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루, 축복의 찰나
그 날이라고 출근길이 상쾌하진 않았다.
미세먼지 그득한 바람에 흐트러질세라
잔뜩 힘을 준 머리카락을 붙들어 잡고
버스 정류장을 향해 달려 나가는 아침
그 날이라고 회사도 녹록하진 않았다.
연휴를 앞둔 일터가 늘 그렇듯
터질 듯 밀려 있는 메신저 쪽지와, 일과, 사람들
행여나 야근할까
속전속결에 혈안 된 동료들
그 날이라고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미국 드라마 다음 편이 궁금했고
카드 명세서를 뜯어보고 있었고
고장 난 복사기에 짜증을 내고 있었다.
지난달 오늘처럼, 똑같이
그 날이어서 오늘은 조금, 서럽기도 했다.
이 모노톤의 일상은
어쩜 이리 한 치도 바뀔 틈을 주지 않을까
어린 어른 시절 온 힘을 불사르며 지새우던 밤들은
이대로 해마 속에만 남아 있는가
거리의 음악 소리도, 깜빡이는 불빛도, 들뜬 이들의 웃음소리도
더 이상 즐거움을 간질이지 않는
올해는 그나마도 잘 보이지 않는
그 날이어서 손에 케이크를 들었다.
사야만 했다.
왜 특별한 무언가를 해야 하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건 최소한의 예의
바싹 말라 버려 부스러질 것 같은 일상에
질척거리는 버스에서 살아남은 이가 떨군
혼신의 오기(傲氣)
"아빠 왔~다"
아이가 뛰어나온다.
아내는 웃어준다.
거실에는 장난감이 널려 있었고
TV에서는 무표정한 뉴스가 말을 한다.
슈퍼마켓 봉투엔 주전부리가 들어있고
설거지 감은 절반쯤, 적당히 들어앉았다.
유별나지 않은 어느 하루가 바로
그 날
파라핀 타는 냄새를 맡고
음악에 맞춰 박수를 치고
기름진 생크림을 입술에 칠했다.
케이크를 꺼내고 즐기는 순서도
유명 브랜드 패턴만큼이나 질서 정연한
그 날
아무래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불안해서
징그럽게 평소 같은 시간을
오늘따라 유난히 멈추고 싶은
진한 연필로 데생 하며 음미하고 싶은
그 날은
무채색 일상이 고흐의 카페 테라스로 변하는 단 하루
별 볼일 없던 어제 그제도 행복임을 눈치채는 축복의 찰나
크리스마스, 전야 (前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