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행복하길 바라
"야, 내가 이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너무 쌤통이라서 너한테 하는 거야.
걔 지금 처가살이하면서 지방에서 주말부부 한다더라"
그와 내가 만났던 것은 친구 소개의 소개팅을 통해서였다.
당시에 그는 나보다 8살인가가 많았었고, 미국 보스턴에서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인천에서 의대를 다니고 있었다. 이래저래 돌아오느라고 그는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또래들은 레지던트를 할 나이에 학부생이었다. 내 친구와 친구의 남자친구, 그리고 그가 함께 있을 때, 내 친구는 나와 소개팅해보지 않겠냐고 했었고 그때 내 사진을 보고 그는 생각보다 또라이 기질이 있을 것 같다고 만나보겠다고 했었다.
그렇게 그와 나는 삼청동의 만두집에서 처음 만났고, 그 이후로 1년 조금 넘는 시간을 만났었다.
나는 그의 지성과 장난기 있는 모습을 좋아했다. 의대생을 만나는 것 치고는 부지런히 만났고, 그가 과외를 하러 서울에 올 때는 서울에서 만나고, 주말에는 내가 인천과 서울을 오가며 정말 부지런히 연애했었다. 막차시간을 놓쳐서 택시를 타고 집까지 오기도 하고 정신없는 연애였다.
집에서 그가 있는 1호선의 저 끝 역까지 가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고, 아무리 급행이라고는 하지만 마음은 항상 바빴다. 그렇게 인천까지 가서 먹는 닭강정이 얼마나 맛있게 느껴지고, 차이나 타운이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지금 보면 그냥 다 조악해 보인다.) 서울과는 다른 인천의 느낌은 생소하면서도 전혀 다른 세상 같았다. 그 뚝 떨어진 곳에 그와 나 둘 뿐이었다.
그는 오랜 유학생활 동안 외로웠고, 매 학기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 치열하게 공부하고 그곳에서도 한국 학생들을 과외해 가면서 생활비를 벌었었다. 그 생활 안에서 그는 항상 혼자였고, 그래서 안정적이고 단란한 가정을 만들고 싶어 했다. 아이들도 참 좋아했다.
본인이 느낀 나이 많은 아버지의 부족한 점, 항상 외부 일정으로 바빴던 아버지의 빈자리를 느끼면서 자란 그는 본인은 안정적으로 의사 일을 하면서 가족과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싶고, 다정한 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항상 말했었다. 지금의 나라면 약간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성향이긴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의 옆에서 조용히 앉아 함께 만들 가능성이 있는 오순도순 나의 가족을 상상했다.
한 가지 특이한 부분은, 그의 가족문화가 나의 집과는 많이 차이가 난다는 것이었다.
그는 누나가 두 명인 집의 막내아들이었고, 나이 많은 부모님의 늦둥이 아들이었다. 누나 두 명은 모두 의사였고 한분은 그가 공부하는 학교의 교수였다. 교수인 아버지와 가정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가족 안에서 머물게 되었었고, 그도 의대를 가게 되면서 가족이 그의 근원이자 우주였다. 그들을 거역해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었고, 그들의 등에 업히면 그 분야의 안 닿는 연줄이 없었다. 두 명의 누나의 평탄하지많은 않은 개인사에도 그는 항상 중재자의 역할로 끼어 있었고, 어린 조카가 아빠 대신에 삼촌을 찾을 때면 무조건 달려갔다. 뿐만 아니라 누나들의 남편 대신의 자리에도 그는 항상 함께 했고, 누나들을 마치 이모처럼 엄마처럼 따랐다. 그러면서 우리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그의 가족에게 노출되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너무 뻔한 이야기인데,
나를 만나보고 이야기해 본 누나들이 그에게 한 이야기는 이제 아침드라마에서도 보기 힘든 대본처럼
'열쇠 3개 해줄 수 있는 여자 아니면 만나지 마라.'
아니면 최소한 의사나 교사여야 하고, 여자가 의사인 남자의 등골 빼먹으면서 사는 꼴은 못 본다는 게 그의 가족의 입장이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시나리오였지만,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나쁜 것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울며 매달려보고 몇 번은 인천을 다니면서 그를 붙잡았다. 이제 와서 말이지만, 내가 그를 잡고 싶은 생각의 저 밑에는 나도 의사 남편을 만나서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없었다고 하면 너무 거짓말 일 것 같다. 똑똑하고 너드미가 있는 남자와 또라이 기질이 있는 여자의 결혼생활은 나의 상상 속에서는 시트콤 같을 것이라고 그려져 있었다.
