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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쇼코는 왜 Aug 05. 2019

지극히 개인적인 위로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요즘은 어딜 가도 위로와 위안이 주요 키워드로 떠오른다. 하루를 꿋꿋이 버티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책은 서점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있고 개인의 외로움과 상실, 그리고 그것을 위로하는 듯한 연출이 돋보이는 영화도 간간이 주목을 받는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은 이 같은 시대 흐름의 연장 선상에 올라와 있는 영화다. 아니 오히려 이번에 재개봉을 하게 됐으니 시대의 도움을 받은 영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위로를 주제로 하는 영화들은 필연적으로 상실과 극복이라는 요소를 안고 간다. 이 두 요소의 활용에 따라 전체적인 분위기가 달라지곤 하는데,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에서는 ‘가족’이라는 혈연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를 통해 이를 대변한다. 기억과 상실, 그리고 극복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역사를 통해 보다 보편적인 위로로 나아가려는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의 방문을 두드려본다.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개인의 경험은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것,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경험에 근거한 이해는 온전하지 못하다. 그렇기에 주인공 ‘폴’이 겪은 경험과 기억들은 모두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 된다. 그것을 보는 관객이 폴을 이해했거나 상황에 공감했다면 그건 ‘폴’의 경험을 자신의 비슷한 경험으로 치환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이 과정이 가능해졌을 때 공감이 실현된다. 영화는 이 지점을 정확히 관통한다. 그 때문에 오해와 진실, 그리고 사랑을 겪은 폴의 경험이 나의 경험과 결이 다를지라도 그것에 담긴 핵심적인 가치가 같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공감과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과정을 위해 영화에서는 몇 가지 장치를 사용한다. 첫째,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의 활용이다. ‘폴’은 2살 무렵 목격한 부모님의 죽음 이후 실어증에 걸리게 된다. 이후 이모들의 손에 피아니스트로 키워진 폴은 우연한 기회에 ‘마담 프루스트’의 방에 들어가게 되고 이후 마담 프루스트의 도움을 받으며 자신이 잃어버렸던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춰 가기 시작한다. 이때 폴의 회상을 돕는 매개체는 차와 마들렌, 그리고 ‘음악’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음악을 통한 과거로의 시간 여행은 자칫 허황된 것처럼 보이지만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감각들은 꼭 음악이 아닐지라도 그늘처럼 우리에게 하나씩 숨어있기 마련이다. 이성을 통한 기억의 회상은 언뜻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감각의 회상은 더 많은 것들을 보여준다. 음악, 음식 등 감각을 통해 인지된 것들은 상황을 만들어내고 상황은 기억이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억 중 일부는 온전하지 못한 채로 평생 기억되지만, 대부분은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자신을 끄집어 줄 낚싯줄을 기다린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정의 형태는 다르고 그 안에서 추구되는 가치의 종류도 다르다. 하지만 어느 정도 분류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 모두가 인정할 만한 가치를 가지는 가족의 형태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몇 가지 조건을 충분히 만족시킬 필요가 있다. 어느 사회든 이상적인 가족상이 정해져 있는바 가족이라는 가치는 그것을 비틀었을 때 다양한 사람의 반응과 공감을 유도하기에 굉장히 유리하다. 불특정 다수의 경험이 교차하는 지점이 바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에서는 위로를 위한 두 번째 장치로 가족을 활용한다.


폴의 시간 여행은 기승전결이 완벽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큰 구조로 보면 오해와 화해, 그리고 위기와 극복의 과정을 밟고 있는데 먼저, 어머니와 재회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한 시간 여행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특히 2살의 시점으로 본 아버지의 가정폭력, 어머니의 머리를 잡고 바닥에 내려치는 기억은 오해의 정점을 찍게 되고 이후 폴은 심각한 트라우마에 사로잡힌다. 이런 불안한 가정의 모습과 거기에 반응하는 폴의 불안정한 모습은 우리의 경험과 폴의 경험이 만나는 최적의 장소가 된다. 행복한 가정은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고 했던가. 이 같은 불행한 가정사는 폴과 우리의 경험을 넓은 범주 안에서 한데 묶어내며 폴의 갈등 해결=우리의 갈등 해결이라는 공식을 만들어낸다.



오해가 있다면 풀어야 하고 우리는 지금까지 쌓여온 갈등에 이미 지쳐있다. 하지만 영화는 더 극적인 해소를 위해 폴에게 다시 한번의 갈등을 선사한다. 마담 프루스트에 의해 아버지에 대한 오해를 풀게 된 이후 폴에게는 두 번째 위기가 찾아오게 되는데, 자신과 화해한 아버지, 그리고 항상 자신의 선망이었던 어머니의 죽음을 ‘또다시’ 목격한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의 한 원인이 자신을 키워준 이모들임을 알게 됐을 때 폴은 절망하지만, 절망의 방향이 첫 번째와는 다르다.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한데, 첫 번째 트라우마와의 화해가 자신의 내부에서 이뤄졌다면 두 번째 위기의 극복은 지금의 자신을 만든 주변에게로 향한다. 때문에 정해진 삶을 살며 평생을 두 살에 머물러 있던 폴이 ‘너의 인생을 살라’는 어머니의 철학과 마담의 조언을 받아 피아노 위에 꽃을 심고 물을 주는 장면은 정말 인상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자신을 피아니스트로 키운 이모들에 대한 반항을 넘어 부모의 죽음과 화해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그리고 부모님의 죽음, 자신을 2살에 머물게 한 주변과의 갈등을 모두 해결한 폴에게 남은 것은 단 한 가지, 바로 자기 자신과의 화해다. 그걸 위해 폴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기억의 원점, 아빠라고 말하는 자신의 입을 아버지가 틀어막아 버린 그곳, 그랜드캐니언으로. 가족과 함께 찾아간 그곳에서 폴은 더는 2살짜리 아이가 아닌 아버지가 돼 서 있다. 그리고 자화상 같은 아이를 통해 과거의 자신과 화해한다. 31년의 세월을 위로하는 ‘아빠’라는 한 마디로. 


인생에는 약간의 판타지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과거로 보내줄 마담의 허브차도 31년의 세월의 뛰어넘는 기적적인 경험도 없지만 이런 극대화된 경험들은 우리의 사소한 일상과 과거를 위로하기에 오히려 적당하다. 나와 관련된 일은 언제나 큰일일 테니까.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폴, 그리고 우리의 과거를 위로하지만, 거기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걸 다 극복하고 났을 때 펼쳐질 우리의 일상과 경험들이 이전보다 더 나아질 것을 시사하고 응원한다. 영화를 다 보고 났을 때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은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더는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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