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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The Ske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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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urquoise Nov 07. 2015

민트색 비닐 우산

가끔은 아주 조금, 사치스러워도 괜찮아

주말에 내린다던 가을비가 조금 빨리 찾아왔다. 그러면 그렇지. 회사에서 떠도는 일기예보 따위는 믿는 게 아니었는데. 금요일이니 오랜만에 치킨이나 한 마리 시켜 먹자는 아내의 말에 만원 지하철의 불쾌함을 치열하게 버티고 종착역까지 왔건만, 야속하게도 하늘에서는 비바람이 내려치고 있었다. 오른쪽 손목 즈음에 매달려 있었으면 했던 우산은,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날마다 그러하듯 이번에도 없었다. 아침 출근 준비를 하던 중에  챙겨야겠다 잠시 생각하고 또 그냥 나온 것이다.


지하철 입구에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꽤 바글거렸다. 대개는 챙겨온 우산을 우아하게 펼치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마치 비바람 치는 날씨가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한 뒤태를 보고 있자니 부럽기도 하고, 얄밉기도 한 것이다. 우산 없이 하늘만 쳐다보고 있던 사람 중 몇몇은 서류 가방을 머리에 이고 빗속을 뚫고 달려 나갔다.


몇 명 남지 않은 역 입구에는 이제 정적이 감돌았다. '우산 보유자'들은 이미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유유히 떠나갔고, 빗 속으로 돌격한 '용감한 친구'들은 우산 쓴 이들보다 훨씬 더 빠르게 이곳을 벗어났다. 역 근처에 한 두대는 있을 법한 택시도 이미 누군가가 비바람을 핑계로 타고 간 모양이니 남은 선택지는 몇 개 없었다. 그나마도 내리는 기세를 보아하니 잠시 역에 쭈그리고 앉아 기다린다 해서 소나기마냥 그쳐 줄 것 같지는 않아 보이니 '기다린다'를 선택하는 건 누가 봐도 무모한  듯했다. 그럼 답은 하나 밖에 없었다. 역내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느냐, 아니면 '용감한 친구'가 되느냐 였다.


'아, 어찌 저를 이런 시험에 들게 하시나이까. 비닐 우산 구매 결정이라니요. 이건 너무 가혹합니다'


비닐 우산은 이미 집에 네 개나 있었다. 그것도 투명한 것부터 땡땡이 무늬까지 종류도 다양하게 말이다. 또 사서 집에 가져가면 이제 우산집에 꽂을 자리도 없을 것 같았다. 가격은 또 어떠한가 생각해보니 살짝 소름이 돋았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3천 원짜리는 이제 없으리라. 최하 5천 원은 각오해야 할 텐데, 그건 내 하루 점심 값에 필적하지 않는가. 단지 빗발이 좀 있다 해서 월요일 밥값을 이렇게 무참히 내버려야 하는 것인지, 나는 역 입구 처마에 서서 점점 기세를 더하는 가을비에 신경질적으로 담배 연기를 뿜어대며 고민했다. 이미 흥부네 가족처럼 비좁은 우산집에 업둥이 하나를 더 데려다 놓아야 하는 기분이었다.


"이걸로 주세요"

"네, 삑!.. 5천 원입니다"


계산이 완료되는 순간, 잃어버린 일회용 라이터를 다시 사는 것보다 열 배는 더 아깝다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다. 애매모호한 경계에 있긴하지만 창 밖으로 보이는 빗줄기는 그냥 뛰어서 극복해볼 만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산을 사기로 결정한 건, 사실 그렇게 합리적인 이유는 없었다. 검소함과는 거리가 먼, 약간은 '럭셔리'한 방법(그나마 택시를 타고 가는 것보다는 낫지만)을 택한 것은 그저 기분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 주 내내 우울증 초기 증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분이 착 가라앉아 있었는데, 신나는 금요일 저녁에 빗방울과 사투를 벌여야하는 처지가 죽어도 싫어서 그랬다면 변명이 좀 될까. 나는 비닐 우산치곤 지나치게 화려해보이는, 민트색 우산을 손에 쥐고 편의점을 나섰다.


어느새 사람들이 또 북적였다. 우산을 고르는 사이에 뒤따르던 열차가 도착한 모양이다. 개찰구를 나서는 사람들 틈에 섞여 방금 전 고뇌의 현장이었던 역 입구로 향했다. 빗줄기는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정갈하게 내리고 있었다.


