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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육아를 위한 나라는 없다

40대 직장인의 육아휴직

육아휴직은 갈굼 당해 쭈그러진 유부 직장인들의 유머소재다.


상사와 임원에게 쪼이고 담배장에서 동료들이랑 하소연할 때  

언제나 필요 이상으로 당당한 팀원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량한 신세를 한탄할 때

상전처럼 구는 특정 부서의 무리한 요구에 빡쳐서 한숨에 들이키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함께


이 모든 상황에서 많은 경우엔 '육아휴직'을 입에 올린다.

퇴사, 이직과 함께 빠지지 않는 하소연의 단골 레퍼토리.


육아휴직은 그 사용조건만 본다면, 출산휴가와 함께 특정 상황에 놓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특권'이다.


육아휴직은 당연히 자녀가 없는 사람은 쓸 수 없다.

자녀가 있어도, 나이가 만 여덟 살을 넘었다면 그 역시 육아휴직을 쓸 수 없다.

위의 두 조건이 충족되어도, 배우자가 이미 육아휴직 12개월을 소진했다면, 그 경우에도 육아휴직은 물 건너간다.


출처 : 법제처

위 모든 조건은 통과했다면, 당신은 대내외 합리적 사유로 인한 회사생활의 잠정 휴업, '육아휴직'을 선택할 수 있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하지만, 육아휴직 앞에선 40대 남성 직장인은 회사 내의 보이지 않는 압박과 다가올 현실적인 상황을 인지하는 순간, 과연 차별받지 않고 있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40대에 육아휴직을 쓸 기회가 남았다는 것.  

회사생활에 남은 몇 안 되는  특권일까 굴레일까  



30대만 해도 조금 다른 것 같다.


많지는 않지만, 아내의 출산에 맞춰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후배들이 종종 보인다. 물론 그들도 사회생활에서의 입지를 고민하며 어렵게 내린 결정이겠지만, 그들의 리더들 역시 그들의 눈치를 보고 특히 인사 조직에서는 정부가 정한 시책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회사의 사례가 필요하다.

30대 보직 없는, 5~6년 전후의 경력을 가진 남성 직원은 육아휴직을 얻고, 회사는 "남성 직원도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는 회사"라는 보도자료를 얻는다. 저출산 시대에 얼마나 인도주의적이고, 인권수호적인 아름다운 딜(deal) 아닌가.


하지만 40대의 육아휴직은 간단하지 않다.


10년 이상 회사에서 일해오며, 보직을 갖고 있다는 것은 보낸 시간 이상의 통속적인 사회에서의 성공과 더 높은 자리에 대한 각오를 담고 있다.  

커리어는 쉼 없어야 하고, 조직과 업무가 가족과 일상에 일정 수준 이상 영향을 미친다.

주말근무와 야근은 모두가 하는 것이지만 보직자에게는 '타의 모범'이 되어 ‘솔선수범’해야 한다.

수당이 있다면 감당할 수 있었을까?

실적에 대한 압박을 감래하는 대가는 조직원들의 비난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적은 보상이다.

견뎌내야 하는 무게의 왕관 따윈 없다. 초라한 자리를 위안  삼아 견디고, 스트레스와 고통을 스스로 해소해내야 한 겨우 한 뼘의 위치를 사수할 수 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일들을 처리하다 보면 40대 남성의 정체성은 회사원/조직원으로 굳어진다.

그 속에 남편과 아빠로서의 삶은 흐려진다

쌓아 올린 것들을 허물고 새로운 도전을 하기에는 소심하여 매 순간 고개를 조아리고, 웃음으로 마무리하며, 오른손을 들어 자원해왔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40대  것이라고 쉽게 놓아지지 않는다.

특히 그 오랜 기간 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맺을 것처럼 보이는 어떤 순간에 놓여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난 노예가 아니다' '언제든 나 스스로 선택할 것이다'  화장실에서 남모르게 되뇌며 스스로를 다잡고,

이내 자리에 앉아 머리 싸매고 보고서와 씨름하고 힘들다고 인사팀과 이미 면담 마치고 온 후배들 달래야겠지.

