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레바퀴 Dec 10. 2017

씨앗이 속내를 비친 날

- 5. 30 봄볕이 좋아, 햇차 들이고

학생들과 함께 다솔사 뒤꼍에 펼쳐진 차밭을 다녀왔다.

 남녘의 다솔사 뒤꼍에는 1000년이 훨씬 넘은 야생차밭이 있다. 어느 볕 좋은 날, 차를 좋아하는 학생들과 함께 그곳에 다녀왔다. 학생들은 손으로 돋아난 싹을 만지작대며 깔깔거린다. 나는 주지 스님께 녹차 한 잔을 얻어 마시고, 그 맛이 좋아서 차씨를 두 알 가져왔다. 혹 그 맛을 다시 볼까 싶은 부질없는 기대 때문이다. 

 한 아이를 기르기 위해 한 마을이 필요하듯, 차나무 한 그루는 그곳 자연이 잉태한 결정체이다. 그러므로 내가 내 터전에서 발아시켜 키운 차나무는 절대로 다솔사의 차맛을 보여주지 못할 것임이 분명하다. 게다가 차씨로 발아시켜 나무를 키우면 변종이 많이 생긴다. 그래서 품종을 유지하려면 묘목 채로 가져오거나 꺾꽂이, 또는 휘묻이를 하기도 한다. 
 그래도 그 유전자가 어디 가겠는가? 지금 집 텃밭에는 익산 웅포 차밭에서 가져온 재래종과, 보성에서 가져온 야부키다 종, 그리고 이 다솔사 씨앗이 잉태하여 가족을 이루고 있다. 언뜻 같아 보여도, 잎이 조금씩 다르다. 아직 싹만 비친 다솔사 차나무가 제 모습을 갖추면, 같은 재래종이라도 또 다른 개성을 가진 놈이 세상 빛을 볼 것이다. 

익산 웅포 자생차밭에서 가져온 씨앗은 어느새 어엿하게 자리를 잡았다.


 차 씨앗이 내가 사는 곳에서 싹을 틔웠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두근댄다. 늘 소비만 해왔던 내가, 잠시나마 생산자의 입장이 되어 차의 삶을 곁에서 들여다본다. 

 사실 차를 마시는 일은 찻잎을 소멸시키는 과정이다. 우리는 우리의 먹거리를 위해 차나무에서 움트고 나온 여린 싹이 세상에 나서기 무섭게 잘라낸다. 그리고 시들리고 덖고 말리고... 차탁 위의 찻잎이 뜨거운 물 속에서 갖가지 맛과 향으로 발화하는 모습은, 찻잎의 입장에서 보면 혼이 육신을 나서기 전 형형한 눈빛으로 세상을 갈무리하는 회광반조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찻잔을 입가에 기울이며, 찻잎이 내지르는 유언을 뇌파 삼아 성찰하는 것이다. 향유하는 것이다. 
 차를 키워본 사람은 안다. 싹을 틔우고, 잎에는 살이 오르며, 점차 목질화되어가는 차나무를 수년 간 지켜본 사람은 안다. 새봄에 터오는 싹의 부화가 그 얼마나 간절했었는지...  수 년을 유충으로 살다 고작 한 달 울고 가는 수컷 매미처럼, 오직 차나무는 싹을 키워 줄기 한 뼘 늘리고자 한 해를 웅크리고 살았다. 
 그 잎으로 우린 차에서는 새로운 광경이 펼쳐지리라. 마냥 소비자로 살았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차나무의 사계, 찻잎의 꿈, 그리고 그 일생에 비친 나의 삶. 이 모든 것이 차 한 잔에 담겨 그간 앙짜를 부리고 살던 나를 서늘하게 바라보리라. 

오늘은 차를 마실 엄두가 나지 않아, 다포로 덮인 차탁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 드러누워버렸다.
 


작가의 이전글 차실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