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연 Dec 30. 2022

12월 29일 : 캘거리 안녕

아침부터 분주히 캐리어를 챙겼다. 과수는 '짐이 줄어든 듯, 줄어든 것 같지 않아'라고 말했다. 과연 그 말이 사실이다. 많은 것들을 소비했고 그만큼 또 새롭게 들였다. 과수에겐 비밀로 한 나만의 크고 작은 소비가 많이 있었다... 내가 물욕이 많다는 것은 여행 올 때마다 늘 무겁게 체감한다.




눈 지옥길의 서막. 숙소를 떠나는데 눈이 흙과 섞인 밀크티존이 우리를 괴롭게 했다. 밴프 제설은 다운타운 메인 도로에만 되어있다. 진심 게임으로 치면 스턴 걸린 것 같은 상태다. 발에 껌 붙은 것처럼 무거운 걸음. 이것이 캘거리에서 더한 지옥길로 펼쳐질 거란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한 채... 짐 싣는 곳으로 향했다.






출발 전 먹은 식사는 수프였다. 과수는 '너와 수프를 먹게 되어서 좋아'라고 말했고, 나는 '수프 전에 먹었잖아?'라고 딱딱하게 대답. 알고 보니 속 뜻은 '이 수프를 오늘 밴프를 떠나기 전에 너와 함께 먹으니 좋아'였고 나는 여전히 말 그대로 '수프??' 하는 정도의 마음이었다. 녀석이 째려본다. F와 T의 모먼트였다. 


과연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맛이었다. 그녀가 수프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태양을 피하는 방법

이런 사진 본인은 싫어하지만 나는 웃기고 귀여워서 좋아함... 떠나는 날의 밴프는 크리스마스처럼 화창했다. 우리는 둘 다 맨 앞자리에 앉아서 간다.




버스기사 아저씨 몰래 찍은 셀카. 들켰으려나? 이곳은 넓디넓은 이민자의 땅이라서, 아니면 내 행색이 수상해서 그런지 나를 한국인으로 보는 사람이 잘 없다. 과수는 나보다 그래도 멀쩡하게 하고 다녀서 귀여운 한국 아가씨 같은데 나 때문에 괜한 오해를 같이 산다. 종종 처음에는 영어를 하다가 우리의 한국어를 듣고 한국말하는 사람 만나면 우리가 하는 말. '저희 한국인처럼 안 보여요?' 그의 말에 의하면 워낙 한국인처럼 생겼는데 안 한국인인 사람도 많았어서 짐작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머쓱. 그런 걸로 믿겠어요.





캘거리로 가는 버스는 정직한 시간과 위치에서 우리를 내려줬다. 유쾌한 버스기사 아저씨였다. 교통이 더없이 잘 되어있는 캘거리. 지상철을 타고 숙소에 가며 이런 대화를 했다.


무: 역 이름이 sunnyside야!

연 : ?

무 : ...

연 : 아~ 너무 귀엽다고?

무 : 됐어...

연 : sunny side up 떠올라서 너무 귀엽다~

무 : 그만해라.




역에서 숙소까지 걸어가는 길. 지옥길이 따로 없다. 제설이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캐리어를 끌고 가는데 정말 밭 가는 사람처럼 자국을 진하게 남기면서 걸었다. 근력 운동이 따로 없다. 내가 팔 힘이 유난히 약하다는 걸 깨달은 하루.




도착한 숙소는 극락이 따로 없었다. 진심 내가 머물러본 숙소 중 손에 꼽히게 큰 크기. 호텔보다 좋던걸. 백룸이 생각나는 머쓱한 흰 구조였지만 백룸이 아니니 괜찮다. 퀸사이즈 침대가 각각 들어있는 침실이 두 개 있었다. 과수가 옆방에 있는데도 무서울 정도로 넓다.





거의 호텔방처럼 아늑하고 아름다운 숙소. 유리로 된 책상도 있다. 그 책상에서 이 글을 적는다. 이곳에 와서 나는 늘 내복을 피부처럼 입고 다닌다. 






