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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수샘의 장이불재 Apr 07. 2024

미나리 향기 나는 선배 교사가 되고 싶다

- 신규 교사시절, 미나리무침의 추억




  2002년 봄날, 나는 남양주시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신규 교사로 발령을 받은 그해에 나는 꾸러기들이 많은 1학년 담임을 맡았고, 연구부에 소속되어 30년도 넘은 낡은 도서관을 전산화하라는 특명을 받고 멘붕 상태에 빠졌다. 게다가 자리도 교감 선생님의 시선이 항상 목덜미를 찌르는 것처럼 따가운 본교무실의 정중앙, 센터였다.

  교육대학원에서 어렵게 교직을 이수하고  임용시험에 합격해서 기분이 좋았지만, 그런 기분은 딱 2월까지였다. 양복을 어색하게 차려있고 더 어색하게 교사용 교과서를 낭독하는 수준으로 가르쳤던 나였지만, 서른이 넘은 나이 때문인지 타고난 중후함(?) 때문인지 아이들은 내가 신규 교사라고 고백해도 "그런 농담은 더 재미없어요." 하고 쏘아붙였다.


  그랬던 일상이라 학교생활이 재미가 없었는데, 벚꽃이 하나둘 피어날 무렵에 '내일 국어과 모임을 학교 뒷산에서 합니다'라는 메시지가 날아왔다. 아이들이 동아리 활동을 하고 한 시간 일찍 하교한 날, 나와 또 다른 신규 여자 선생님 한 분은 다른 선배 교사의 뒤를 쫓아 영문도 모른 채 후문을 빠져나왔다. 30분 정도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니 학교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너럭바위가 있었다.  

  그곳에는 가장 연세가 많은 남자 국어 선생님 한 분이 대충 깔아놓은 신문지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막걸리 몇 병, 김치와 편육, 그리고 정체 모를 식물이 무서울 정도로 가득 담긴 대야가 가운데 놓여있었다. 어쨌든 우리는 둥글게 자리를 잡고 앉았고, 선배 남자 선생님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 같다.

  "오늘은 날이 너무 좋을 것 같아서 우리 학교 국어 선생님들을 초대하고 싶었어요. 몸에 좋은 봄 미나리를 무쳐드릴 테니, 조촐하게  막걸리 한잔하고 내려가요."

  정년이 몇 년 안 남은 고참 선생님은 본격적으로 대야에 준비해 온 양념을 넣고, 미나리를 계속 무쳐서 우리의 앞접시로 옮겨주셨다. 화수분 같은 대야에서 솟아나는 미나리무침을 신기하게 구경하던 장면은 생생하지만, 그 자리에서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하지만 그 모임 덕분인지 그 후로 다른 국어 선생님들도 나와 다른 신규샘을 만나면 힘든 일은 없는지, 속썩이는 아이는 없는지 물어보곤 했다.


  올해는 고3 수업 전담이고 비담임이라서, 같은 과목을 가르치는 한 분 외에는 다른 국어샘들과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렇게 3월을 보내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어느덧 나도 국어 교사 중에 최고참이 되었고, 국어과 대표를 맡고 있어서 더 그런 것 같다.  

  지난주에 점심을 먹고 운동장을 걷고 있는데, 학교 뒷산에서 살랑살랑 가지를 흔들며 피어나는 봄꽃들이 내게 손짓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그날 대접받았던 미나리무침의 향긋한 내음과 아삭한 식감이 떠올랐다. 똑같이 미나리무침을 대접할 수는 없지만, 내가 선배 교사에게 받은 만큼 후배 교사들에게 미나리의 소박한 향기 같은 작은 나눔을 실천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공식적인 협의회나 연수는 아니지만, 내가 자주 활용하고 있는 온라인 퀴즈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번개 모임을 제안했다. 지난주 수업공개 주간에 퀴즈앤을 활용한 모둠활동을 참관했던 2학년 국어샘이 퀴즈 프로그램에 관해 메시지로 물어본 것도 그런 마음을 먹은 계기가 되었다.

  하루 날짜를 정해서, 오전과 오후 한 시간씩 공강 시간에 국어샘들을 초대했다. 예습이나 복습을 위해 읽으면 풀 수 있는 문제를 출제하는 방법과 개인전과 모둠 대항전을 적절하게 섞어서 자연스럽게 협력적 배움이 일어나게 만드는 노하우를 말씀드렸다.

  번개 연수에 참여한 선생님들은 적극적으로 질문을 하고, 학생 입장에서 퀴즈를 풀어보면서 즐거워했다. 번개 연수를 마치고, 코로나 초기에 온라인 수업을 할 때 만들었던 예시 문항도 단톡방에 캡처해서 보내드렸다. 그리고 학교 예산으로 퀴즈 프로그램 이용권을 품의해서 사용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신규 교사였던 내게 미나리무침을 대접했던 선생님, 멀리서 학교를 내려다보면서 한숨 돌리게 해주었던 선생님은 이듬해 교직을 떠나셨다. "한 선생, 소주 한잔할까?" 하면서 부담을 주지 않았고,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면 수줍게 웃으며 지나가던 선생님이셨다.

  4월 말 1차 지필 고사 기간에 국어과 첫 회식을 하기로 했다. 작년에 교사 연구년으로 학교를 떠나 있어서 아직 어색한 선생님들이 대부분이지만, 내가 먼저 무리해서 이것저것 물어보지는 말아야겠다고 미리 다짐해 본다. 선생님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향긋한 미나리를 계속 무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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