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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The Ske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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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urquoise Oct 26. 2015

1년 만에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쌉쌀한 기억, 따끈한 추억으로

"예~잇, 이거 뭐야 이거, 아~ 나 참.."

이른 아침부터 윗집 아저씨의 단말마 비명이 창문을 뚫고 들려 왔다. 주말이라 아내와 단잠에 빠져 있던 내겐 그다지 반갑지 않은 '데시벨'이었지만 잠결에도 무슨 일인지 궁금하긴 했다. 윗집 아저씨는-아주 가끔 옆집 할아버지와 큰 소리로 싸우긴 하지만-항상 함께 사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조신한 사람이었다. 꼭두새벽부터 남들 다 깨우기 위해 일부러 소리를 지를 인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무슨 일이세요?"

잠옷 차림 그대로 1층으로 나온 나는 한껏 뻗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인사를 겸해 물었다. 우리 부부가 아끼는 '애마'가 자그마한 경차였기 때문에 겨우 일렬 주차라도 가능할 정도로 비좁았던 주차 공간은 기묘한 냄새로 이미 가득 차 있었다.

"아아니, 어떤 놈이 차 바퀴 앞에다 똥을 싸놨네, 똥을! 아우 진짜"

윗집 아저씨 차는 출발하려던 걸음을 멈추고 어정쩡하게 콘크리트 턱에 걸쳐져 있었다. 왼쪽 앞바퀴에는 윗집 아저씨가 말한 사태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타이어에 파인 홈 사이사이에 꽉 들어찬, 말로 형용하기 싫은 그 무엇이 까만 타이어와 병치되어 묘하게 에스닉한 느낌을 준다는 게 '웃펐다'.

똥을 누가, 얼마나, 어떤 각도로 절묘하게 싸놨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저씨의 차는 범인의 의도대로 움직였다.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범인이 기대한 것보다는 피해 상황이 좀 덜한지도 모르겠다. 자동차가 똥을 밟으며 움직일 때 그렇게 큰 소리가 날 수 있을까. 윗집 아저씨는 자신의 애마 왼쪽 앞발이 심각한 오염 물질을 밟았다는 걸 어떻게 즉각 눈치채고 이렇게 노발대발하고 있는 건지, 잠이 깬 후에도 그 비밀은 잘 이해가지 않았다.


우리 부부가 신접 살림을 차린 곳은 그렇게, 스펙터클 한 사건이 비일비재한 불야성(不夜城) 근처였다. '똥 사건'이 지금도 자주 일어나는지, 아니면 윗집 아저씨가 누군가로부터 스페셜 한 선물을 받은 건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보다 약한 사건들은 자주 일어나는 환락가였다. 밤만 되면 술에 취한 남자들의 고성방가가 BGM처럼 울려 퍼졌고, 그 '음악' 사이사이로 토악질을 하는 소리가 박자를 맞춰주기도 했다. 확인해본 적이 없어 정확한 팩트라고 하긴 어렵지만, 분명 어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려 보이는 친구들이 집 앞 골목에 모여 앉아 담배 연기가 공장 굴뚝처럼 피어 오르게 만들기도 했다.


집안 사정에 비하면 집 근처 상황은 그래도 '양반'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방 2개에 거실은 없고 주방은 구색만 겨우 갖춘 정도였던 곳. 화장실에는 세면대가 없어서 우리 부부는 을지로에 친히 나가 도기를 사다 붙이는 수고를 하기도 했다. 너무나 작았던 싱크대 개수구는 설거지한 그릇을 머리에 이고 있어야 하나 싶을  정도였고, 식사라도 한 번 할라치면 벽에 걸려 제대로 열리지 않는 냉장고와 한바탕 씨름을 하고 발가락에 턱턱 걸리는 식탁 다리와 수납장 문짝을 달래가며 움직여야 했다.