전날 저녁을 먹지 않고, 아침은 가볍게 먹은 채로 노동을 했던 터라 이른 저녁에 벌써 허기가 졌다. 검색해보니 가까운 곳에 Kim's katsu&roll이 있었다. Kim에서 짙은 코리안의 향기를 맡은 나. 돈까스를 파는데 한국 김 씨가 아닐 리가 없다. 그렇다고 날 보는 한국인처럼, 나 또한 섣부른 판단은 금물. 기대를 안고 저녁을 사러 걸어갔다. 과연 맑은 날씨. 달이 떠있었다. 쉿, 몽환의 숲.




고등학교. 아주 넓은 운동장.






과연! 카츠이다. 나는 돈까스를 무척 좋아한다. 뭐랄까 나의 넘버원 소울 푸드랄까. 저 넘치는 모짜렐라의 모양이 어쩐지 한국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끄덕) 서체 귀엽고 마음에 든다.


카운터에는 한국인처럼 보이지만 단정할 수 없는 외모의 사람이 서있었다. 캐나다에는 유난히 한국인 점원이 많다. 그래서 오히려 동양인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게 됨. 과수와 함께 메뉴판을 보며 신나게 토론하다가 다 먹어보자라는 심정에 모둠을 시켰다. 영어로는 assorted katsu였다. 생소한 단어에 assort... 라며 어렵게 발음해서 주문하려는 찰나 ('여러 가지의, 갖은'이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이다.) 어솔티드 돈까스요?라고 또박또박한 대답이 돌아온다. '아오, 한국어 해주시지.'라는 말이 곧바로 튀어나왔다. 한국인 앞에서 영어 할 때가 어쩐지 무척 민망하다. 





바깥이 춥다며 미소 된장국을 주셨다. 포장 구성에 포함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따로 또 챙겨주신 걸 보니 그냥 이것은 마음이다. 감사함을 느끼면서 마셨다. 그리고 예감했다. 여기 카츠 맛있겠구나. 미소나 샐러드 상태를 보면 알 수 있다. 





과연. 튀김이 실하고 육질이 부드러운 그리운 카츠 맛이었다. 


내가 외국 여행을 하며 느낀 건 한식이라는 게 꼭 전통적인 한국 음식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실제로는 한국에서 좋아하던 음식에 더 개념이 가깝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한국에서도 먹는 게 다르니 한식의 범주가 다를 것이다. 내게는 파스타, 돈가스도 한식에 포함된다. 


꽤 오랜만에 젓가락으로 식사를 했다. 반찬도 풍부하게 들어있었고, 가격도 18달러로 저렴했다. 무엇보다 저 왕새우를 보세요! 우리는 54달러에 샐러드를 먹은 기억이 있어서 그것보다 싸면 뭐든 칭찬부터 하고 본다.





먹어보고 싶었던 캐나다 드라이. 카츠랑 정말 잘 어울리는 맛이다. 이것도 서비스로 챙겨주셨다. 눈물이 납니다 정말로... 구글 리뷰 남기러 갑니다. 다들 캘거리 가면 kim's katsu & roll 꼭 가주세요. 캐나다 드라이는 마운틴듀 같은 맛이 난다. 사이즈가 마침 부담이 없어서 마트에서 6캔을 사 왔다.




배부른 겸, 산책으로 마트를 갔다. 1.4km로 적당히 거리가 있는 곳이었지만 둘 다 잘 걷는 체질이기에 열심히 걸었다. 도중에 무서운 길이 있었지만 둘이어서 괜찮았다. 과수가 떠난다니... 잘 가라, 과수야.(이러면 또 째려보겠지.) 가지 마라, 과수야.(이러면 또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겠지..)






재스퍼보다 더 싼 필름을 발견했다. 한국의 반값 같은 시세. 나는 다 쓸어 담으라 했다. 셔터 한 방에 돈이 드는 세상이라면, 더 싼 클릭이 더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게 용기를 주지 않겠니. 많은 것을 담아서 세상에 보여주길 바라.




엽서지옥. 귀여운 것들이 많다.








지금 내가 일기를 쓰는 풍경이다. 슬쩍 쌀쌀한 것 같아 겉옷을 입었다. 저 옷은 어디서 났냐고? 룰루레몬 세일 때 사 왔지... 정말 못 말린다. 하여튼 내일도 재밌는 하루가 될 것 같아 기대가 된다. 영화 패터슨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없으면 돈 주고 다운 받아서라도 볼 거다. 

매거진의 이전글 12월 27일, 28일 : 이렇게 연말이라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