그 이후로 몇 번의 지지부지한 이별과 다시 만남이 있었고, 나는 지쳤다. 누나들의 등쌀에 밀려서 헤어지자는 그의 우유부단이 싫었고, 본인 스스로 인생을 선택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이 무능력해 보였다.
너의 인생이 시궁창으로 떨어지고 있는데,
거기에 나의 인생까지 더하고 싶지 않아.
그만하자.
이게 내가 그에게 뱉은 마지막 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고,
그를 소개해 준 나의 친구는 그때의 남자친구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때 까지도 나는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마도 어느 날 카페인지 어딘가 빛이 잘 들어오는 하얀색 테이블 위에서 친구가 대뜸 던진 말이
"걔 지금 처가살이하면서 지방에서 주말부부 한다더라"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나와 헤어진 후, 같은 학교의 의학전문대학원 신입생을 만나서 사귀다가 결혼했다. 의대 졸업 후, 지방에서 페이닥터를 하는 의사가 되었고, 그와 결혼한 여자는 결혼 후 임신과 출산을 하면서 의학 대학원 졸업이 밀렸다. 그러면서 여자는 서울의 친정에서 지내면서 공부와 육아를 하고, 남편은 지방에서 혼자 살면서 돈을 벌고 있었다. 주말마다 서울에 올라오지만 부부가 사는 집이 아니라 처가에서 주말을 보내고 다시 지방의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한다고 했다.
"그 얘기 듣는데 내가 너무 고소하더라, 그때 너한테 열쇠를 해오라니 어쩌니 하더니, 걔 살고 있는 꼴을 봐봐. 기껏 돈 벌어서 처가 눈치나 보면서 지방에서 혼자사냐, 아오 진짜."
가슴에 아련하게 미지근한 피가 핏줄을 통해 퍼져갔다.
내가 봤을 때는 그와 내가 그렇게 잘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연스러운 느낌보다는 억지인 느낌이 있는 관계였다. 나는 그의 앞에서 충분히 솔직하지 못했고, 그는 자신의 허울을 너무 크게 생각했었다. 만남의 끝에 가서는 미련을 위한 미련이 생겼었고, 그의 우유부단함과 당차지 못함을 끊임없이 지적하면서 왜 그렇게 바보같이 사냐고 추궁했다. 이제는 그런 연애는 하고 싶어도 에너지가 없어서 못하지만, 그때에는 그렇게 상대방에게 나의 슬픔과 억울함을 풀어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다 지난 시간들이고, 그라는 한 사람으로 생각할 때에는 그 외로운 인생이 본인의 가족들에게 환영받는 사람을 만나서 안락하고 평온한 새로운 그의 가정 안에서 위로받기를 바랐다.
지방에서 혼자 지내면서 월급의사를 하는 일을 생각보다 버거웠다. 열심히 일한 후 서울의 처가에 온 그는 그녀의 가족이라기에는 겉도는 느낌이었고, 처가의 눈치를 보며 아내와 아이와의 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없었다. 그는 내 친구의 남편과 술잔을 기울이며, 이 생활이 힘들다고 이야기했다.
너는 진짜 무슨 팔자이길래 그렇게 항상 외롭고 홀로 멀리 떨어진 인생을 살고 있는 걸까
안쓰러움이 가득하다. 이 글을 쓰면서 그를 구글에서 찾아보았다. 나의 지난 기억을 끄집어내어서 그가 관심 있었던 과와 이름을 검색하니 그의 사진이 나왔다. 그는 현재 청주의 한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오랜만에 그의 얼굴을 보니, 뭐라고나 할까,
음......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확실히 나와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다.
그의 옆에 서있을 지금의 내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그냥 그렇게 우리는 다른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앞으로도 나는 너를 만날 일은 없을 것 같다.
나의 전 남자친구들에 대한 글을 쓰면서 나 역시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기억들과, 그 오래된 기억들을 끌어올리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다시 흠집이 나지 않게 곱게 접어서 아주 오래된 서랍에 다시 넣어놓는 기분이었다. 누구에게나 지나간 사랑은 있다.
바바라 스트라이센드의 영화 추억을 보면서 감나무를 함께 바라보던 그 남자를 생각하지만, 나의 현실은 비포 미드나잇과 같이 오디오 빌 틈이 없이 떠드는 사람과 함께 하고 있다.
나의 지나간 연인들의 이야기를 가만 들으며,
나의 연애는 한국의 고질적인 문제를 보여준다면서 턱에 손을 괴고 말하던 나의 현재연인에 대해서 앞으로 써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