다른 게 다 괜찮고 단지 좁기만 했다면 다행이었을 텐데. 춥기는 어쩌면 그렇게 추울 수가 있는지. 겨울이 되면 세탁기는 몇 날 며칠 동안 꽝꽝 얼어 붙어서 녹을 줄을 몰랐다. 뜨거운 물을 부어 몇 시간 동안 녹이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나중엔 옷을 모아서 세탁소에 맡겨 버리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현관문 아래쪽에 살짝 틈이 벌어져 있어서 찬 기운이 하루 종일 슬금슬금 들어오는 것도 문제였다. 문풍지를 사다 붙여봤지만 별무소용, 그나마 피 끓는 신혼부부가 꼭 붙어 잤기에 겨울을 큰 병치레 없이 날 수 있지 않았을까. (나중에 부동산에서 들어보니 이 정도 집은 사실 대학생 2명이 월세 나눠내며 자취하는 곳으로 많이 찾는다고 했다. 즉, 신혼집은 '자취방'에 꾸린 셈이다)


집 주인이 월세로 전환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이사를 가게 된 곳은 신혼집보다는 조금 컸다. 집안 구조만 봤을 때는 이제야 좀 '집 같은 집'을 얻었다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일단 크기가 어찌됐든 방은 3개였다. TV와 소파 사이의 거리가 너무 짧아 보이긴 했지만 아무튼 거실이라고 할만한 공간도 있었다. 집 앞 뒤로 길쭉히 나 있던 다용도실은 당장 필요 없는 물건들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었고, 우리 부부의 옷장이 채 절반도 들어가지 못할 것처럼 작은 방은 곧 태어날 아기에게 필요한 물건을 쌓아 놓는 용도로는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남편 입장에서는 결정적으로, 무려 '지하' 주차장이 있었다. 열심히 연마하지 않으면 차 옆구리를 모조리 갈아 먹을 것 같은 좁은 입구를 가진 주차장이었지만 나갈 때마다 윗집 아저씨에게 차 좀 빼 달라고 전화해야 했던 이전보다는 훨씬 진화한 모습이었다.


마냥 행복할 줄만 알았다. 이사 온 첫 주까지는 그랬다. 이제 갓 임신 12주를 지난 아내와 함께 아이를 위한 인테리어와 집안 구조 변경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방 2개짜리 '자취방'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희열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 주를 지나면서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오래된 빌라였던 우리의 두 번째 집은 여기저기 손보며 살아야 하는 '고물(古物)'이었다.


어느 날 아침, 산 지 2년 밖에 안 된 세탁기는 누가 시멘트물을 들이 부은 듯이 허옇게 변해 있었다. 세탁기를 놓은 곳 위를 보니 눈에 띄게 갈라진 천장에서 시멘트 섞인 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집 보러 가서 왜 그걸 못 봤는지 모르겠다) 꽤 오랫동안 흘러 내린 모양인지, 석회동굴의 종유석처럼 굳은 채로 매달린 시멘트 물은 세입자의 한숨을 이끌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1층에 처음 살아보게 된 젊은 부부가 미처 알지 못했던 안타까운 부분도 있었다. 무엇보다 너무 시끄러웠다. 대로변은 아니었지만 나름 큰 골목과 맞닿아 있던 거실 창문은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부르르 떨었다. 나름 이중창이긴 했지만 안쪽 문은 옛날 집답게 나무 프레임이었던 터라, 진동이 한 번 올 때마다 천둥 비슷한 소리를 내기 일쑤였고 방음은 거의 되지 않았다. 오죽하면 거실에 앉아 있어도 어떤 차종이 지나가는지 맞출 수 있겠다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서로를 위로했을까. 1년 후 태어난 아기가 밖에서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늦은 밤 찹쌀떡 장수가 지나갈 때마다 빽빽 울며 괴로워하는 모습은 정말 참기 힘들었다.

그나마 예전 집보다는 겨울에 덜 떨고 지내도 된다는 점은 긍정적이었다. 다만 난방비가 어마어마하게 나온다는 함정이 있다는 건 11월 한 달이 지난 다음에 알게 됐다. 가스 보일러는 소리만 요란할뿐 열효율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이 쇠약한 녀석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액수의 도시가스비를 보고 잘못 나온 게 아닌지 가스공사에 문의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후일 아기가 태어나 백일이 될 즈음까지, 겨울 시즌에는 난방비 폭탄을  온몸으로 껴안느라 우리 부부는 아기 옷 말고는 제대로 된 겨울 옷 장만을 하지 못했다.


