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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The Ske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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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urquoise Sep 13. 2015

할아버지

갑자기 그냥, 보고 싶을 때가 있어요 요즘도


2011년 4월 9일


꿈속에서 나는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지는 생뚱맞게도 칠레 산티아고(그 즈음 나는 칠레 산티아고에 가고 싶다는 말을 종종하곤 했다)였다.


공항에 있던 내게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찾아온 장면이 또렷이 기억난다. 할아버지는 평소처럼 아무 말씀 없이 그저 캐리어를 끌며 들떠 있는 나를 보고만 계셨다. 할머니는 특유의 성마른 음성으로 산티아고에 가려면 이걸 챙겨 가야 한다며 묘한 것을 내밀었다. 아직도 김이 나는 뜨듯한 밥 한 공기와 소주 한 병이었다. 여행용 캐리어에 누가 이런 걸 담아 가느냐며, 이런 건 통관도 안 될 거라며 툴툴거렸지만 할머니는 요지부동이었다. 손주와 입씨름을 벌이던 할머니를 말린 건 할아버지였다. 당신께서는 언제나처럼 허허, 사람 좋은 웃음소리를 내며 가져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셨다. 그저 잘 다녀오라며, 입국장으로 향하는 내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물론 '개꿈'이라고 생각했다. 깨고 나서도 너무 생생한 것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결혼식까지 채 한 달도 남지 않아 피곤했던 걸로 치부했다. 신혼여행으로 더 멋진 곳을 정하지 않은 것을 뒤늦게 후회하고 있던 때라 산티아고로 여행을 떠나는 꿈을 꿨구나 싶었다. 건강했던 모습의 할아버지가 꿈에 나온 걸 보면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그 꿈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로 내 속에 잠시 묻혔다.


그게 개꿈이 아니었다는 건 신혼여행을 다녀온 직후에 알게 됐다. 도착한 공항에서 건 전화 너머로 어머니는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며 짧고 담담하고 말했다. 우리 내외가 홍콩에서 발리로 이동하고 있을 즈음이라고 했다. 연락할 수 있었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신혼여행 절반을 잘라내고 싶지 않아 일부러 숨겼다고 했다.


다음 날 납골당을 찾은 나와 아내는 작은 항아리에 담긴 할아버지를 유리벽 너머로 다시 만났다. 결혼 전 뼈만 앙상하게 남아 처참했던 느낌이 오히려 좋았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하얀 도기 속에 갇힌 할아버지는 조촐했다. 꿈에 나타나 미리 제삿밥과 술 한 병을 건네주려 했지만 받지 않았던 손주는 당신께서 스러지는 것도 모른 채 발리 공항에서 꽃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그 사실이 너무나 죄스러워 나는 아내 앞에서 처음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아내는 말없이 내 등을 감싸주며, 우리 내외가 가장 행복한 순간에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을 항아리 옆에 기대어 놓았다.


2012년 5월 5일


약속 장소에는 동생이 벌써부터 나와 내 차가 보일 만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낯익은 낡은 경차를 확인하고는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지만 나는 차마 그의 인사를 받아 줄 여유가 없었다. 손을 흔드는 둥 마는 둥, 나는 동생을 지나쳐 화장실이 있을 법한 상가 건물로 뛰어들었다.


오래된 상가 안쪽에는 비교적 가까운 곳에 화장실이 위치해 있었다. 화장실 바로 옆 매장에는 손님이 없어 황량한 평상 위에 할아버지 두 분이 앉아 다급하게 뛰어 들어오는 정장 차림의 사내를 지켜보고 있었다.

"손주랑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시오?"

지팡이를 짚은 노인 앞을 스쳐갈 때, 그가 입을 열었다. 내게 하는 말은 아니겠지, 내 뒤에 누가 들어오고 있나 보다. 나는 뒤돌아 보는 시간도 사치라는 생각과 함께 화장실 문을  열어젖히고 급히 '볼 일'을 처리했다.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는 모양이었다.


장시간 소변을 참다가 일을 치르면 시간이 자못 길어지는 법이다. 한참을 무아지경에 빠져 있다  세상없는 만족감을 느끼며 세면대로 향했을 때 화장실 문이 열렸다. 방금 전 내가 화장실로 뛰어들 때 한 마디 입을 뗀 노인이었다. 그는 화장실 문을 연 채로 손을 씻고 있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고는 언제 나를 쳐다봤냐는 듯이 시치미를 떼며 소변기로 향했다.

