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노엘 Mar 01. 2019

거지가 되더라도 울지 않기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 조지 오웰 



달콤한 곶감을 먹고 있었다. 우웩! 구역질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미 입 안에 들어간  곶감은 전혀 달달하지 않았다. 역겨운 신물이 계속 올라와 결국 곶감을 뱉고 말았다. 


침실 벽은 문둥병에 걸린 것 같고, 세탁한 지 3주일이 지난 시트는 거의 암갈색이었다. (중략)  구두약 같은 검은 때가 대야마다 줄무늬를 그리면서 단단하고 끈끈하게 달라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중략) 시트는 땀 냄새가 너무나 지독해서 코 근처로 올리면 견딜 수 없었다.(중략) 불결하게 가래를 끓다가 헛구역질을 하는 그의 기침 소리는 말할 수 없이 불쾌했고 뱃속에서 그의 내장이 휘젓는 것 같았다. 그가 성냥을 그었을 때 한 번 그의 모습을 보았다. 아주 늙은 노인이었는데 우푹한 회색빛 얼굴이 송장과 같았다.

 

조지 오웰이 1928년부터 1932년까지 겪은 밑바닥 '체험'을 바탕으로 쓴 첫 작품이라 책에는 부랑자들의 냄새가 실제로 풍겨 나는 듯한 묘사가 가득하다. 참기 어려운 냄새, 머리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들, 주정뱅이들이 게워낸 토사물, 더러운 회색빛 침구, 때가 둥둥 떠다니는 목욕물 등. 다시 생각해도 또 속이 안 좋다. 


상상만으로도 입에 있는 곶감을 삼키기 어려울 정도로 혐오스러운 장면들인데, 조지 오웰은 당시 상황을 낙천적으로 혹은 담담한 태도로 잘 견뎠다. 나라면 지옥으로라도 꺼져버리고 싶었을 텐데. 견딜 수 없는 추위와 배고픔과 무기력함 때문에 제발 내일 아침은 눈을 뜨지 않게 해 주세요, 기도하며 잠들었을 텐데, 조지 오웰은 그러지 않았다. 


가진 돈이 적으면 근심도 그만큼 적어진다는 것은 일정한 범위 내에서는 실제로 맞는 말이다. 통틀어 백 프랑을 가지고 있으면 겁에 질려 공황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런데 3프랑밖에 없을 때는 아주 무관심해진다. 3프랑으로 내일까지 먹게 되고 그 다음부터는 신경써지지가 않기 때문이다. 따분하긴 해도 무섭지는 않다. (중략) 가난할 때 커다란 위안이 되어주는 기분은 또 있다. 아마 돈에 쪼들려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경험을 했으리라고 믿는다. 그것은 이제야말로 진짜 밑바닥까지 왔다고 깨달을 때 느껴지는 기쁨에 가까운 안도감이다. 거덜 난다는 말은 자주 해왔지만 이게 바로 거덜 난 것이고 그런 판국인데도 견뎌내고 있다. 이런 기분은 많은 걱정을 덜어준다.   


그저 담담하게, 그는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접시닦이도 해보고, 살인적인 노동을 견뎌내면서, 요리사들에게 욕지거리도 실컷 먹어도 보고, 부랑자 친구에게 자신의 남은 빵 반 쪽도 나눠주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친구에게 돈을 빌려 몇 주를 버티기도 하면서. 이런 날도 있으면 저런 날도 있다는 태도로, 그는 배고픔도 견디고 추위도 견디고 모욕이나 불쾌감도 참아내었다. 마치 이 모든 것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해 볼 수 있는 값진 경험인 양.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없었고, 현재에 대한 한탄도 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지금의 장면 장면들은 단순한 소설 속의 소재에 불과하다는 듯이, 자신은 그 소설의 주인공을 바라보는 제3자일 뿐이라는 듯이. 