"아, 비 많이 오네. 어떡하지 이거"

"예~잇 거 참. 아까 탈 때만 해도 안 오더니만 이거 뭐야 또"


조금 전과 똑같은 상황이 또 벌어졌다. 우산을 가진 자들은 또 얄밉게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주섬주섬 우산을 펼쳐 들었다. 그러고는 마치 공작새처럼 우산을 뒤로 제친 채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것이다. '없는 자들'의 웅성거림이 공간을 채우는가 싶을 때 몇몇 용자들은 또 빗 속을 뚫고 돌격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 손에 넣은 '업둥이' 녀석을 펼쳤다. 누가 새 우산 아니랄까 봐 주름 한 점 없이 팽팽하게 펴지는 기세가 자못 등등했다. 투둑투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밖으로 한 걸음 나서며 뒤를 돌아보니 조금 전 나처럼 역 입구에 남은 최후의 몇 명이 보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릿속에서 해결 방안을 하나씩 지워가다 결국 비닐 우산 구매 결정 '시험'에 빠질 사람들일 것이다. (착각이겠지만) 그들의 시선이 새 비닐 우산을 들고 멀어지는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부럽게 말이다. 발을 동동 구르던 좀 전과 달리 그들에게 난 5천 원어치만큼 부럽고 얄미운 사람이 되어 있었으리라.


나는 문득 고개를 들어 빳빳하게 펴진 채 빗소리를 연주하는 '업둥이'를 바라봤다. 여전히 과한 선택이었는지 아닌지에 대해 내적 갈등이 일어나게 만드는 녀석이다. 하지만 기분은 묘하게 좋아졌다. 우산 자체로만 봤을 때, 비닐 우산이 뭐 그리 큰 가치가 있겠나. 원가로 따진다면 소비자 가격 5천 원은 폭리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가 기습적으로 시작되는 상황이라면 비닐 우산이라도 얘기가 다르다. 우산이 없는 자들에게 비닐 우산은 순식간에 '워너비'가 되어 버린다. 크기고 색상이고 다 필요 없고, 그저 저게 나도 있었으면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오르지만 덥석 사기에는 너무 아까운 그런 존재가 된다. '없는 자'들의 고민과 부러움을 느끼며 반사적으로 (유치하게도) 우월한 기분을 느끼는 것, 5천 원 안에 녹아 있는 진짜 가치는 그렇게 원초적인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빗 속을 뚫고 달리는 '용자'들보다 내가 낫다는 데에서 느껴지는 포만감이 더 큰 아이러니. 당혹스럽게도 그런 사치스러운 만족감이 들었다.


사치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를 정확하게 알기 전에 '좋지 않은 것'이라는 인식부터 배웠다. 하지만 독립을 하고 생활을 꾸려가다 보니 사치스러운 게 꼭 나쁘기만 한 것 같진 않다. 그게 평범한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줄 정도만 아니라면 말이다. 나만 느낄 수 있는 정도의 조그마한 사치스러움은 어쩌면 많은 이들에게 목표가 되고, 즐거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다못해 비 오는 날 비닐 우산만 있어도 의기양양해지는데 '워너비' 아이템은 오죽하겠는가. 좀 비싼 경향이 없지 않아 있지만, 가진 것 보다 조금 더 좋은 옷 한 벌 사 입고 비싼 음식 한 번 먹는 것만으로도 내일을 버틸 동력은 순식간에 충전되지 않던가. 능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내가 남들의 부러움(그것이 비록 나 혼자 하는 착각일지라도)을 먹고 잠깐이나마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지불한 값어치는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리라. '사치'라는 단어 자체를 죄악처럼 여기는 분위기에 약간의 두드러기를 느끼는 내가 너무 세속적인 건지는 모르지만, 남들보다 나은 점을 찾아가며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을 적당히 즐기는 사치스러움마저 터부시 되는 삶은 너무 팍팍한 것 아닐까.


집 근처 정류장에 내려 손바닥을 펼쳐보니 옳거니, 비가 그쳤다. 비가, 그쳤다 우울하게도. 나는 좀 전에 무려 5천 원을 주고 '업둥이' 하나를 더 데려왔단 말이다!라고 중얼거려봐야 이제 어차피 환불은 안 될터. 역시 좀 과했나 싶은 생각이 드는 다시 시무룩해졌다. 아까 그냥 가방을 머리에 이고 뛰어 가는 '용감한 친구'가 될 걸 그랬다.


괜히 트집을 잡아볼까 싶어 민트색 우산을 다시 펼쳐 보았다. 비가 온다고 예보된 날이 다시 오면 아마 이 우산은 또 우리 집 우산집에서 자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우산 본연의 기능으로만 5천 원 본전을 뽑으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비가 더 안 와서 5천 원이 너무 아깝다. 하지만 뭐, 괜찮다. 적어도 오늘 퇴근길에서 녀석은 충분히 기특했으니까. 잠깐이라도 기분은 꽤 삼삼했으니까. '밥값' 한 번은 톡톡히 한 셈 치기로 했다.


다시 보니 이 녀석, 역을 나서던 그 순간보다는 훨씬 조악하지만 민트색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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