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우연히 전 직장 동료를 만났다. 반갑게 마주할 사이는 아니지만 눈이 마주친 이상 모른 척할 사이도 아니었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았다. 요즘 어디에서 근무하냐는 질문에 육아하고 있다고 답하니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왔다. “좋겠다, 쉬고 있구나. 나도 집에서 육아나 하고 싶다.”라던가.. 귀를 의심했다.
아직 미혼의 남성이니 육아에 대해 잘 모르겠지 싶다가도, 나의 일상을 전혀 알지 못하는 그로부터 평가받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했다. 육아가 얼마큼의 정신적 스트레스와 육체적 피로를 동반하는지 굳이 길에서 논쟁하고 싶지 않았다. 대화를 급히 마무리한 채 돌아섰다.
육아하는 삶이 간단하지 않다. 부모라서 행복하다가도 때로 부모라서 불행할 때가 있다. 고작 1년 육아를 계획한 나에게도 일어난 무의식 속 무시와 폄하. 남자보다 육아하는 경우가 많은 여자들은 이보다 많은 무시를 당하겠지. 아직 80년대 시대정신을 벗어나지 못한 사회에서 여자들에게 나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리 없다. 그 여자가 나의 가족이거나, 나의 친구이거나, 나의 아내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다.
고통을 기체 이동에 비유한 빅터 프랭클의 글이 떠오른다.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 공간에 들여보내면 아주 큰 방이라도 기체는 고르게 방 전체를 완전히 채운다고 한다. 사람의 고통도 이와 같다. 고통은 크기와는 무관하게 사람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세상 모든 사람은 각자 최대치의 고통 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신의 경험에 견주어 타인의 고통을 가늠한다는 것은 얼마나 오만한 일일까. 함부로 다른 이의 삶을 평가하는 것은 무례하고 미련한 일이다. 내가 그의 삶을 이유 없이 존중하듯 나의 삶도 이유 없이 존중받아야 한다.
말은 웬만해선 사라지지 않는다. 말에 상처받은 다분한 경력이 있는 사람도, 나이가 많아도, 신체 튼튼한 사람이라도 말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나도 말에 공격에는 조금도 방어 능력이 없다. 집에 돌아오는 길, 그와 나눈 말이 떠나지 않고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속으로 실컷 비난했다면 마음은 편했겠지만, ‘그래 뭐, 나라고 다를까.’ 싶어 그만두었다. 얄팍한 지식과 경험으로 세상만사 재단하고 살아온 것이 그이고 또 나 아닌가. 나는 오늘 깨달았으니, 그와 같은 실수하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