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결국 내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사무실이 살짝 들떠있었다. 평소 같으면 야간 방송팀과 야근 기자만이 데면데면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어야 할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섞여있는 것이다. 슥 훑어보니 조연출들이다. 그것도 한두 명도 아니고 새벽 출근자까지 합쳐 무려 다섯이다.
"오매, 뭣들 한댜?"
수고하셨습니다 라며 인사를 하는 아이들에게 나는 괜한 신소리를 하며 물었다.
"아, 저희 할 게 아직 남아서요"
그러믄. 할 게 남아있으니 여직 여기 있는 거겠지. 뻔한 대답에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곤 슬쩍 그들을 지나치며 눈치를 살폈다. 이어폰을 끼고 BGM 후보군을 고르고 있는 녀석, 빽빽한 큐시트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는 녀석, 편집 프로그램을 열고 마우스를 요리조리 움직이고 있는 녀석까지.
그들에게 뭐하고 있냐고 묻는 것 자체가 사실 민폐이긴 하다. 한 해에 두 번 있는 정기 개편 시즌인걸 모두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덕에 나 역시 남아서 잔업을 해야 할 판인 것이고. 쓸데없는 질문을 하며 조연출 친구들의 집중을 굳이 흐트러뜨린 건 효율성 측면에서 볼 때 결코 합리적이지 못한 짓이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눈에 보이는 녀석들마다 계속 뭐라도 한 마디 붙이고 싶은 것이다. 방해가 돼서 미안하지만 그런 마음이 자꾸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새벽 4시 반에 사무실에 도착해 이미 회사에 머무른 시간만 15시간이 넘어가는 친구에게는 피곤할 걸 알면서도 피곤하지,라고 한 마디 건네고 싶다. 속이 안 좋은 탓인지 점심 때에도 얼마 안 먹고 말았으면서 저녁 식사도 거른 채 노트북과 씨름하고 있는 녀석에게는 배 안 고프냐고 묻고 싶다. 입사한 지 채 한 달도 안돼 개편 시즌에는 무얼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없을 신입을 보니 일이 많냐며 '꼰대' 같은 질문을 하는 내 모습이 자꾸 그려진다.
이렇게만 본다면 아마 나는 세상 둘도 없는 멋진 선배다. 부하 직원들의 고충을 마음으로 느끼고 따뜻하게 다가서는 자비로운 모습이라니. 하지만 틀렸다. 동료들은 물론이거니와, 내가 스스로를 돌아봐도 나는 결코 그렇게 좋은 선배가 아니다. 단적으로 남아있는 저들 중 내가 시킨 일 때문에 회의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가 둘이나 있는 것이다. 즉, 저들이 야근 행렬에 서서 쉬쉬하며 누군가를 욕하게 싶을 때, 물망에 떠오를 후보군 중 나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악덕'인 셈이다.
그러면 이건 단지 가열차게 일하는 후배들을 희롱하기 위한 악취미에 불과한 걸까. 아닌 것 같다. 좋은 선배는 못되도 그렇게 뼛속까지 뒤틀린 불한당이라고 하기에는 과하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내가 그들의 업무를 굳이 방해하면서 희열을 느껴봐야 결과적으로 이득일 리 없다. (나도 집에 빨리 가고 싶으니까) 저들이 빨리 마무리를 해야 나도 뭔가 결정을 내리고 가방을 들며 콧노래를 부를 것 아닌가.
"얼굴 뻘게졌어, 푸하하"
깔깔대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조연출 '지지배' 둘이 서로를 손가락질하며 웃고 있다. 그것도 서로 얼굴이 벌게져서 배꼽을 잡는다. 무슨 얘기인고 하니, 아침 일찍 출근한 두 녀석이 밤 8시 넘어서까지 초췌한 모습으로 좀비마냥 돌아다니는 서로가 재밌다는 것이다. 너는 왜 이 꼴을 하고 아직도 있냐는, 어찌 보면 씁쓸한 얘기에 그들은 밀려 있는 업무 속에서도 웃겨 죽겠단다.
문득 건너편 자리를 바라봤다. 입사 동기 녀석의 책상. 그래, 나도 저 녀석이랑 그랬었다. 말도 안되게 오랜 시간 동안 마치 6, 70년대 공장 노동자처럼, 이걸 왜 맨날 이렇게 하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싶은 일이지만 열을 올리다 잠깐 눈이 마주치면 배꼽을 잡곤 했다. 그냥 아무 말하지 않아도 웃겼고, 슬펐다. 시퍼런 청춘을 워드 프로세서에 바치고 있는 서로의 모습이 안타까워서 그랬고, 유전이라도 터진 마냥 점점 번질번질해지는 서로의 얼굴이 웃겨서 그랬다. 이제는 그때처럼 '어이가 없어서' 박장대소를 할 일이 없어진 동기 녀석은 책상 위에 정체 모를 문서들만 잔뜩 늘어 놓은 채 일찌감치 퇴근한 모양이다.
비어 있는 동기 녀석의 자리에 거울처럼, 예전의 내 모습이 그려졌다. 그는 여전히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와 있고, 끼니를 걸러 비쩍 마른 채로 있다. 어렵게 들어온 회사에서 밀려나기 싫다는 의지 하나로 버텼던 그 녀석이다. 이 바닥의 생리가 어떤지,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람은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지금은 조금이나마 실마리를 잡았다 생각하는 것들을 하나도 모르던 풋내기가 이를 악물고 편집기를 만지작 댄다. 그 시절 나는, 내 스스로 생각건대 누구에게도 부끄럼 없이 치열하게 생존했다.
깔깔대며 '애써' 즐기는 조연출들을 굳이 방해하며 건네고 싶었던 한 마디들은, 결국 그 시절 내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망망대해에 툭, 떨어진 것 같은 두려움을 안고 첫 발을 내디딘 회사였다. 헤엄을 쳐서 어딘가로 가는 것은 고사하고 물에 떠 있기도 버거웠던 적이 많았던 것 같다. 그때마다 남들은 모르겠지만 수면 아래에서 나는 오리 새끼마냥 살아남고자 발버둥을 쳤다. 언제까지 필사적으로 발을 굴렀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아직 '물' 위에 떠 있다.
언제까지나 '살아남기'만을 목표로 삼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지금도 생존이 아닌 목표를 향해 가야 할 처지에 너무 한가한 소리를 뱉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고 갈 길은 멀기에, 발버둥을 치던 그 시절보다 더 기민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해야 한다. 하지만 그 전에 잠시만, 나르시시즘에 빠지고 싶다. 남들은 모른다. 그들은 내가 살아남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을 때도 물 위로 나온 모습만 보고 있지 않았던가. 나는 나 혼자만 알고 있는 예전의 나에게 오늘은 꼭 잘 했다고, 대견하다고 말해줘야겠다.
"선배, 회의실로 오세요"
조연출 한 녀석이 날 찾았다. 이제 다시 헤엄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