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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외맛식혜 May 18. 2024

폭행을 당했습니다

영국 생활이 거의 더 끝나가는데 말이죠.

최근 일주일 동안 너무나 정신이 없었다. 평소대로 일은 하는데, 여러 군데 면접이 잡혀있고, 한국으로 가는 준비를 해야 하고, 어김없이 친구도 만나고 밥도 먹고 청소도 해야 했다. 나를 달래며 하나씩 헤쳐나가는 와중, 꼭 사건은 이럴 때 터진다.


런던에서 놀러 온 친구를 만나 즐겁게 놀았다. 그동안 못 나눈 대화도 하고, 서로의 힘든 점을 위로해 주고, 이제 막 워홀을 온 친구를 다독이며 선배 노릇도 조금 했다. 여름이 한껏 다가온 맨체스터는 이제 햇빛이 쨍하고 하늘이 파랗다. 적당히 바람도 분다. 밖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행복해지는 요즘. 


친구를 기차역으로 데려다주고 빈손으로 못 보내는 한국인 특성상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하나씩 테이크아웃 했다. 오랜만에 가는 스타벅스라고 나는 돈을 좀 더 써서 달달한 크림이 잔뜩 올라간 콜드브루를 시켰다. 늦은 출근이 예정된 나는 가야 했고, 마침 친구는 담배를 펴야 한다고 해서 함께 역 밖으로 나왔다. 또 언제 볼지 모르기 때문에 가기 전에 셀피나 하나 찍자고, 내가 말했다.


그렇게 역 앞에 30초는 서 있었을까, 어디선가 키 큰 백인 남성이 다가왔다. 뭐 하려나 싶었는데 다짜고짜 “I love you”라고 했다. 두 번 정도 반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뭔가 이상함은 느끼고 ‘Sorry’라고 말한 뒤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손을 높이 들더니 내가 들고 있는 커피를 바닥으로 내려쳤다. ‘퍽!’하는 소리가 났고, 커피와 플라스틱 컵이 바닥에 떨어졌고 내 옷에 전부 튀었다. 그가 내 친구의 커피를 내려치기까지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게 진짜인지 순간 멍한 표정으로 바닥을 보았다. 그 뒤로 정말 단단한 분노가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What the f**k?!” 이 말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장 크게 말해보았다. 우리에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그가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가 뭐라고 욕했던 것 같다. 나는 꺼지라고 다시 한번 분명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가 욕을 하며 다시 다가왔고 옆에 있던 내 친구를 밀쳤다. 다행히 넘어지거나 하진 않았다. 그리고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1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말도 안 되는 일이 우리 둘에게 일어났다. 아직도 정신이 멍했다. 이게 뭔가 싶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다가와 우리에게 괜찮냐고, 너무 유감이라고 말했다. 그 사람 오늘 기분이 매우 안 좋았나 보다고 누군가 말했을 때, 인종차별이라고 말하고 싶은 걸 참았다. 어떤 아줌마는 조심하라고, 저 사람 아직 근처에 있다고 했다. 분노와  공포에 휩쓸린 우리는 서로가 괜찮은지 살폈다. 겨우 몸만 추스를 수 있는 상태였는데 정신 차리자고 되뇌었다. 이미 지각이 될 것 같아 급하게 헤어지고 나는 회사로 향했다. 


회사로 향하면서 슬픔과 무서움 분노를 조금 조절해보려고 했다. 그리고 침착하게 전화를 걸어 이런 일이 있었고 지각할 것 같다고 말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상대가 놀라는 게 느껴졌다. 일단 집에 가서 옷이라도 갈아입으라고. 너무 걱정 말라고. 어차피 늦은 거 집에 먼저 가는 게 낫겠다 싶어 집으로 향했다. 


옷에 쏟아진 커피를 손빨래하는 와중에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경찰이 우리 도와주려고 하는 거 같아.” 나는 깜짝 놀라 바로 통화 헸고 친구는 자기가 지금 경찰들과 있다고 했다. 역 앞에서 당황해하는 친구를 발견한 경찰관들이 다가왔고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친구는 너무 당황해서 말이 잘 안 나온다고, 여기 사람들 말을 못 알아듣겠다고 했다. 우리 둘의 진술서를 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친구가 경찰관을 바꿔줘서 잠깐의 통화를 했고 나는 곧바로 경찰서로 가겠다고 말했다. 옷을 후딱 입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회사에는 다시 전화를 걸어 “지금 경찰서에 진술서 쓰러 간다. 더 늦을 것 같다”라고 전달했다. 경찰서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지만 내 머릿속에는 이 사건을 해결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사건이 발생한 기차역에 도착했다. 쏟아진 커피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모두가 평화로워 보였다. 우리가 폭행을 당한 그 자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기차역 앞에 있으니 곧 경찰분과 친구가 나타났다. 우리는 함께 취조실로 들어갔고 친구는 나를 기다리는 동안 번역기를 돌러 간단한 사건 진술을 마친 상태였다. 경찰관이 몇 가지 추가 질문을 이어갔다. “그 사람과 거리가 어느 정도였나요?” “시야를 가리는 물체가 있었나요?”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인가요?” 그리고 마지막 질문은 “법정에 갈 수 있는데 동의하시나요?”


