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음악을 공부하며 가수를 꿈꾸던 후배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대화의 주제는 주로 먹고사는 이야기. 후배는 대중에게 자신과 음악을 알리기 위해 수고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학교에서 인기 있는 연주자였지만 사회는 음악으로 수익을 내는 방법이 극히 제한적이었나 보다. 서로의 근황을 묻고 그가 할 말이 있는지 쭈뼛거리다 "형, 저 이제 음악 그만하려고요."하고 뱉어냈다.
'음악을 그만한다.'는 말로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순 없지만, 나는 그의 말이 '음악 외 직업을 갖기로 했다'는 의미인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음대를 졸업하고 서른쯤에 이르는 친구들에게서 종종 듣는 말이었기에.
난 그 보다 5년 먼저 이 말을 주변에 전했다. 졸업 후 악기를 정리한 돈으로 취업하겠다며 서울로 상경한 나였다. 특별히 원하는 직업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나의 연주 실력은 경쟁력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때 난 부끄러웠고,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중도 포기한 것이 자랑할 일은 아닌 것 같아 졸업식은 가지 않았다. 음악을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무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유 없이 몸이 움츠러들었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 다닌 대학 4년, 전공을 살리지 못한 책임을 져야 했다. 적절한 핑계들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난 원래 음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라고 쿨 한 척 말하고 다닌다던가, "원래부터 공연 기획 일이 하고 싶었어."라는 거짓말을 일삼았다. 포기보다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용기 있는 사람으로 비치고 싶었다. 그것이 나의 가치를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빠가 되어서야 지난 노력들이 부질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고, 놀고, 먹기만 하는 아이. 돈도 없고 명예도 없고 가진 것이라고는 덜 자란 신체뿐인데도 내 안에 아이를 향한 사랑이 끝없이 솓았다. 그제야 사람의 가치는 행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린아이가 그렇듯 우리의 가치는 존재 자체에 있음을 말이다. 직업이 무엇인지, 돈이 얼마큼 많은지, 스펙이 얼마나 좋은지 등. 사회가 기대하는 기준들이 우리의 가치를 결정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빠가 되어서야 알았다.
'음악 그만하려고요.' 하며 쭈뼛거리는 후배의 마음이 이해되어 속상했다. 음악을 해도, 음악을 하지 않아도 우리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애써 핑계를 만들고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마음 졸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의 가치가 의심될 때 아이를 본다. 조건 없이 사랑받는 아이를 보면 나도 저처럼 소중한 존재였겠지, 그리고 여전히 소중한 사람이겠지 생각한다. 아직 말을 못 알아듣는 아이를 끌어안고 혼자 중얼거릴 때가 있다. "너는 아빠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야. 너의 삶을 살아. 남하고 비교하지 말고 스스로 가꾸어 가며 살아."
사는 날을 더할수록 나의 존재는 희미해진다고 느낄 때가 있다. 혹여 나와 같은 느낌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대는 귀하다. 그대는 존재함으로써 그대의 가치를 증명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