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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은비 Aug 13. 2021

해석의 미로 속에서 가웨인처럼

[리뷰] 영화 <그린 나이트> (The Green Knight, 2021

* 아트나인 네이버 카페의 '상영작 리뷰' 게시판에 실은 글입니다.




해석의 미로 속에서 가웨인처럼

- 영화 <그린 나이트>


네이버 영화

중세 서사시를 하나의 ‘영상시(映像詩)’로 재탄생시켰다. <그린 나이트>는 ‘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라는 중세 서사시를 각색한 작품이다. 가웨인은 ‘아서 왕 전설’ 속 인물이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갖은 상징과 비유, 반복과 변주로 점철된 미센으로 구성된다. 신비하고 아름다운 감각적인 영상미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프레임 안에서 현실성과 비현실성의 경계가 무너지고, 삶과 죽음이 교차되며, 현재와 미래를 넘나든다.


과연 데이빗 로워리 감독만의 재기 발랄한 연출력으로 색다른 느낌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플롯의 구성은 매우 입체적이다. 어두운 조명과 선명한 색감이 곧잘 어우러지고, 판타지, 미스터리, 호러 등 다채로운 장르적 특징이 한데 섞이며 기묘한 분위기를 낳는다. 기발한 편집과 함께 독특한 효과음과 웅장한 음악을 활용한 사운드는 내내 몽환적이고 미스터리한 기류를 형성한다.



상징의 해석으로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

주로 술집과 사창가에서 시간을 보내는 흥청망청한 삶을 사는 가웨인은, 크리스마스 날 왕과 왕비, 원탁의 기사들과 함께하는 연회 자리에 참석한다. 왕은 조카인 가웨인을 불러 자신의 옆에 앉게 하고 무용담을 들려달라고 요청한다. 가웨인은 떨떠름한 얼굴로 바칠 이야기가 없다고 답한다. 그러던 중 갑자기 온몸이 녹색으로 되어 있는, 정체 모를 그린 나이트(녹색 기사)가 그들 앞에 나타난다. 그린 나이트는 하나의 게임을 제안한다. 자신의 목을 베는 자에게는 영예가 주어질 것인데 대신에 일 년 후에 녹색 예배당을 찾아와 역시 자신의 일격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왕이 기사들을 향해 누가 나서겠냐고 묻지만 원탁의 기사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기 바쁘다. 그때 가웨인이 도전한다.


결국 그린 나이트의 목을 베어 버린 가웨인은 왕의 부추김에 의해 일 년 후에 녹색 예배당으로 향하는 여정을 떠난다. 마치 가웨인에게 주어지는 테스트와 같이 차례차례 신비롭고 기묘한 사건들이 일어난다. 그 과정 속에서 가웨인은 여러 선택을 내리며 성장한다.


<그린 나이트>에는 전반적으로 상징성이 짙게 깔려 있다. 반복되는 이미지의 표상을 해석하는 것이 중요한 영화이다. 절대 명확히 드러내는 법이 없는 메시지를 내내 중대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가웨인의 모험의 방향성과 닿아 있기에 관객은 모험의 과정 안에서 이를 밝혀내야만 한다. 단연 영화에서 가장 강조되는 ‘녹색’이 의미하는 바를 찾아내야만 영화가 좀 더 선명해진다. 녹색은 대지라고 말하는, 작중 인물인 성주 부인의 직접적인 대사가 있다. 사건의 핵심인 그린 나이트를 자세히 살펴보면 더 명확해진다. 그린 나이트는 나무의 외관을 하고 있으며 움직일 때마다 나뭇가지 구부러지는 소리가 난다. 가웨인이 그린 나이트의 목을 베는 행위는 벌목처럼 보인다. 이는 인간의 자연 파괴의 상징적 행위로서 보인다. 영화에서 녹색은 바로 자연을 가리킨다. 특히 문명에 의해 파괴된 자연을 비유한다.