외노자로 와서 길에서 폭행을 당한 것만으로도 서러운데 법정이라는 말을 들으니 무서웠다. 당황하는 친구를 대신에 물어봤다. “법정에 가지 않을 수도 있는 거죠?” “동의하면 어떻게 되고 동의 안 하면 어떻게 되나요?”. 사건이 처리되는 것에 따라 법정에 갈 수도 있지만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라고. 법정 동의를 안 하면 사건이 종료된다고 경찰관은 말했다. 우리는 당연히 동의했다. 친구는 이미 한 차례 기차를 놓친 상황이었고 더 늦어지기 전에 가야 했기 때문에 먼저 진행했다. 친구의 진술이 끝나고 우리는 조심히 가자고, 꼭 연락하자고 말하며 헤어졌다. 


이후 나는 한 시간가량 경찰관과 진술서를 작성했다. 그때 알게 되었다. 우리를 폭행한 가해자가 그 근처에 있었고 친구가 저 사람이라고 말한 덕분에 현장에서 바로 체포할 수 있었다고. 안심이 되면서도 놀란 나는 그 자리에서 “그 사람 안 도망갔어요?”라고 물었다. 경찰관은 가해자가 정신 질환이 있는 것 같다고 그래서 우리 진술을 바탕으로 심문을 할 거고 정신 질환의 결과에 따라 형을 사는 대신 시설에 보내질 수 있다는 말을 했다. 그건 어떻게 되던 상관없었다. 체포까지 되었다면 적절한 조치가 취해질 수 있도록 최대한 협조하고 싶었다. 


나의 간단한 신원 정보를 물어본 경찰관은 사건에 대해 자세하게 물어봤다. 친구가 보낸 진술서에 많은 디테일이 빠져있었기 때문에 머리를 쥐어짜서 나는 최대한 구체적으로 묘사하려고 노력했다.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게 쉽지만은 않았지만 그 순간 나는 너무나 어른이어서, 이 일을 바로 잡겠다는 사명에 사로 잡혀있었다. 더구나 담당 경찰관이 열심히 처리하려는 모습이 보여 더 믿고 얘기할 수 있었다. 진술을 마친 뒤 다시 확인했고, 진술 내용이 정확하다는 사인을 했다. 경찰관은 나를 건물 밖으로 데려다주며 곧 소식을 들을 거라고 말했다. 어느새 밖은 어두웠고 나는 서둘러 회사로 돌아갔다. 


“나는 이 일 잊을 거야. 내가 영국에서 가진 좋은 추억을 이 일로 망치지 않을 거야.” 만나는 사람마다 얘기했고 스스로 되뇌었다. 그렇지만 이제 나는 길을 걸을 때 그리고 사람이 많은 곳에서 움츠려 든다. 심지어 영국에 노숙인들은 하나도 안 무섭고 소리도 안 지르는데, 혹시나 이들이 말을 걸까 봐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혹시나 가해자와 비슷한 사람이 지나가면 무서울 것 같다. 갑자기 나도 모르는 세 위험에 빠질 것 같다. 친구들을 만나면 신나서 떠들고 까먹다가도, 불현듯 내 마음속 두려움과 불안이 유유히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 그럴 때마다 이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다. 무서운 걸 무섭다고 말하면 더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하는 게 아닐까? 나는 괜찮아,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라고 되뇌면 내 트라우마를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제대로 마주하고 싶은 마음과 빨리 극복하고 싶은 마음이 교차한다.


오늘 아침에는 이 일이 있고 난 뒤 처음으로 요가를 다녀왔다. 한 시간 반짜리 꽤나 긴 수련이었고 힘들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충격받을 정도로 몸이 굳어 있었다. 요즘 잘 되던 다운독에서도 다리가 펴지지 않았고, 동작을 할 때마다 몸이 무거웠고, 팔과 다리가 후들거렸다. 요가를 하다가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적이 처음이었다. 이렇게 몸이 안 따라줄 때일수록 몸을 더 풀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커서 어찌어찌 수련을 다 마쳤지만, 마음의 아픔에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적나라하게 느낀 순간이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걸까.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겠구나, 그리고 보채지 말아야겠다. 


응급으로 요청한 심리 상담에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어떤지 충분히 인지하고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내 마음은 그리고 몸은 지금 힘들다. 그래서 더 주변에 얘기하고 도움을 청하며 이렇게 글도 쓰고 있다. 나에게 벌어진 일을, 그에 따른 감정을 소화할 수 있는 시간을 주자. 그리고 소화가 잘 될 수 있도록 나를 돌보자. 이런 나의 상태를 아는 것만으로도 나는 잘하고 있다. 무엇보다 트라우마 속에서도 침착하게 대쳐 할 수 있었던 나를 칭찬하자. 적절한 도움을 받았고, 또 내 주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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