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어빵 한 봉지 손에 들고 (오지랖 넓은) 독백
앉아 가려고 조금 돌아가는 버스를 탄 게 내릴 즈음이 되자 후회스러웠다. 내리면 한참 또 걸어가야 할 텐데. 날 선 바람이 불 바깥을 떠올리며 옷깃을 곧추 세웠다. 이윽고 버스 뒷문이 열리자 한바탕 돌풍이 불어왔다. 역시 겨울에는 이 길로 오는 게 아니었어, 라며 중얼거리는 사이 반가운 불빛이 정류장 저 편에서 흐늘거렸다. 바람이 매서워지는 계절이면 자주 모습을 보였던 행상이 오늘 날씨를 핑계 삼아 나온 모양이다. 네모 반듯한 아파트촌 골목에 비닐을 뒤집어쓰고 서있는 이방인, 붕어빵 리어카다.
마침 아내가 저녁 식사를 부실하게 했다는 문자를 보낸 참이었다. 이게 딱 이겠구나 싶은 생각에 지체 없이 비닐 주렴을 열어젖혔다.
"어서 오세요."
"붕어빵, 어떡해요?"
"세 마리 천 원이에요. 이쪽이 단팥, 이쪽이 슈크림"
아내는 분명 단팥 든 붕어빵은 싫다고 할 테니, 슈크림으로 두 개를 사야 하나. 천 원어치만 사가면 너무 정 없다고 할까. 주머니 속에 든 지갑을 술술 굴리며 어떻게 담아볼까 고민하던 차에 반대편 비닐을 뚫고 환자복을 입은 아저씨가 쑥 들어선다.
"에이, 내기 져서 이 날씨에 여기까지 왔네 쯧. 얼마씩 해요?"
"세 마리 천 원. 단팥 있고, 슈크림 저 쪽"
길 건너 병원에서 온 모양이다. 텁수룩한 수염, 대충 걸쳐 입은 점퍼, 익숙해 보이는 슬리퍼, 차림을 보아하니 병원 생활이 꽤 길어지는 분인가 보다. 아주머니 말도 짧아지는 걸 보면 요 근래 꽤 자주 드나들었으리라. 사내는 연신 한쪽 발을 반대쪽 종아리에 비벼 대며 춥다는 말로 고요하던 공간을 채운다.
그 사내와 나 사이에 누군가가 있었다. 나 역시 저돌적으로 들어와 고민에 빠져 있던 터라 누가 있는지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슬쩍 바라보니 아이였다, 남자아이. 키는 벌써 나보다도 커 보이지만 희멀건 얼굴은 누가 봐도 중학생 정도였다. 깎을 시점은 이미 지난 듯한 스포츠머리에 겨울엔 교복보다 더 열심히 입고 다닐 것 같은 까만색 점퍼를 입은 소년. 방과 후에 바로 들른 옷 매무새는 아닌 듯했다. 아, 집에 있다가 붕어빵을 사러 왔나. 먼저 들어와 있었는데 내가 너무 들이대는 바람에 쭈뼛거리고 있었던 건가. 잠시, 소년을 의식하며 뒤로 물러섰다.
"오천 원어치 주쇼. 단팥이고 뭐고 남는 거 아무 거나 담아주시고"
가장 늦게 합류한 아저씨가 먼저 주문을 넣어버렸다. 가운데 선 아이도, 그 오른편에 선 나도 서로 눈치를 보다가 선수를 빼앗겨 버렸다. 뭐야, 이 친구 여태 고민 중인가. 어떻게 할까 싶어 슬쩍 흘겨보니 소년은 한쪽 발씩 체중을 옮겨가며 흔들흔들, 정체 모를 그루브를 타고 있다. 초점 없는 시선은 컴컴한 바닥 어디 즈음을 떠도는 듯 갈피를 잡지 못한다. 고를 생각이 없는 것이다. 덕분에 붕어빵 주문 순서가 밀렸다는 생각이 들자 그게 뭐라고 살짝 부아가 치민다. 더 고민할 것 없이 조금만 사가 보자는 생각으로 천 원어치를 담아 달라 했다.
"안녕히 계세요"
주인아주머니의 감사합니다가 리어카 비닐 밖으로 새어 나오며 흩어졌다. '잉어빵'이라며 고집스럽게 붙여 놓은 리어카를 지나 집으로 향하다 문득 소년이 떠올라 뒤를 돌아봤다. 아직도 있나, 그 친구. 리어카 비닐 사이로 까만 점퍼 남자아이가 여전히 '리듬'을 타고 있다. 소년은 붕어빵 아주머니를 아무런 표정도 없이 바라보다 다시 바닥을 훑어본다. 손님이 아니구나. 틀림없이 아들이다 싶었다. 내 멋대로 그렇게 판단해버렸지만 그게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익숙한 느낌이 났다. 누군가 그때 내 모습을 봤다면 저랬다고 말했을까.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췄던 어머니와 몇 개월 만에 연락이 닿은 건 중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 즈음이었을 것이다. 나는 외가 쪽 식구들 몰래 오라는 엄마의 전화 목소리에 이제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가는 동생 손을 잡고 버스를 탔다. 낯선 번화가를 지나 한적한 길에 접어드니 어머니가 일러준 정류장이 나왔다. 버스가 서긴 서되 지나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는 외진 길가. 보호색이라도 칠한 것처럼 있는 듯 없는 듯 거리에 스며든 수예점 하나가 눈에 들었다. 영업을 하긴 하는 건지 싶은 가게 쇼윈도에서 이마에 손을 대로 안을 들여다보니 부쩍 수척해진 어머니가 들어오라며 손짓을 하고 있었다.