그리고 일 년 후에 그린 나이트의 보복의 과정이 시작된다.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가웨인은 그린 나이트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갖가지의 곤란을 겪는다. 이러한 모험의 양태로 문명과 자연의 처지가 반전되는 상황이 펼쳐진다. 대자연 안에서 목숨을 위협 받는 한 인간의 모습이 형상화된다. 가웨인의 모험은 문명이 파괴한 자연을 마주하는 과정이다. 문명으로 상징되는 성 밖을 나오고 나서 모험이 시작된다는 점도 상징적이다. 거대한 자연의 풍광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그 안에서 가웨인이 나약한 모습으로 움직인다. 그가 첫 번째로 마주하는 곳은 불모지이다. 전쟁이 남긴 그 흔적 아래 가웨인은 인간의 이기심, 폭력성과 맞닥뜨리게 된다.

 


해석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수수께끼의 구성

원작에는 없는 내용으로 완전히 새롭게 창작된(일부분 원작의 내용을 많이 바꾼) 가웨인의 모험 시퀀스는 마치 수수께끼와 같다. 피상적인 관점에서 5개의 모험 에피소드들 간의 연관성과 갖가지의 상징성을 파악하기 어렵다. 각 에피소드들뿐만 아니라 한 에피소드 안의 각 장면들까지 그것들 사이의 연속성이 굉장히 약하기 때문에 파편화된 느낌이 강하다. 이렇게 파편화된 장면들은 여러 표상들의 반복적 제시를 통해 모호하고 느슨하게나마 연결된다. 그러나 특정 사물, 사람, 행위 등 반복되는 표상들의 의미 또한 적확히 제시되지 않아 정확한 해석을 내리기가 까다롭다. 이와 같은 <그린 나이트>의 모호성 안에서 결과적으로 해석의 가능성이 확장된다.


<그린 나이트>에서 원작 속의 특정 명칭들을 생략한 점이 눈에 띈다. 이에 따라 원작의 존재감과 영화 속 시대성이 약해지는 것은 분명하다. 관객을 시대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기 때문에 더욱이 영화가 상영되는 현대의 관점에서 접근해볼 수 있다. 영화에서 가웨인과 그린 나이트를 제외한 나머지 전설의 인물들은 이름을 잃은 채 등장한다. 원작 속 아서 왕, 기네비어 왕비, 모건 르 페이, 버틸락 성주 등은 영화의 엔딩스크린에서마저 왕, 왕비, 어머니, 성주 등으로 표기된다. 원탁에 앉은 기사들과 왕이 소유한 칼이 등장하지만 원탁의 기사, 엑스칼리버에 대한 언급도 일체 없다.


또한 왕과 기사들, 가웨인까지 원작에서 강조하는 모습과는 다소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노쇠하여 몸을 사리는 왕과 결투를 주저하는 기사들. 가웨인은 내내 게으르고 겁이 많으며 우유부단한 모습이다. 결국 이 인물들의 영웅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장면들이 전혀 없다는 점 또한, 영화가 방향성을 원작과 같은 중세 문학과 달리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린 나이트>는 단순히 원작을 충실히 재현해낸 각색작 혹은 장르적 재미에 집중하는 시대극이 아닌 것이다.


배경이 되는 중세 시대와 영화가 만들어진 현대를 관통하는 주제 의식을 찾아낼 수 있다. 사랑, 친절 따위가 화폐나 사냥감 등으로 치환되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물질만능주의를 연상케 한다. 가웨인이 왕, 왕비 등 주변인들에게 등 떠밀려 마음에도 없는 위업과 명예를 좇는 모습에서, 눈이 먼 채로 타자적 욕망에 휘둘리는 인간상을 떠올릴 수 있다. 모두 현대 사회와 군상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모습들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 <그린 나이트>는 하나의 우화로 읽힐 수 있다.



<그린 나이트>는 가웨인을 곤경의 모험에 빠뜨리듯이 관객을 해석의 미로 속에 빠뜨린다. 가웨인이 오리무중의 상태에서 단단한 결단으로 나아가듯 영화 속 베일에 싸인 답을 끝내 찾아내는 것이 <그린 나이트>를 보는 관객의 과제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굉장히 매력적인 개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린 나이트>

(The Green Knight, 2021)

판타지| 129분

감독 데이빗 로워리 출연 테브 파텔, 알리시아 비칸데르, 조엘 에저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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