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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The Ske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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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urquoise Dec 25. 2015

그 날이라고 해서

단 하루, 축복의 찰나

그 날이라고 출근길이 상쾌하진 않았다.

미세먼지 그득한 바람에 흐트러질세라

잔뜩 힘을 준 머리카락을 붙들어 잡고

버스 정류장을 향해 달려 나가는 아침


그 날이라고 회사도 녹록하진 않았다.

연휴를 앞둔 일터가 늘 그렇듯

터질 듯 밀려 있는 메신저 쪽지와, 일과, 사람들

행여나 야근할까

속전속결에 혈안 된 동료들


그 날이라고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미국 드라마 다음 편이 궁금했고

카드 명세서를  뜯어보고 있었고

고장 난 복사기에 짜증을 내고 있었다.

지난달 오늘처럼, 똑같이


그 날이어서 오늘은 조금, 서럽기도 했다.

이 모노톤의 일상은

어쩜 이리 한 치도 바뀔 틈을 주지 않을까

어린 어른 시절 온 힘을 불사르며 지새우던 밤들은

이대로 해마 속에만 남아 있는가

거리의 음악 소리도, 깜빡이는 불빛도, 들뜬 이들의 웃음소리도

더 이상 즐거움을 간질이지 않는

올해는 그나마도 잘 보이지 않는


그 날이어서 손에 케이크를 들었다.

사야만 했다.

왜 특별한 무언가를 해야 하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건 최소한의 예의

바싹 말라 버려 부스러질 것 같은 일상에

질척거리는 버스에서 살아남은 이가 떨군

혼신의 오기(傲氣)


"아빠 왔~다"


아이가 뛰어나온다.

아내는 웃어준다.

거실에는 장난감이 널려 있었고

TV에서는 무표정한 뉴스가 말을 한다.

슈퍼마켓 봉투엔 주전부리가 들어있고

설거지 감은 절반쯤, 적당히 들어앉았다.

유별나지 않은 어느 하루가 바로

그 날


파라핀 타는 냄새를 맡고

음악에 맞춰 박수를 치고

기름진 생크림을 입술에 칠했다.

케이크를 꺼내고 즐기는 순서도

유명 브랜드 패턴만큼이나 질서 정연한

그 날


아무래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불안해서

징그럽게 평소 같은 시간을

오늘따라 유난히 멈추고 싶은

진한 연필로 데생 하며 음미하고 싶은

그 날은


무채색 일상이 고흐의 카페 테라스로 변하는 단 하루

별 볼일 없던 어제 그제도 행복임을 눈치채는 축복의 찰나


크리스마스, 전야 (前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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