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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 Dec 18. 2022

12월 17일 : 티하우스를 찾아서, 애프터눈 티

날이 밝았다. 오늘은 어제보다 날이 흐리고 더 추웠다. 촘촘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매일 더 춥기를 기도한다. 그게 궁금해서 이 여행을 오기도 했으니까.




페어먼트 샤또 레이크 루이스의 조식. 눈에 보이는 면적이 전부이지만 알차게 준비되어있다. 사실 조식이 엄청나게 많을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호텔을 가든 내가 먹는 것들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샐러드, 우유, 오렌지주스, 빵, 잼, 버터, 써니사이드업.




푸딩이 있길래 가져왔는데 정말 노맛... 하지만 서비스가 무척 좋았고 나머지 맛들은 깔끔했다. 내일 훈제 연어를 더 먹어야지.




조식 먹고 호텔 산책. 이렇게 큰 트리가 가운데에 있다. 뭔가 겨울왕국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카펫이 매우 멋지다. 바닥이 이렇게 큰 포인트가 될 수 있구나. 살면서 바닥 꾸며볼 생각을 안 했는데 영감 많이 얻고 간다.









호텔 산책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서 바깥으로 나섰다. 예상보다 더 흐린 아침이었다. 어제는 정말 맑은 날씨였구나.





조상님이 아직 때가 안 됐다고 오지 말라고 손사래를 칠 것 같은 호수 뷰... 사람도 적었다. 아니, 없었네. 그래서 좋았다. 내가 이 여행을 온 건 이런 풍경을 보고 싶어서였으니까.




어제 기념품 가게 아저씨가 추천했던 티하우스 산책길을 나섰다. 아니, 정확히는 트래킹 코스였다. 처음 초입에 들어섰을 때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 방에 들어와 옷을 다시 정비했다. 조금 걷다 보니 땀이 줄줄. 산행이었다!




눈이 쌓인 미러 레이크




왕의 남자 ost를 들으며 걸으니 조선시대 첩첩산중을 걷는 것 같은 느낌. 온통 세상이 희다. 자극이 없어서 좋다. 계속 눈이 내리고 있었다.




고요하다. 티하우스는 닫혀있었다. 알고 올라왔지만 어쩐지 쓸쓸했다. 여름의 레이스 루이크를 계속 상상하게 된다. 분명한 건 이 희고 단순한 길을 혼자 걸을 수는 없었겠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겨울에 이곳을 올 만한 가치가 있다.









살면서 처음으로 속눈썹이 얼어붙었다. 신기해서 기념사진을 남겨보았다. 산행 중에는 더워서 경량 패딩으로도 충분히 운행을 할 수 있었다.



하산을 할 때쯤 내 얼굴. 온몸 곳곳에 눈이 쌓였다. 패딩의 단점은 방수가 되지 않고, 물을 머금는다는 것이다. 다음엔 방수되는 패딩 입어야지. 옷이 많다 많아... 생각이 난 김에 캘거리에서 모아서 택배로 보내야겠다. 그러면 캐리어에 자리가 훨씬 많이 생길 것 같아. 기념품도 다 보내야지.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숙소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애프터눈 티는 최대한 깔끔한 차림새로 먹고 싶었음. 실내니까 자신 있게 귀를 내놓고 모자를 썼다.






날은 흐렸지만 큰 창 덕분에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던 애프터눈 티 장소. 차를 마시기에 좋은 날씨였다.




한국에서 미리 예약해둔 코스. 이런 것들이 하루하루 현실로 다가오니 신기하다. 근데 이 일기를 쓰는 지금의 나, 좀 감기에 걸린 것 같아. 자꾸 재채기가 나오네. 산행이 길어서 그랬던 것 같다.





정말 맛있었던 스콘과 클로티드 크림. 집에서 친구들에게 충분히 대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 유명한 곳 있으면 한번 다녀와야지. 집에 마침 차도 많은걸? 연식당 애프터눈 티 오픈합니다.




너무 달아서 반 이상은 먹을 수 없었던 디저트 플레이트... 특히 저 노란 케이크가 미친 듯이 달았다. 우리는 홍차를 세 번이나 리필해서 마셨다. 차가 무척 맛있었음.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문어모양 바라클라바를 쓴 과수. 과수의 패션 세계를 가까이서 구경하는 맛이 쏠쏠하다.




애프터눈 티가 배불렀던 우리의 산책.



아주 먼 호수 중심까지 걸었을 때 느낀 기분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영화 그랑블루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바다 밑은 너무 아름답고 고요해서, 위로 올라갈 이유를 찾기 어렵다고. 그 말이 떠오를 정도로 희고 먼 산 풍경이었다. 나도 그처럼 따뜻한 호텔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저 풍경으로 걸어 들어가 콱 죽어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다 이런 섬뜩한 상상을 하게 되었을까? 이 기분을 과수에게 말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과수가 나를 멀리서 불렀을 때 그 소리를 잘 못 들었다. 풍경이 주는 느낌이 너무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이런 마음이 우울에서 비롯된 감정이 전혀 아니라는 걸 누군가는 이해해주길 바란다. 그저 큰 풍경 앞에 놓인 나의 덧없음을 느꼈을 뿐이다. 당부하자면 나는 정말로 슬프지 않았다는 것.


그 누구도 공감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은 도리어 내 고유의 감정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생각을 이해받을 필요는 없지. 근데 나는 왜 이해해주길 바란다는 말을 썼을까?




나는 잘 지냅니다.





돌아오니 푸른 밤이었다. 흰색이 이토록 푸르게 보일 수 있다는 걸 이번 여행을 통해 깨달았다.





사진 찍자고 재촉하는 극성 엄마와, 효녀. jpg




숙소에 돌아와 엽서를 쓰기로 했다. 그러니 갑자기 무척 많은 사람이 떠오른 것이다. 본격적으로 책상에 자리를 잡고 쓰는데 갑자기 허기가 졌다. 조리도구가 없는데 라면을 먹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뽀글이 만드는 법’을 검색하여 열라면을 끓였다.








결과는 대 만족! 5분간 익히니 면의 익힘 상태도 완벽했고, 국물 맛도 깊고 좋았다. 열라면은 사랑이다...





이어서 후식 부수기






캐나다의 빈티지 포스터를 모아 엮은 엽서집이다. 낱개로 사면 비싼데 엽서집 형태로 사면 가격도 적절하다. 친구와 어울리는 사진들로 골랐다. 이걸 핑계로 한국에서 일요일 아침을 맞을 친구들과 연락하는 재미도 있었다. 신기하게 그립지만 당장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내년엔 정말 사람을 안 만나고 싶어.





저녁에 일도 했다. 메일 두 통 쓰기.



감기 기운이 느껴진다. 몸을 따뜻하게 하고, 푹 자 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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