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를 위한 어린이집 적응 기간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했다. 여차 저차 해서 급하게 보낸 어린이집이라 아내나 나나 걱정이 컸다. 적응을 잘 하지 못해서 줄창 엄마만 찾다가 결국 상처뿐인 '귀환'을 하는 건 아닐까, 가서 만나는 친구들과는 재밌게 지낼 수 있을까, 혹시 (정말 일부 선생님들의 얘기긴 하지만) 어린이집 선생님이 이상한 사람은 아닐까, 적응기간이라 이제 겨우 점심 식사를 하고 올뿐인데도 마음은 웬 종일 어린이집 현관 앞에 머물러 있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는 (지금까지는) 별 탈 없이 적응하는 모양이다. 엄마의 얘기를 빌리자면 등원한 지 하루 이틀이 지나자 어린이집 현관 앞에서 엄마와 나누던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쌩'하고 친구들 사이로 스며들어 갔다고 한다. 엊그제는 아내가 빈 밥그릇을 들고 있는 아이 사진을 보여주면서 기쁨의 이모티콘을 쏴대기도 했다. 얘기인 즉 '편식 대마왕'인 아이가 한 번도 다 먹어본 적 없는 새우죽을 싹 비웠다는 것. '어미'는 그게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고 했다.
'아비'의 눈에 크게 보이는 것은 아이가 하루가 다르게 할 줄 아는 말이 늘어간다는 점이다. 어린이집을 다니기 전에도 간단한 단어 몇 가지는 할 줄 알았지만 이건 차원이 다르다. 친구와 잡기 놀이를 하며 배웠다는 "자야따 (잡았다)"도 최근에서야 듣게 된 말이고, "재여기""지유리" 같이 어린이집 친구들의 이름도 더듬더듬 들리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가 하는 말을 따라 하는 경우도 갑자기 확 늘어났다. 아이가 있는 자리에서 아내와 시답지 않은 얘기를 하고 있으노라면 아이는 자기가 따라 할 만한 단어 몇 가지를 캐치하고 즉각 똑같이 복사해낸다. "그때 그 집은 너무 높은 데 있어서 자동차로 올라가기도 무서울 정도였다니까"라는 내 말에 아내는 휴대폰 문자를 보내느라 반응이 없어도 아이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자도차, 오야가"라고 답 해주니 말이다.
또래 친구들을 만나게 된 것이 아이의 발달에 급작스러운 변화를 가져온 것인지, 아니면 딱 그 시기에 우연히 어린이집을 다니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일단은 좋은 일이다. 불미스럽다 못해 몸서리쳐지는 어린이집 사건들이 근래 들어 적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무탈하게 다니며 즐거워하는 모습은 무척 다행스럽고 고맙다. 아직 "여유가 생겼다"고 말하긴 어렵겠지만 해산한 순간부터 지금껏 아이 곁을 한시도 비워본 적 없는 아내에게 한두 시간이라도 혼자 있을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도 회사 업무를 보고 있는 내 손을 조금 더 가볍게 만들어 준다. 아침이면 버스 정류장을 향해 힘껏 뛰쳐나가는 '주제에' 직접 체감할 수 있는 좋은 점은 없는 것 같지만, 약간의 '물리적인' 자유를 얻은 아내와 새로운 자극에 신이 난 아이는 퇴근하고 돌아온 나에게도 상당한 편안함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지점에서 조금 심사가 뒤틀리고 있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데, 아내도 조금씩 여유가 생기고 있는데 아빠는 뭔가가 불안정해짐을 느끼는 것이다. 그 안정감이라는 게 참 웃긴다. 갓난아기 때부터 지금까지 아이는 엄마를 한 순간도 놓을 수 없었고, 아빠의 보살핌이 꼭 필요했다. 그게 당연한 부모의 도리였고, 새 생명의 권리였다. 말도 못하게 어설펐지만 신혼 때 누리던 자유로움과 사치스러움을 아내와 나는 나름 열심히 벗겨내 왔다. 