그 집에서 이사 나온지 몇 달이 지나 아내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예전에 살던 집에서 다시 살라고 하면 살 수 있겠느냐고. 물론 아내는 절대 못 산다는 강한 부정을 표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밖은 새벽 내내 시끌벅적하고, 안은 인형의 집 마냥 오밀조밀해서 '신혼'의 초능력이 사라진 지금에는 다시 웃으면서 '자취방'에서 지낼 자신이 없다. 이렇게 지내다가는 아기가 정서불안에 빠질 것 같아 조마조마했던, 두 번째 집 '고물'에서 우리 세 식구가 계속 사는 것도 썩 좋은 그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진짜 '우리 집'을 사서 온지 어느덧 1년이 됐다. 은행이 집의 절반 이상을 사줄지언정 조용한 곳으로 이사를 오자고 결심했던 것은 지금 현재까지는 옳은 선택이었다고 느낀다. 이제는 난방비 폭탄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늦은 밤에 목청 돋우며 돌아다니는 찹쌀떡 장수도 없다. 밤 12시가 되기 무섭게 아파트 단지는 돌아다니는 사람 찾기가 어려울 정도고, 당연히 '똥 테러'를 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1주년이었던 날이 언제였는지도 모르게 지나간 걸 보면 언제가 계약 만료날인지 손가락으로 꼽아가며 살던 시절의 습관 따위는 완전히 잊은 것이다.


이제는 그저 아이가 클 것을 대비해 조금 더 큰 집으로 이사 갈 계획만 열심히 세우면 되겠지, 그런데 이상하다. 가끔씩  그때 그 집들이 불쑥 떠오르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되새기는 것이 아니라, 묘하게 좋았던 기억들만 마치 사진처럼 스윽 떠오른다. '자취방'에 입주하기 한 달 전부터 비어있던 작은 집에 퇴근길에 아내와 함께 창틀에 페인트칠을 하며 짜장면을 시켜 먹던 장면이, 시끄럽게 싸우던 취객들의 비논리적인 논쟁을 침대에 나란히 누워 들으며 킥킥대던 모습이, 식탁 하나만으로도 꽉 차던 주방에서 서툴게 차려 놓은 밥상을 처음 마주하며 어색하게 웃었던 기억이, 눈앞에 번지듯 나타난다. '고물'에 아기 용품을 하나 둘 사다 놓으며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이리저리 살림살이를 옮기고, 조리원에서 나와 "여기가 우리 집이야, 아가"라고 말하며 현관문을 열고, 아가를 유모차에 태우고 집 근처 시장에서 떡볶이를 사다 먹었던 우리 세 식구의 추억들이 머릿속에 새겨진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험악했던 집들에 대한 억하심정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는 행복한 한 커트들만이 차곡차곡 기억 속 앨범에 붙여지고 있다.


요즘 사는 게 배가 불러서 그런 건지, 단순히 나이를 한두 살 더 먹으니 센티멘탈해지는 강도가 세지는 건지. 아니면 정말 여성 호르몬이 예전보다 더 많이 나오는 건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무리 곱씹어봐도 좋은 점이라고는 별로 찾아볼 수 없는 '자취방'과 '고물'에, 그 집들과 함께 했던 시간에 향수를 느끼는 건 명백한 모순이다. 하지만 뭐, 악몽 같은 시간이었다며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지 않은가. 약간의 무리를 무릅쓰고 얻은 생애 첫 '우리 집'이 주는 아늑함과 편안함이, 1년 만에 내 쌉쌀한 기억을 따끈한 추억으로 바꿔주는 데에 단단히 한 몫하고 있는게 아닐까 추측할 따름이다.


생각해보니 이사 온 첫날에도, 1주년이 된 날에도, 무뚝뚝한 우리 부부는 '우리 집'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당연히, 매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을거라는 생각에 우리 때문에 조금씩 삭아가는 걸 등한시하고 있었던 게다. 한 순간도 따뜻한 보금자리이길 소홀히하지 않았던 '우리 집'이거늘, 기둥 한 번 어루만져 준 적 없는 무정한 주인은 허름했던 예전 집들도 나름 괜찮았다는 감상이라니. 미안한 마음을 담아 물끄러미 쳐다봐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우리 집'의 우직함에 나는 되려 약간의 신경질을 느낀다.


훗날 우리 세 식구가 이 집을 떠나게 될 때, 분명 지금보다는 더 크고 좋은 곳으로 가리라 믿으며, 그리고 또 한 번 행복하고 애틋한 추억들이 소복이 쌓일 것을 기대하며. 도로롱 도로롱 코를 콜며 자는 아내와 아이를 조용히 품어주고 있는 이 집에, 나는 1년 만에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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