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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굿모닝선샤인 Mar 19. 2022

여자로 산다는 것

여자는 사라지고 엄마만 남다

꽃을 좋아하는 여자였다. 3월 14일 화이트데이가 되면 교무실로 커다란 꽃바구니가 배달되었다. 분홍빛 수줍음을 가득 물고 내 앞에서 웃고 있던 장미꽃들. 그 사이에 조그만 카드가 꽂혀있었다. 카드를 열어보니 여섯 글자가 적혀있었다. ‘사랑해. 고마워.’      


펄이 들어간 복숭아색 섀도를 눈가에 펴 바르고 다홍색 은은한 립스틱을 잔잔하게 발랐다. 살랑대는 미니스커트를 걸쳐 입고 캠퍼스를 걸었다. 아름다움을 갖춰 입고 모방하고 찬양할 수 있는 여자라서 즐거웠다. 벚꽃이 한들거리며 우아하게 춤추는 그 거리를 친구들과 까르르 웃음소리를 흩뿌리며 거닐던 그때는 여자라는 것이 좋았다. 여자라서 그 봄날의 아름다움을 더 만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뚝뚝한 남자들보다, 벚꽃잎 같은 작은 아름다음을 발견하고 열렬하게 반응할 수 있는 감성을 당당하게 발산할 수 있어서 여자로 태어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꽃을 받는 것이 당연하고 꽃을 통해 사랑을 전달받을 수 있는 여자라서 좋았다.      



결혼과 출산  나에게 여자는 사라지고 엄마만 남았다. 화이트데이에 꽃은  씻고 찾아봐도  송이도 없었다. 다홍색 립스틱은 사라졌고 짧은 스커트는  이상 입지 않았다. 벚꽃을 찾아 걷던 감성도 사치가 되었다. 엄마라는 무게에 짓눌려  안에 ‘여자 '아주 작은 흔적으로 사라졌다.     


결혼 후 첫 번째 화이트 데이에 꽃바구니가 아닌 실용적인 화분이 등장했다. 그래도 그때는 큰 율마 화분에 ‘지유 엄마 사랑해’라는 메시지가 적혀있었다. 그다음 해는 작은 꽃다발로 변질되었고, 몇 해가 더 지나자 꽃 한 송이로 소멸했으며 올해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조차 그날이 그날인지 인지하지 못한 채 바쁜 워킹맘으로 하루를 보냈다. 더 이상 꽃이 없냐며 반발할 의지나 권리조차 남지 않은 나의 여자로서의 상태에 조금 슬펐다.     



엄마가 된 후 여자로 꾸미는 즐거움은 사치가 되어 실용적인 청바지와 헐렁한 맨투맨 티셔츠, 편한 운동화를 신게 되었다. 결혼 전에는 한 번도 7센티 힐에서 내려온 적 없던 나. 한 번도 치마 없이는 외출하지 않던 나였다. 엄마라는 자리는 내 모든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고 여자로서의 내 정체성을 스스로 내려놓게 만들었다. 한동안은 그게 당연하지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보느라 화장할 여유도 없었고, 수시로 쭈그려 앉아야 하는 엄마 역할에 치마는 어울리지 않았다. 하루 종일 아이 뒤를 따라다녀야 하는데 운동화만 한 게 어디 있겠나.


나는 화려함이나 아름다움을 내려놓고 편함, 실용적, 무난함. 가성비 이런 단어를 쫓게 되었다. 내 옷장에 노란색, 파스텔색은 사라지고 회색, 검은색 무채색만 남았다. 내 영혼의 색깔이 그렇게 서서히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씨 화창한 날, 좀 꾸며 입고 싶은 마음에 옷장을 한참 바라보는데 무채색의 진열을 바라보고 마음에 물방울이 차올랐다. 잊고 있던, 벚꽃 아래 웃음이 가득했던 나, 하늘거리는 시폰 원피스를 입고 연한 하늘색 카디건을 걸치고 사진을 찍던 내가 떠올라서. 조금 그리웠다.     



여자는 모두 엄마가 되기를 종용받는다. 출산을 하고 엄마가 돼야 여자로서 사회적 의무를 다한다는 시선이 싫었다. 그래서 결혼을 미루고 그 시선을 거부하고 싶었다. 여자로 태어났으면 당연히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순리. 그 굴레에 갇히기 싫었다. 그랬던 나도 결국 모성애 같은 것에 굴복되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만……. (32살 결혼 적령기에 예쁜 조카의 탄생은 더 늦게 결혼할 거라는 굳은 결정을 산산이 뒤집어 바꿀만한 대단한 타이밍이었다.)     