그래서 이제 겨우 엄마, 아빠 같은 모습이 조금 되었나 싶었는데 아이는 우리가 필요 없는 시간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두 시간마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반쯤 코마 상태로 젖병을 채우던 순간에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로움, 이제는 그게 없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세 식구로 사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는데 아이는 얄궂게도 그 즈음에 자기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아빠라는 작자는 기껏 보내 놓고는 이제야 적응된 '아비 역할'을 약간이나마 빼앗긴 것이 못마땅하다. 더 열심히 아이를 보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으면서, 쓸데없는 섭섭함만 잘근거리며 씹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생각보다 시간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아직 젊고, 아이는 이제 겨우 세 살이니 앞으로 우리 부자에게 시간은 많을 거라고 안심했던 건 착각이었다. 사실 어린이집은 시작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아이에게 더 이상 엄마나 아빠가 필요하지 않은 시간이 오리라는 걸 아주 아주 살짝 알려준 '티저 예고'에 불과한 것이다. 직접 느끼지도 못하는 한두 시간으로 복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는 건 지나친 엄살이다. 지금 내가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는 핑계를 내세워 부모님과 통화 한 번 하는 것도 귀찮아하는 것처럼, 때 되면 찾아 뵙고 잔소리 들을 각오부터 다지고 있는 것처럼, 우리 아이에게도 그런 시간이 언젠가, 아니 생각보다 멀지 않은 시간 내에 오게 될 텐데. 그때가 되면 굳게 닫힌 아이방 문을 앞에 두고, 혹은 걸려오지 않는 전화번호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고 있겠구나. 아이에게 느끼는 첫 상실감이 이토록 빨리 찾아온 걸 보면 말이다. 겨우 어린이집 적응 기간이라니.
그래, 적응 기간이라는 건 그런 의미였다. 작게 나마 사생활을 갖게 된 아이를 보며 씁쓸한 기분이 들 아빠들에게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주는 것이다. 아빠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뻥 뚫려 버린 가슴을 이제 어떤 걸로 조금씩 채워야 할지, 엄마들에게도 고민할 여지를 열어주는 것이다. 정작 걱정을 해야 할 사람은 아이가 아니라 초보 딱지를 겨우 떼어낸 엄마와 아빠였다. 그것도 모르고 어린이집 선생님에게 아이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묻고 있는 걸 보면 우리 내외는 여전히 초보 엄마이고 어설픈 아빠인 모양이다.
비가 오는 일요일, 아들과 나는 장난감이 모여 있는 방에서 양껏 뒹굴거리며 지칠 때까지 놀았다. 아내는 아이와 꽤나 오래 놀아줬다며 수고했다지만 그리 힘들진 않았다. 오히려 절박한 쪽은 나랄까. 거실로 나가 TV를 틀어 놓고 슬렁거릴 수도 있었지만 왠지 아이가 장난스레 닫아 놓은 방 문을 열고 싶지 않았다. 운전을 끝내 주게 잘하는 택시 기사 아저씨가 자동차 사고 현장을 피해 나간다는, 유치한 스토리를 열심히 지어 내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 이 레퍼토리도 얼마 못 가겠네. 일 년만 지나도 어린이집 친구들과 함께 노는 게 더 즐거울지도 모른다. 그럼 나는 아이에게 뭘 해줄 수 있을까. 잃어버린 아빠의 자리를 채운 것들을 보며 하릴없이 성을 내고 있는 모습이 슬쩍 그려져 입맛이 아릿했다.
"끄아아아~ 푸슈웅! 부우웅~"
"푸핡핡핡"
아빠의 '쇼'가 웃겨 죽겠다는 듯 깔깔대는 아이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조금 더 힘을 내서 아이와 가열차게 놀아야겠다는 다짐을, 잘 될지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해본다. 아이에게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재밌고 좋을 시절은 한 철 토끼탈 쓰는 아르바이트처럼 짤막하겠지만, 아직 초보 딱지가 더 잘 어울리는 아빠는 어떻게든 지금의 불편한 행복을 붙들어 매어 놓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