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봄볕이 좋아, 햇차 들이고
중화민국 연한으로 따졌을 때 민국 73년은 1984년이다. 보이차 역사에서 호급, 인급이 사그라들고 병배 기술을 앞세운 숫자 보이차가 생겨날 때쯤, 대만의 한 상인에 의해 '73 청병'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나는 숫자보이차 중 8582와 7542를 좋아한다. 대표적인 보이생차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생차의 정체성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마실 때마다 든다. 73청병은 바로 7542의 원조다. 겉면의 어린 잎, 속의 큰 잎, 그들이 조화를 이룬 맛.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 시절 청병의 맛을 본다. 청향이 사라지고 진향이 빈자리를 메꾸었다. 아주 순수한 아이가 현명한 노인으로 변모해간 시절, 그 시절을 확인하려 한다.
130cc 서시호에 9g 정도를 꾹꾹 넣고 세차를 한다. 그리고 첫 잔을 마셨다. 탕색이 참으로 농밀하다. 몇 달 만에 쾌속발효를 완성하고서 곧바로 검붉은 탕색을 보여주는 숙차와는 차원이 다르다. 생차 탕색이 검붉다는 건 한 세대를 보냈음을 뜻한다. 수많은 위기를 극복하며 곱고 고운 황혼기를 맞았음을 뜻한다. 지낸 장소가 자주 바뀌어서도 안 되고, 변화무쌍한 습기에 방치되어서도 안 된다. 그 조마조마한 30년을 지나 지금 내 앞에 온 것이다.
오랜 세월을 견딘 노차의 내공답게, 아홉 우림까지도 색과 향과 맛을 일정하게 유지했다. 차의 다섯 가지 맛이라 일컫는 '산고감신함(酸苦甘辛鹹)'이 고루 조화를 이루는 단계를 지나, 이제는 노차만의 새로운 맛을 이뤘다. 싱그럽고, 달달하고, 시원한 맛으로 승부하는 초짜 생차들은 절대 구현할 수 없는 맛이다. 생김치와 묵은지의 차이라고나 할까.
오래되었다고 모든 변화를 인정할 수는 없다. 보이차도 보관이 잘못될 경우, 쩐내 풀풀 풍기고 백상으로 뒤덮인 골방 늙은이가 되어버린다. 세월 속에서도 끊임 없는 성찰이 있어야만, 윤기 나는 갈변현상을 일으키고, 그 이후 맛있게 곰삭아가는 것이다. 내가 만난 73 청병은 바로 그런 노인이었다. 같은 73 청병이라도 그처럼 곱게 나이 든 노인의 모습으로 만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 노인에게 다시 한 수를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