그가 이토록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파리와 런던의 노숙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지금 어울리고 있는 부랑자들과 나는 엄연히 다른 계층의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천재적인 재능을 미리 인지한 자신감 때문이었는지. 본인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이 참담한 일상을 손쉽게 탈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지. 그때는 지금보다 계층 간 이동이 자유로웠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는 비참한 현실을 스스로 비관하지는 않았다. 


반면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그래서 어떻게 해서 조지 오웰이 이런 생활을 청산하고 전 세계가 추앙하는 작가가 된 거지?, 조지 오웰의 밑바닥 생활은 언제 끝나지?, 무슨 계기가 있어서 이런 생활을 탈출하게 된 걸까?, 마지막 장면에서는 드라마틱한 반전이 나올까?, 내 인생은 언제 한 번 쨍한 날이 올까?, 거지 같은 생활의 청산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초조했다. 혁명적인 무엇인가를 기대하며 모든 걸 갈아엎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은 어서 빨리 책의 끝장을 보고 싶어 하며 성급해했다. 


허무한 끝 장면. 


내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난다. 변변찮은 이야기일 뿐이고 그저 여행 일기가 주는 흥밋거리쯤은 되었기를 바랄 따름이다. 혹시 무일푼이 되면 당신에게 이런 세계가 기다린다는 것 정도만은 말할 수 있겠다. 언젠가는 그 세계를 더 철저히 탐구하고 싶다. 우연한 만남이 아닌 허물없는 사이로서 마리오, 패디, 동냥아치 빌 같은 사람들을 알고 싶다. 접시닦이, 부랑인, 강변 둑길 노숙자의 영혼 속에는 정말로 무슨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이해하고 싶다. 현재로서는 가난의 언저리까지 밖에는 보지 못한 것 같다.


그는 마치 밑바닥 생활의 종결이, 나는 이렇게 해서 아침 식사를 마쳤다, 와 동일한 수준의 사건인양, 별것 아니라는 투로 지옥보다 못한 노숙자 생활을 간단하게 정리했다. 배신감이랄까, 실망감이랄까. 무언가 쨍하고 해 뜰 날을 위한 팁을 얻을 수 있을까 했던 나의 기대감은 와장창 무너졌다. 이게 뭐야? 정작 중요한 걸 알려줘야지?, 하는 원망스러움.   

그러나 한편 현재의 불행과 시련을
마치 소설의 한 페이지 정도로 받아들였던 그의 태도가,
마음에 다가왔다. 

이번 인생은 왜 이 모양이냐, 하는 체념은 아니지만 이런 인생도 있구나, 하는 담담함. 되는 대로 살자, 는 자포자기는 아니지만, 이런 인생을 겪는 것도 괜찮겠다, 는 대범함. 자신의 삶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본인 생의 불행에만 지나치게 집중하지 않았던 자신감. 언제고 다시 한번 최하층의 삶 속에 완벽히 빠져들어 보고 싶다는 넉넉함. 


난 너무 작은 곳에 매몰돼, 작은 것만을 바라보고, 작은 마음으로 너무나 큰 집착과 후회와 무력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헉헉거리며 넘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조지 오웰의 배포 정도는 있어야 밑바닥 생활이든, 감옥살이든, 억울한 누명이든, 모든 삶의 다양함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 조지 오웰이 아무렇지도 않게 부랑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그의 이런 담대한 면 때문이 아니었을까. 내 인생을 아무렇게나 방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문제로부터 한 발자국 거리두기. 갑자기 노숙자가 되어 더러운 거지꼴을 하게 되더라도 삶을 비관하며 울지 않기. 지금의 쓰라린 경험이 훗날 내 인생의 풍성한 양분이 될 거라고 대범하게 생각하기. 내 인생이 지금 이 모양 그대로 영영 굳어지는 것은 아니니 현재를 충분히 즐기기. 그래서 나도, 지금보다는 조금 더 큰 사람이 되기.



매거진의 이전글 매력적이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