"엄마, 여기서 뭐해?"
"어어, 엄마 친구 가겐데. 여기서 일 도와주고 있어"
끼니를 제대로 못 먹은 건지, 마음고생을 해서 그런 건지. 아들 둘 나몰라라 행방불명됐던 몇 개월을 어떻게 할 거냐고 따져 물어야겠다던 결심은 다크서클 속에 퀭하니 솟은 눈을 보고 사그라져 버렸다. 길가에 다니는 사람들은 이제 다들 두터운 옷을 껴입고 다니는데, 가게 안에도 뭉실뭉실한 털실 뭉치가 그득한데, 어머니는 냉골 바닥에 앉아 뜨듯한 옷 한 벌 입고 있지 않았다. 이러려고 우릴 외갓집에 맡겨 놓고 연락을 끊었냐며 속상한 마음을 털어버리고 싶은데, 그게 입 밖으로 잘 나오질 않았다. 우리가 추울까봐 '특별히' 틀었다는 난로 앞에서 나는 그저 엄마가 간간이 던지는 질문에 짤막하게 대답만 할 뿐이었다. 무거운 침묵이 끊임없이 내려앉았다. 그나마도 아직 철이 없는 동생이 가게 안을 돌아다니며 부시럭 대지 않았다면 어색한 분위기에 압살 당할 것 같은 기분이랄까. 바쁘게 돌아가는 가게였다면 조금은 달랐을지 모르겠지만 어머니가 지키고 앉은 그곳에는 구경하러 들어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저 지키고 있을 뿐인 수예점. 큰 아들은 그저 속상한 마음과 안타까움이 뒤엉켜 주머니 속에 두 손을 꾹 눌러 넣은 채 애꿎은 바닥만 툭툭 차 댔다.
그때 그런 다짐을 했다. 앞으로 내가 크면 엄마를 이런 곳에서 일하게 만들지 않겠노라고. 훗날 내 아내가 될 사람도 이렇게 일을 시키지 않겠다고. 설령 그게 당신께서 자초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이렇게 만들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린 마음에도 어떡해서든 열심히 벌어서 내 가족들이 따뜻한 집에 있게 하고 싶었다. 그게 소중한 우리 엄마를 이런 '골방'에 처박히게 만든 아버지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마주한 어머니 앞에 큰 아들은 들썩이는 감정을 애써 묶어두고 파르스름한 독기를 별러내고 있었다. 붕어빵 리어카 안에 있던 소년처럼, 무뚝뚝하게 뚱한 표정으로.
어른이 되기까지 나를 키운 건 그때 이후로 자생한 '독'이었다. 벌렁 드러눕고 싶은 좌절감이 짓누를 때면 나는 그 날 그 수예점의 적막함을 떠올렸다. 아무리 어렵고 힘겨워도 꺾일 수는 없었다. 목표로 했던 결과가 아니라면 차라리 판을 깨는 한이 있더라도 질 수는 없었다. 왜? 그렇지 않으면 내게는 티끌 하나 조차 남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가진 거라곤 부랄 두 쪽뿐인 남자를 생의 전부를 걸고 바라보는 가족들마저 지켜주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비참한 패배는 없을 거라고 믿었다.
리어카 소년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내가 보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에서 별 걱정 없이 사는 아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어미가 생활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진 모습을 보고 자란 아들이라면 한순간에 알아차릴 수 있는, 독특한 색채를 가진 느낌인 것이다.
