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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urquoise Nov 16. 2015

'코리아 그랜드 세일'에 고(告)함

광군제, 부럽기만 하면 지는 거다

중국 거대 전자상거래업체인 알리바바는 12일(현지시간) 솔로데이인 '광군제'를 맞아 주도한 중국판 블랙프라이데이 '쌍11(雙11)'행사의 총 매출액이 912억위안(약 143억2000만달러, 약 16조5000억원)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이는 역대 최고 매출을 기록했던 지난 광곤제 때의 571억위안 대비 60% 급증한 것이다. 앞서 알리바바는 이번 행사 매출이 110억달러 정도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었다.


지난 11월 12일 머니투데이 기사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어마어마하죠? 딱 하루 만에 우리 돈으로 16조 원어치를 '팔아 재꼈다'는 얘긴데, 그게 알리바바라는 한 기업이 한 성과라니 말이죠. 너무 큰 액수라 감이 잘 안 올 수도 있는데 이렇게 비교를 해보죠. 삼성전자가 발표한 올해 3분기 실적을 살펴보면 반도체 부문 3분기 매출이 13조 원에 못 미칩니다. 삼성전자 반도체를 3개월 동안 판 총액보다 알리바바가 하루 동안 더 많이 팔았다는 거죠. 물론 반도체 산업과 인터넷 유통업을 직접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습니다만, 단순히 액수만 놓고 본다면 삼성전자 내에서도 가장 효자 종목인 반도체 분기 매출을 하루 만에 넘어섰다는 건 아무리 중국이라지만 '소름' 돋는 일입니다.


2009년에 타오바오에서 '솔로부대'를 위한 이벤트를 개최한다고 했을 때만 해도 '에이, 얼마나 가겠어'라며 즉각 염세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이 기억납니다. (제가 워낙에 비관적인 경향도 없지 않아 있지만) 알리바바라는 회사가 커졌다고는 하지만 저렇게 중국과 '안 어울리는 짓'을 얼마나 잘 해낼 수 있을까 싶었던 거죠. 아무래도 중국이라고 하면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시장을 리드하는 이미지는 잘 연결되지 않는 게 사실이었습니다. 적어도 6년 전에는 말이죠. 물론, 제 짧은 생각은 해가 갈수록 매우 틀렸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올해 광군제가 되어서는 혹시 뭐 살만한 게 있나 싶어 타오바오를 기웃거리다가 온통 중국어로 도배되어 있는 사이트를 보니 심사가 복잡해져 그저 메인 페이지를 '그림'처럼 감상했더랬죠.


소위 '대박'이 난 중국의 광군제 얘기를 방송 콘텐츠로 준비하면서 참 부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뭐가 부러웠을까요. 입이 귀에 걸린 마윈 회장님? 글쎄요. 너무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 저 같은 소시민은 그다지 감흥이 없었습니다. (저만 그런 거 아니죠?)

마윈 회장과 대니얼 장 CEO. 그냥 인물들만 본다면 참... (출처 : 로이터)

알리바바 직원들은 어떨까요. 회사가 세계 만방에 이름을 떨치고, 사업이 번창하여 연봉이 좀 오를 것 같다는 기대를 품을 것 같아 약간 부럽긴 합니다. 하지만 광군제 단 하루를 위해 그들이 해야 했을 일을 생각하니, 그리고 광군제 이후 물품 배송과 컴플레인 등 쏟아질 업무를 예상하니 똑같이 월급 받아 생활하는 처지에 부러움보다는 눈가에 습기가 먼저 차오르는군요.

직원들의 절망감이 사진을 뚫고 나올 기세 (출처 : 로이터)

제가 부러웠던 것은 광군제 그 자체였습니다. 연말 소비 시즌이라고 하면 의례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나 영국의 박싱데이를 꼽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광군제도 엄연히 한 축을 담당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것도 옆 나라 중국에서라니요. G2니 뭐니 해서 이미 세계 최고의 소비 시장이라는 걸 알곤 있습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비자가 많은 곳'이라는 의미가 더 강했습니다. 샤오미가 시쳇말로 '날고 긴다'하지만 세계 시장에서는 아직 명함 내밀 처지가 아니라는 사실에 '아직 중국은 멀었어'라며 약간은 무시하는 태도를 가졌던 것도 솔직히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알리바바라는 기업이 퍽 멋진 이벤트를 몇 년째 쑥쑥 키워내고 있단 말이죠.


약간의 질투와 시샘을 자아내는 광군제가 가진 메리트는 대체 뭘까 생각해봤습니다. 알리바바의 엄청난 자금력, 마윈의 세계적인 영향력, 세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만큼 큰 시장. 성공 요인을 찾자면 책 한 권은 족히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그중 제가 주목한 부분은 '스토리'입니다. '솔로들을 위한 축제'라는 메인 테마가 광군제를 중국이 연말 소비 시즌의 또 다른 아이콘으로 탄생시킨 '신의 한 수'였던 거죠.


11월 11일에 1이라는 숫자가 네 번이나 들어가기 때문에 '솔로'들을 위한 이벤트를 기획하겠다는 발상은 사실 그리 신선하진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알리바바는 식상한 아이디어를 멋지게 가공해냈습니다. 정식으로 지정된 기념일은 아니지만 90년대부터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한 광군제를 '쇼핑의 날'로 바꿔버린 거죠. 그 기저에는 '솔로'인 사람들이 인터넷에 빠져 있는 시간이 길어 온라인 쇼핑 이벤트에 충분히 많은 시간과 돈을 할애할 것이라는 계산도 깔려 있었겠고, 콘셉트 자체에 깔린 '웃픈(웃긴데 슬픈)' 정서가 중국 전역에 숨어 있는 '솔로'들의 마음에 불을 지필 것이라는 심리적 노림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알리바바가 한 중요한 역할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판을 벌렸다'는 것이죠. 할인 폭을 얼마나 할지, 어떤 업체를 얼마나 참여하도록 유도할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구매 여력이 있는 사람들을 소비하도록 만드는, 소비할 수 있는 근거를 충분히 마련해주는 것이 '대박'으로 이어지는 가장 중요한 '트리거'가 아니었을까요.

