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 마시기 팁 3
한 손아귀 안에 쏘옥 들어오는 진주요의 백자차호에는 언제나 같은 차가 담겨 있습니다. 한 해의 여름을 넘기지 않고 이내 비워지지만, 다음 해 봄이 되어 다시금 차가 입주할 때까지 그 자리는 한결같이 주인을 기다립니다. 새봄의 녹차를 기다립니다.
오늘 마실 하동 녹차는 올해 봄이 다소 일러 4월 19일에 채엽을 했다 합니다. 보통 우리나라의 우전 녹차는 싹이 채 자라질 않아서 4월 20일 전에 하지 못하는데, 따뜻한 날씨 덕에 이름 그대로 곡우 전에 딴 '우전'이 되었습니다. 비벼진 잎을 보니, 세심하게 유념하였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유념이 꼼꼼하면 첫 잔의 은은함이 탁월합니다. 맛을 내어야 하는 음식이, 맛을 적당히 숨김으로써 오히려 그 진미를 드러냅니다. 오늘은 절제미를 갖춘 녹차를 마십니다. 그래서 이에 걸맞게 특별한 다화를 준비했습니다.
오년 동안 키우고 있는 미니장미입니다. 겨울을 나도록 내버려 두었더니, 이제는 단단하게 여물어, 봄 가을로 향이 짙은 꽃을 선 보입니다. 그 중 두 송이를 손가락 두 마디 만한 화병에 꽂아서 다락당으로 들였습니다. 봉오리로 맺혀 있는 두 송이는 며칠 후 오실 손님을 위해 남겨두고요. 이 앙증맞은 다화를 녹차 전용 차호와 찻잔 곁에 두니, 오늘의 찻자리가 완성되었습니다.
이 차는 야생차가 아닙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야방차입니다. 그럼에도 다락당에 입주한 녹차 중 수위에 놓는 까닭은, 제다한 이의 정결함과 열정 때문입니다. 채엽 날짜 별로 차를 변별하고, 잎과 싹의 크기를 일정하게 맞춥니다. 제다 시에는 위조가 아닌 탄방으로, 이후 저온으로 살청합니다. 그에 맞추어 용정차 제다법 중 청과와 휘과를 도입하였습니다. 최근에 만든 녹차는 용정차만큼은 아니지만 약간 납작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물 온도를 85도로 맞추고, 30초 우린 후 따라서 마십니다. 첫 잔이 정말 맛있습니다. 아주 작은 싹 위주로 만든 녹차는 순하고 부드러우나, 밀키한 맛에 호불호가 갈립니다. 또한 너무 커버린 잎으로 만든 녹차는 거칠고 씁니다. - 물론 다 자란 잎으로 만드는 중국의 태평후괴는 정말 맛있지요. 품종과 제다법이 다르기에 우리나라의 녹차와 단순 비교를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겠습니다. - 이 녹차는 모든 엽저 길이를 2.5cm로 맞추고, 일아일엽과 일아이엽만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맛이 매년 일정할 뿐더러, 차에 담긴 다양한 맛이 균형을 잘 이루고 있습니다.
만드신 분 말씀이, 언젠가 주변 정리를 위해 차나무 몇 주를 포크레인으로 파본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미터를 파도 뿌리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차나무의 직근성을 감안하더라도, 우리나라의 관목형 차나무가 그토록 깊이 뿌리를 내리려면, 수많은 세월에 걸쳐 척박한 자연을 극복해야했을 것입니다. 제 앞에 담겨 있는 조그마한 잎과 싹에서 깊은 땅 속 뿌리의 절실함을 느꼈다면, 지나친 감상일까요.
이 차도 어느새 몇 줌 남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정직한 차, 옹골진 차를 마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