그렇게 살아온 직장인으로서의 17년의 보상이라기에 육아휴직은 그동안 쌓아 올린 나의 커리어(라기에도 부끄러운)를 삽시간에 무너뜨렸다.



번아웃과 우울증으로 방황하는 17년 차 직장인의 선택지가 고작 육아휴직이었다.   

매일매일이 실적과 불안한 입지와 싸우는 전쟁터인 40대 직장인에게 육아휴직은 최후의 보루도 부러운 훈장도 아닌, 회사원으로서 도태의 낙인이었다.  


그간 내가 해온 것은 중요치 않았다.

스스로 자리에서 내려왔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서는 끌어내려졌다는 확신에 찬 루머가 돌았다.

 

사람들의 위로와 격려, 관심과 연락은  잔뜩 왜곡된 형태로 나를 찔렀다.

피 튀기는 연장전 승부 끝 상처뿐인 영광보다 경쟁자의 낙오로 인한 부전승은  스포츠맨십보다 즐거울 것이다.

안타까운 표정의 동료들의 표정 뒤엔 숨길수 없는 웃음이 어른거렸다.


농담처럼 희망했던 40대의 육아휴직은 전혀  달콤하지 않았다.


당장 절반으로 줄어든 가계수입을 걱정해야 했고, 그 와중에 사람들의 시선마저 신경 쓰였다.  

가장 하고 싶은 일은 혼자 하는 여행이었지만 정작 가장 먼저 한 일은 휴직급여 신청이었다.


집안에 있는 아빠를 아들은 낯설어했다.

부모님께 알리는 건 물론, 처가에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하는 현실적 고민으로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침대 위에서 며칠을 뒤척이다 겨우 등을 일으킬 힘이 생겼다.


결국 스스로 이겨내는 수밖에 없다는 뻔한 결론에 도달한 순간의 고통을 잊을 수 없다


육아에 관심 많은 아빠, 밖에서 보면 꽤나 가정적으로 보이는 나도 결국 퇴근 후, 주말에는 소파에 등 붙인 게으른 아빠에 불과했다.

먼저 퇴근 후 어지러운 집안을 잔소리로 치우던 내게 매일을 전투하듯 살아내는 아내가 눈에 들어왔다.

 

집안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매일마다 시간을 쏟아도 테가 1도 나지 않은 집안일 들을 정리한다.  

표가 나지 않아도 닦아 댄다. 존버가 길러준 건 꾸준함이다.

닦다 보니 버려야 할 것들이 보였다.

비워내니 정리의 조각들이 들어갈 여지가 조금씩 생겼다.


아들의 훌쩍 자란 정강이 뼈와 발바닥에 생긴  굳은살과 어느새 아들이 고개를 쳐들지 않아도  눈을 맞출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일 몸을 맞대고 볼을 비비며 지냈지만. 아들은 생각보다  훌쩍 자라 있었고

내가 아들의  성장에  기여한 바는 생김새와 자라는 데 필요한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으로서의 역할이었던 것 같다.



아들을 재우고 유치원 가방을 싼다.

식판을 닦아 넣고 물통에 물을 담아 가방에 넣는다.

모바일 알림장을 열어 교재를 확인하고 누락된 과제는 아침에 챙기기로 한다.

낮에 미처 준비 못한 준비물은 쿠팡 총알배송으로 내일 아침 새벽 현관 앞에 준비해 놓았다.  

  

일상으로부터 멀어짐으로 가족에 기여한다고 생각한 나날이 지나고, 일상에 깊이 파묻혀 겨우 아빠로서의 내가 보였다.


세상은 결국  예기치 못한 선택지의 연속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확신은  커다란 실망감을 수반하며  마지못한 선택은 의외의 희열과 평안을 안기기도 한다.


40대의 육아휴직은 끝을 알수없는 직장인의 사회생활에서는 기대할 수없는

낮에 꿈을 꿀 수 있게 해 줄지도 모른다는 묘한 떨림을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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