"우리가 이벤트를 준비했다. 그 이벤트는 전적으로 외로운 솔로들을 위한 것이다"

광군제가 탄생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이 한 마디였던 겁니다. 알리바바라는 회사는 (물론 실무적으로 많은 준비를 하긴 했지만) 단지 '불을 댕긴 것' 뿐입니다. 축제는 그에 화답한 중국의 소비자들이 만들어 낸 거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소비 시즌의 주인공들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블랙프라이데이는 추수감사절 다음 날입니다. 많은 이들이 선물을 주고받는 '스토리' 사이에서 미국의 기업들은 "싸게 팔 테니 더 사세요"라는 캠페인을 슬쩍 얹었고 그 이후는 몰려든 소비자들이 전통을 만들어냈습니다. 박싱데이는 조금 더 유서 깊은 트렌드를 이용했더군요. '크리스마스 다음 날'을 겨냥했습니다. 영연방에서는 크리스마스 다음 날을 박싱데이라고 해서 봉건 영주가 아랫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는 풍습을 가졌다고 하는데 요즘에 와서는 (봉건제도는 사라졌으니)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걸로 바뀌게 되었죠. 이미 그 맘 때면 소비자들의 구매력이 충만해진다는 걸 영국의 기업들이 모를 리 없었겠죠. 그들은 주머니에 '총알'을 가득 채우고 기다리는 사람들을 툭, 건드리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이미 오랜 전통이 있는 '스토리' 위에 "싸게 팝니다"라는 말 한 마디만 더할 수 있다면 이미 축제는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우리나라 국회 같네요 '뜻밖의 데자부' (출처 : 로이터)

우리나라에서도 얼마 전 소비 시즌이 개막됐었죠. '코리아 그랜드 세일'이라는 타이틀로 하루 이틀이 아니라 꽤 오랜 기간을 '내수 진작'이라는 사명을 띠고 진행됐습니다. "싸게 팝니다"라는 얘기를 우리나라도 거국적으로 하기 시작한 거죠. 관련 기사를 체크해보니 유통업체들의 매출도 상당히 올랐고, 직접 접한 소비자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은  듯합니다. 수요와 공급의 주체가 아닌 정부가 한 달 기획해서 얻은 결과로는 상당히 고무적이라고 보는 것도 틀리진 않을 수준이긴 합니다. 하지만 뭔가 허전한 느낌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세계 유명 소비 이벤트들이 가진 '신의 한 수'가 없는 것이죠. 소비자들이 뭔가를 사야 할 필요가 가장 충만해지는 때는 언제인지, 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며 주머니를 열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인지, '코리아 그랜드 세일'이 진행된지 이미 꽤 시일이 지났지만 설득력 있는 명제는 접해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주최 측인 정부에서 내수 소비를 활성화하고 떨어진 경제 성장 동력을 다시 끌어올리기 위해 이벤트를 열었다고 하는 얘기가 들릴 뿐입니다. 주머니를 열어야 하는 소비자들에게 매력적인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어도 모자랄 판에, 판매자도 아닌 정부만 이벤트를 열어야 하는 필요가 있었던 셈입니다.


이번이  첫걸음이었기에, 그리고 비교적 급히 기획하여 벌인 일이기에 다소 어설펐던 어쩔 수 없겠죠. 그나마 처참한 실패로 끝나지 않고 내년에도 '코리아 그랜드 세일'이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벤트가 실제로 있었는지 관심도 없고, 크게 체감할 수도 없었던 젊은 층으로서는 여전히 안타깝습니다. 알리바바의 광군제 같은 '대박 아이템'을 바라는 건 아닙니다. 다만 연말에 크리스마스와 같이 모두가 함께 '지르는' 기쁨을 공공연하게 누릴 수 있는 날이, 그래서 카드 회사 배불리는 한이 있더라도 축제처럼 즐길 수 있는 핑계거리가 우리도 하나쯤은 생겼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주로 40~50대 소비자가 직접 와서 사갔기 때문에 흥행했다...는 얘기가 저는 왜 "호갱님들 덕분입니다"라는 소리로 들릴까요 (출처 : 뉴스1)

흔히들 밸런타인데이나 핼러윈데이 같은 날을 두고 "얄팍한 상술이다"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밸런타인 데이에 왜 여자가 회사 남자 직원들에게 초콜릿을 돌리며 괴로워해야 하는지, 핼러윈데이에 왜 사탕 받으러 다니는 아이들은 없고 이태원 클럽만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직설적이고 위트도 없어 약간 민망하기까지 한 '코리아 그랜드 세일'을 보고 있노라면 덮어놓고 비난만 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적어도 밸런타인데이나 핼러윈데이는 왜 '질러야'하는지 이유는 분명하니까요. 그게 말이 되든 안 되든, 아무런 스토리텔링도 없이 단지 싸게 판다는 이야기 하나로만 힘겹게 이끌어 가는 이벤트보다는 더 오래 살아 남지 않을까 싶습니다. 올해 첫 돌을 맞은 '코리아 그랜드 세일'이 내년에는 초콜릿 선물하는 날이나 호박 탈 쓰는 날 같은 얄팍함이라도 살짝 두르고 등장하길, 그래서 가벼운 제 주머니를 기꺼이 털어줄 수 있는 매력을 발산해주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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