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베이컨
128-129p.
베이컨 당신이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는 동안에 당신은 그 방향으로 더 멀리 나아가려 하고, 그리하여 당신이 예전에 만들었던 이미지를 파괴하는 때가 오기도 합니다. 그 이미지를 당신은 결코 되찾을 수 없지요. 그건 또한 미처 예기치 못한 어떤 것이 갑자기 나타나는 때이기도 하지요. 예고 없이 그것이 당신을 찾아옵니다.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는 알지만, 그림은 매우 유동적이어서 우리는 어떤 것도 기록해둘 수가 없지요. 가장 놀라운 일은 이렇게 거의 무심코 나타난 무언가가 당신이 하고 있던 작업보다 때때로 더 훌륭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항상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종종 옛날에 그렸던 그림들로 돌아가 작업을 계속하면서, 완성되었을 때보다 시작했을 때가 훨씬 더 좋았던 작품들을 나는 파괴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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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캔버스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에 대한 어떤 아이디어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는 동안 문득 그림 그 자체와는 상관없이 바깥에서,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이러저러한 형태들과 방향들이 어찌어찌하여 그냥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사건'이라 부르는 것이지요.
130p.
회화에서, 그리고 또한 아마도 다른 예술에서도 통제의 요소와 뜻밖의 요소가 늘 공존하고 있으며, 그러한 구분은 아마도 의식과 무의식이라고 정신분석학에서 정의했던 것으로 돌아가는 듯합니다.
133p.
내가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그토록 오랫동안 예술가들이 갖고 있다고 믿었던 어떤 종류의 영감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없고 말고요. 그것은 작품 그 자체로부터 나온 어떤 것이며, 뜻밖에 문득 나타나는 어떤 것입니다. 결국 회화란 그러한 사건들과 미술가의 의지 사이의 상호 작용, 혹은 당신이 좋아하는 표현대로 무의식과 의식의 상호 작용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당신도 알다시피, 당신이 사물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들은 충분히 명확해 보이지만, 당신이 캔버스 위에서 작업할 때 상황은 결코 그와 똑같지는 않지요. 그때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혹은 무엇보다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당신은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안개속에 갇힌 셈이지요.
135p.
지금 나는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은데, 어떻게 접근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수가 없군요. 그건 언제나 내게 문제였습니다.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알지 못할 것이다. 라고 늘 생각하지요. 그러자 나의 작품과 그림 그리는 행위, 사건 사이의 그 우연한 만남이 이루어지고, 그리고 나서 그림이 떠오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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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사실 화학에 더 가깝습니다. 실재들이 새로운 실재를 만들기 위해 혼합된 자연스런 현상이지요. 만일 신비라는 말이 이 세계의 밖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의미한다면, 거기에 신비는 없습니다. 회화에 관해 말하자면 모든 것은 바로 우리의 눈앞에서 일어납니다. 미술가의 작업실은 현자의 돌을, 즉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탐구하는 연금술사의 서재가 아니며, 그보다는 아마도 우리로 하여금 어떤 예상치 못한 현상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그만두지 못하게 하는, 화학자의 실험실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사실은 정반대인 거죠.
153p.
베이컨 나는 그리스 비극들, 특히 아이스킬로스Aeschylus나 셰익스피어shakespeare 같은 위대한 문학 텍스트들을 읽음으로써 자극을 받아왔지만, 그렇다고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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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작가들이 창조해낸 것들은 본질적으로 일종의 자극입니다. 그것들을 읽음으로써 나는 스스로 무언가를 생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일종의 흥분제며, 아마도 성적인 흥분과 유사한, 어쨌든 매우 강력한 어떤 것으로, 일종의 매우 강렬한 충동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충동이 나로 하여금 어떤 방식으로든 텍스트를 그림으로 설명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156p.
아솅보 그렇다면 당신에겐 다른 형태의 예술적 표현들과의 이러한 만남들이 아무런 흥미도 불러일으키지 않나요?
베이컨 정직하게 말해서 그건 정말로 나의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그러나 단지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지, 결국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실제로 문제가 되지 않지요. 중요한 것은 항상 무언가를 하는 데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다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의 인생에 의미가 있는 어떤 일을 애써서 성취했다면, 당신이 그것을 성취한 방법 그리고 당신 자신을 표현한 분야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는건 매우 드문 일이며, 만일에 당신이 성공한다면 그건 정말 좋은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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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대화>
169-170p.
베이컨 최소한의 수단으로 최대한의 것을 표현하는 데 성공한다면, 당신은 매우 우수하며 제법 신뢰할 수 있는 본능을 갖고 있으며, 그리고 매우 창조적인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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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베케트가 불필요한 것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가능한 한 많이 생략함으로써 많은 것을 말하려고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접근 방식은 흥미롭습니다. 평소 그림을 그리면서 우리는 늘 너무 많은 것을 그 속에 남기고 결코 충분히 잘라내는 법이 없지요. 그러나 나는 베케트의 작품에서 종종 그가 자신의 텍스트를 숫돌로 갈듯이 말끔하게 다듬으려 했기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고, 그리하여 마침내 그의 작품은 울림이 없고 완벽한 공허만 남지 않았나 하는 인상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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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대한 베케트의 생각들이 결국 그의 창조력을 죽인 게 아닌지. 동시에 그에겐 지나치게 체계적이고 지나치게 지적인 무언가가 있는데, 그게 아마도 나를 늘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196p.
베이컨 글쎄요. 그것들은 어떤 작품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우리를 생각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새로운 작품을 낳게 하는지에 대한 좋은 예입니다. 예술에서 그것은 하나의 끝없는 순환 사슬입니다. 예술에서의 지식은 과학에서의 지식처럼 누적되는 것이 아닙니다. 프루스트는 발자크보다 심오하지 않으며, 그는 단지 사물들을 (발자크와는) 다르게 표현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스타일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림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지요. 우리는 피카소가 세잔보다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솅보 브라크 George Braque(1882~1963)는 이렇게 말했지요. "메아리가 메아리에 답한다, 모든 것은 반사한다."
<프란시스 베이컨: 화가의 잔인한 손> 대담자 미셸 아솅보, 옮긴이 최영미, 도서출판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