름 메이커스에 배우 모집글을 올렸고, 올린 지 10분도 채 안되어 지원자가 나타나더니 그 수가 점점 늘어났다. 매일 저녁에 배우 프로필을 꼼꼼히 검토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모니터를 덮으려는데, 도착한 프로필.
필자와 함께 연기했던 친구의 프로필이다. 기분이 묘했다. 어쩌다 일 년이 지난 시점에 필자는 연기 공부를 같이 하던 친구의 프로필을 받고 있고, 그 친구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열심히 연기를 하고 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 친구의 프로필을 얼른 들어가 보았는데, 일 년 동안 꽤나 다양한 작품에서 활동한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그걸 보며 나의 과거를 반성했고 동시에 그 친구를 뽑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감독이 원하는 이미지에 적합하지 않았기에 후보에 올릴 수는 없었다. 영화하는 일뿐만 아니라 많은 일들이 이런 식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인맥 혹은 추천으로 이루어지는 영역도 분명히 있을 테지만 할 수 없는 부분이 더 크다. 운이 좋아서 이미지가 맞아떨어져서 후보에 올려두었다고 해도 감독 마음에 드는 다른 배우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저녁이 되어 메일함을 들어가 보니 100명이 넘는 배우의 프로필이 와있었다. 이들의 프로필을 하나하나 꼼꼼히 보는데, 정말 예쁘고 매력 넘치고 경력이 화려한 배우들이 많았다. 그리고 배우의 무기는 경험이라는 말이 있듯이 개인적으로 40대 배우들이 가진 눈빛은 20대 배우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깊이와 사연이 있었다. 그래서 눈길을 끄는 배우들이 정말 많았고, 이들의 독백 연기영상 또는 출연 영상을 보는 일은 내게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하지만 프로필 속 얼굴과 달리 비교적 영상에서 매력이 떨어지는 배우들도 있었는데, 대부분 그들이 가진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는 연기여서 그랬다. 예를 들어, 프로필에서 돋보인 게 깊은 눈매였다면, 영상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기대하고 마련인데 기대와 달리 우리나라 드라마나 영화에서 40대 여배우를 클리셰 적으로 활용하는 역할(푼수 아줌마, 억척스러운 아줌마 등)의 독백을 보게 되었다. 아쉬웠다. 그들이 선택한 전략의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결코 그들의 매력을 담을 수 있는 그러한 내용은 아니었기에.
반면에, 10- 20대 배우들 중에 눈에 띄는 매력은 단연코 자연스러운 미모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역할이 학생이니만큼 학생에게 기대되는 그런 순수함을 찾게 됐다. 물론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배역의 성격에 들어맞아야겠지만 기본적으로 꾸밈없는 눈과 색을 가진 가진 배우에게 눈이 갔다. 경력이 적고 프로필 구성이 조금 이상하다 해도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화면에 이들이 나왔을 때, 포토제닉 할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일단 자연스럽게 연기 영상까지 보게 되었다.
그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한 배우가 있었다. 이 배우의 외모가 지금 역할에 부합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럼에도 계속 보게 되는 그런 배우였다. 나는 그 배우의 연기 영상을 3번 정도 돌려 본 것 같다. 프로필과 영상은 심플했다. 어떤 측면에서는 외모도 평범한 축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왜 이 배우의 얼굴을 기억하게 되었을까? 이유를 생각해 봤지만 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근거를 찾아가 보자면 우선, 이 배우의 사진 속 미소와 표정이 자연스러웠고 조화로웠다. 그리고 영상에서 얼굴과 목소리의 합이 조화로우면서 담백했다. 이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연기 영상이 영화적이었다. 이 말은 오해가 생길 여지가 있어 영화적이라는 말을 사적으로 풀어본다면, 인물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귀 기울이게 되어 정작 이 배우가 가진 외면적인 것들이나 연기 양식엔 관심이 가지 않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영상이 시작되자마자 영상 속 배우의 목소리나 외모를 보게 되는 게 아니라 인물로 보였고, 그 인물이 나에게 말을 걸고 대화를 간접적으로 요청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이 배우가 이 짧은 영상으로 어떻게 그걸 구현해 냈는지 알 방법은 없다. 달란트일 수 도 있고 고도의 전략일 수 도 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런 매력적인 배우도 이 영화에서 추구하는 배우의 이미지가 아니면 뽑힐 수 없다는 사실을. 또 반대로 생각해 보았다. 이런 배우가 권위 있는 조감독 혹은 감독의 오디션에 참가한다면 분명 이들의 리스트에 오를 거라는 걸.
백 개의 이메일을 수합하고 그다음 날 저녁에 다시 메일함을 들어갔다.
안 읽음 메시지가 다시 100으로 채워져 있다.
오늘은 어떤 매력적인 배우를 만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