화가 났을 테지. 추운 날씨에 리어카를 끌고 다니는 어머니, 왜 이러냐는 말쯤은 무시하고 손을 붙들고 집으로 가고 싶었겠지만 그만한 경제력이 있을 리 만무하니. 그렇다고 곰살 맞은 말주변도 없고, 특별히 도와 드릴만큼 힘이 세거나 손재주가 있지도 않을 터. 그저 같이 있는 것 말고는 어머니를 도울 수가 없는 스스로가 안타까운 것이다.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어 하릴없이 온몸을 흔들며 속상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 친구도 역시 다짐하지 않았을까. 조금만 더 크면, 내가 어른이 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이렇게 내몰지 않겠다고. 무슨 짓을 해서라도 어머니만큼은, 내 아내만큼은 따뜻한 거실에서 편안히 연속극을 보게 해주겠노라고. 소년의 경직된 얼굴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아버지가 만든 나라, 어느 광고에서 나온 멋진 카피다. 내 처자식은 굶기지 말아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새벽 별 보길 마다하지 않고 타국 땅에서 뒹구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던 우리 아비들이다. 여태껏 삼십 년의 넘는 시간을 '아들'로서 살아오다 이제 갓 '아버지'에 입문한 초보가 보기에 선대가 세운 금자탑은 실로 경외롭다. 지금과는 직접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가난 속을 헤쳐나온 '아들'이 '아버지'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비를 버텨왔을지 짐작하려니 아득할 뿐이다. 당신만의 꿈을 갖는 것조차 사치였을 것이다. 그저 삼시세끼 제대로 먹여줄 수 있는 '아버지'가 그 시대를 달리던 아들들에게 소실점이지 않았을까. 대한민국의 지금을 만들어낸 세대는 그 어떤 '아버지'들보다 거세게 질주한 '아들'임을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요즘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에 걱정이 서려있는 이유가 혹시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고생을 모르고 살아온 화초들이 과연 우리 세대가 했던 것처럼 치열하게 살아낼 수 있을까, 세계 어디에도 없는 '한강의 기적'을 또다시 만들지는 못할지라도 지켜내기라도 할까, 이런 우려들. 부정할 수야 있겠는가. 부족한 게 없는 세상을 누리고 사는 '아들'이 나약해지지 않을까 싶은 마음, 초보 아버지가 되고 보니 나도 내 아들에게 그런 생각을 품게 된다.
하지만 요즘을 사는 '아들'에게도, 있다. 외벌이로는 감당이 안 되는 시대에 사는 숙명이. 가난했지만 형제자매라도 많던 '아버지'와는 또 다르다. 덩그러니 집에 남겨져 텔레비전을 친구 삼아 어두워지기를 기다려야 하는 외로움이 있고, 맞벌이 생활에 부모를 빼앗긴 억울함이 있다. 바깥일을 하느라 지친 부모를 대신해 보듬어줄 할머니, 할아버지를 기대할 수 없는 공허함이 있고, 그런 부모에게 경쟁에서 패퇴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무력함이 있다. 이 시대의 '아들'은 그렇게, 그 어떤 세대보다 홀로서기에 익숙한 이들이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의 아버지가 될 '아들'에게는 외벌이가 당연하던 시대의 '아버지'에겐 없는 선연한 독이 서 있다. 전혀 다른 색의 오기가 꿈틀댄다. 보란 듯이 잘 살아야겠다는 결심이 단단히 뭉쳐있다.
사실은 대단히 슬픈 일이다. 희망은 희망이되 안타까움이 덧칠된, 상처 입은 기대다.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는 자조 섞인 푸념이 아무런 감흥이 없는 시대. '금수저' 물고 나온 이들만 승승장구하는 듯한 박탈감이 시내를 가득 메우고, 밤을 패가며 노력한다 한들 하늘을 막고 있는 '유리 천장'을 뚫어낼 자신은 점점 사라지는 세상. 그게 우리가 사는 세계를 움직이는 동력이라면 지나친 아이러니일까. 유행병처럼 번지는 맞벌이의 그늘에서 풍요 속 빈곤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틔워진 근성. 지금을 살아가는 '아들'은 이걸 붙잡고 또 한 세대의 '아버지'로서 오롯이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세대와는 또 다른 아픔과 상처를 온전히 홀로 곱씹으며 이겨낸 이들이지 않은가. 나도, 붕어빵집 아들도, '벌이'에 빼앗겨버린 어머니를 눈 앞에 두고 호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움켜쥔 사내들이다.
붕어빵 봉지를 흔들거리며 아파트 정문으로 접어들자 해피 뉴이어라고 쓴 네온싸인이 아직 걸려있다. 대책 없이 마냥 행복하게 휘갈겨 쓴 네온싸인에 헛웃음이 피식 나왔다. 내 아내는 맞벌이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소년의 소망이 어째 올해는 깨어질 것도 같은데, 행복한 한 해가 될까 싶다. 외벌이로 이제 슬슬 힘에 부친다며 뭔가 할 일을 찾아봐야겠다는 말을 며칠 전 아내로부터 들은 바다. 막상 어른이 되어 맞딱뜨린 현실은 그렇게 말처럼 슥슥 다 이루어지는 건 아닌가 보다.
"그래, 그래도 해피 뉴이어 하자, 해"
오기가 여전히 꿈틀댄다. 보란 듯이 잘 살겠다는 결심도 여태 단단하다. 생각만큼 세상이 쉽진 않지만 그래도 '우린' 아직 괜찮다. 나도, 붕어빵집 아들도. 독기 어린 질주는 아직 제대로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