워킹맘 한 달 차, 엄마와 직장인 역할 두 가지를 소화하기가 벅차다. 마치 커다란 트럭을 씹어 먹는 것처럼, 큰 철근 덩어리를 입안으로 밀어 넣는 듯 힘겹다. 바쁜 출근길에도 두 아이 아침을 꼭 챙겨 먹여야 한다. 점심에 맨밥만 겨우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는. 5시 반 집에 오자마자 무거운 어깨를 끌어올리며 겨우겨우 저녁을 챙겨 먹인다. 몇 단어 말하지 못하는 둘째의 입에서 ‘엄마 밥밥 밥’ 외치며 배를 움켜쥐는 아들을 위해서. 그렇게 꾸역꾸역 아이들 밥을 먹여주고 나면 그때서야 6시 반에 남편이 유유히 들어온다.      



똑같이 일하는 데 왜 엄마는 아침저녁을 다 챙겨주고 가방도 챙겨주고 옷도 챙겨 입히고 모든 일을 다 해야 하는가. 불만이 얼굴에 가득 피어난다. 채 씹어 넘기지 못한 철근 덩어리 같은 것이 목구멍에 꽉 막히는 듯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이 사회에서 엄마에게 부여한 역할의 무게가 나를 점점 짓눌러 진흙바닥에 몸이 박혀 내려가는 것 같다. 내 머리까지 땅속에 묻혀도 사회는 전혀 어떤 도움도 주지 않을 것을 안다. 결국 개인의 능력과 의지에 맡겨서 스스로 땅을 파고 기어 나와야 한다고 타박할 것이다. 육아를 도와줄 사람 하나 없냐고, 친정엄마나 시어머니가 멀리 산다고 하니 그것도 다 능력이라며 알아서 하라고 다그치는 관리자처럼. 아이들은 돈을 주고 다른 사람 손에 맡기면서 나는 나대로 뼈 빠지게 일하고 있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인가. 누구를 위해서.      






남자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두 번이다. 첫 번째는 고등학교 때 기차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을 때 엄마가 안 된다고 여자가 어딜 위험하게 혼자 가냐고 뭐라고 했을 때였다. 내가 만약 남자이었다면 한 달 동안 무전여행을 가도 아무 걱정 없이 자유를 즐겼을 거다. 대학교 엠티 때마다 부모님 허락을 받기 위해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었을 거다. 전 세계를 누비며 자유롭게 날아다녔을 거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자유 앞에 당당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조심하라는 말을 귀에 새겨지도록 들어야 했고 나 스스로도 몸을 사려야 했다. 남자였으면 수많은 도전 앞에 경쾌하게 걸어갔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는 월급 명세서를 마주했을 때였다. 5년 만에 받는 첫 월급. 그 숫자를 보고 한숨이 나왔다. 일할 맛이 나지 않았다. 하루하루 버티며 일하고 있었는데, 월급이라도 받으면 성취감이나, 보상받는 기분이라도 들지 알았다. 그런데 내가 보게 된 숫자는 너무나 기막히게 작았다. 똑같은 시간을 똑같은 체력과 정신력을 들여서 하는데 남편과 내 월급의 차이는 두 배가 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교사가 아니라 일찌감치 삼성이나 현대 같은 대기업에 갈걸. 인문학과가 아니라 공대에 갔으면 벌써 집 두 채쯤 샀을 거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에게 최고의 직업은 교사라는 말을 듣고 자라났고 엄마의 소원도 교사라고 했고 내가 생각하기에도 여자로 살면서 교사가 되는 것이 나쁘지 않아 보였다. 안정적이고 육아휴직 3년이라는 메리트도 컸고 나중에 연금도 나오니 그런 것들이 달게 느껴졌다. 그런데... 내가 남자였다면, 교사라는 직업을 선택했을까. 우리나라는 남녀 월급이 너무 큰 차이가 난다. 똑같은 능력을 가졌더라도 교직에는 다수의 여자들이 상주하고 대기업에는 온통 남자들 천지다. 그 뚜렷한 구분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사회가 여자와 남자의 일을 분리하고 여자라면 이래야지 하는 편향된 통념들이 우리를 그렇게 구분 짓고 남자에게 더 큰돈을 주는 차이를 만드는 것 아닐까.         



'사라진 여자를 찾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단 몇 시간이라도 여자로 살고 싶다.  잃어버린 여자를 찾기 위해 토요일 새벽 24시 무인 카페에 앉아있다. 라테 한잔을 시키고 잠시 엄마 가면을 내려놓는다. 살랑거리는 봄 원피스를 장바구니에 넣는다. 이번 봄에는 벚꽃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거리를 찾아 혼자서라도 꼭 걸어야지. 아이를 안고 가더라도 꽃 원피스를 입어야지. 이제는 더 이상 찍기 싫은 내 사진도 담아봐야지. 더 나이 들어서 주름져 가는 내 얼굴을 슬퍼하지 않도록. 하루라도 젊은 날, 반짝이는 내 모습을 담아야지. 이런 상상을 하며 새벽 6시 반 호수공원에 떠오르는 해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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