"자네, 오늘 제사 지내러 가는가?"

손에 묻은 물기를 닦으려 돌아서는 나와 스쳐 지나며 노인은 질문을 던졌다. 이번 건 분명히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네? 아, 네"

평소 입지 않는 정장 차림에 굳이 까만 넥타이까지 한 내가 그렇게 부자연스러웠나 싶었다. 노인은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일을 보는 채로 화장실 문을 나서는 내 등 뒤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성심성의껏 잘 지내드리게. 할아버지가 무척 좋아하시겠구먼"
"아, 네네"

무의식 중에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문을 나섰다. 비상 깜빡이를 켠 채 도로에 서 있는 작은 차가 눈에 들어왔다. 이미 제사 시간에 늦은 데다 도로를  잡아먹을 듯이 몰려드는 차량들 사이에 동생과 아내만 남겨두고 있었기에 담배 한 개비 피울 정신도 없이 다시 도로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날은 하루 종일 느끼지 못했다. 화장실에서 만난 그 노인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소름이 돋은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몽롱한 정신으로 커피 한 잔을 홀짝이다가 깨달았다. 나는 어제 그 노인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맞다고 했을 뿐, 할아버지 제사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는 내가 알려주지 않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내게 보이지 않던 무언가를 보고 알게 되었을 것이다. 노인이 화장실로 나를 뒤따라 온 것도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게다. 기억을 되짚어 보니 그 노인은 소변기 앞에서 바지 춤도 내리지 않은 채였다.


2015년 9월 12일


회사에 놓고 온 물건이 있어 드라이브도 할 겸, 주말 밤에 여의도로 향했다. 올림픽대로를 지나 여의도에 접어들던 즈음, 한가하게 음악을 틀어 놓고 흥얼거리던 내 눈에 낯익은 병원 네온사인이 들어왔다. 그저 대학병원이라고 하기에 내겐 너무 슬픈, 할아버지가 임종을 맞으셨을 그 곳이었다.


유난스럽게 큰 손주를 챙겼던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전쟁으로 서울에 있던 최고로 좋은 대학교 입시를 치르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그래서인지 어릴 적 한 때 전교 등수를 논하던 큰 손주에게 당신의 꿈을 투영하셨던 것 같다. 너는 평생 펜으로 먹고 살 아이라며, 너는 우리 집안의 희망이라며 부담스럽지만 살가운 애정을 주시던 분이었다. 나와 내 동생은, 외갓집에 가면 담배 연기 가득한 할아버지의 방에서 하루 종일 이어지는 내기 바둑을 보며 커피 심부름을 하곤 했다. 자꾸 숙제는 했냐며 공부하라고 채근하는 것이 조금은 못마땅했지만, 재떨이 비워 올테니 조금만 더 바둑 구경하겠다고 떼를 쓰면 "인녀석이"라며 허허, 웃어 보이던 그였다. 외갓집에서 방학을 보내며 가장 즐거운 일과 중에 하나는 할아버지와 그렇게 살을 부비고 지내는 것이었다.


췌장암 말기,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할 것 없던 상태였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혹시 먼저 삶의 끈을 놓아버리면 큰 손주 결혼식이 이뤄지지 못할까 싶었나 보다. 혼수상태여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 테지만, 당신께서는 내가 웨딩카를 타고 떠날 때까지 온 힘을 다해 가쁜 숨을 붙잡고 있었다. 혹시 세상과 작별하는 순간, 할아버지는 행복하게 사진을 찍고 있었을 나와 아내를 이미 보고 있었을까.


비어 있는 조수석에서 묵직한 담배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당신께서 살아 계실 적 피우던, 한약 향이 배어 있는 그 냄새. 몇 년 전 내가 상가 화장실로 뛰어들 때처럼, 나와 아내가 발리 공항에 도착해서 기념 사진을 찍고 있을 때처럼, 할아버지가 느껴졌다. 할아버지는 분명, 운전대를 돌리는 나를 보고 있었다.


누군가를 갑자기, 너무 보고 싶어지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목을 거슬러 오르는 무언가를 애써 눌러 앉혔다. 언제나처럼 허허, 사람 좋은 웃음소리를 내는 우리 할아버지가 유리창에 언뜻 뿌옇게 비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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